[서평] 『예술의 섬 나오시마』

다른 삶의 가능성, 섬 나오시마

조태성_서울신문 기자

 

용산국제업무지구. 지금이야 이곳이 청산절차에 따른 법적 논란이 관심거리지만, 시간을 조금 더 앞당기면 과연 그 고층빌딩군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가 관심거리였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해외 유명 건축가들을 불렀는데, 그 건축가들이 이전 작업에서 보여준 개념을 덩치만 키워서단순 반복한 거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아니 톡 까놓고 아주 잔인하게 말하자면 용산국제업무지구가 해외 건축가들의 '봉'으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계획이 사라졌으니, 이런 수근거림을 확인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게 됐지만. 기껏 돈 들여 큰 공사를 벌였는데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인 사례는 많다. 서울시청사 논란도 그랬고, 곧 완공을 앞두고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그럴 예정(?)이다.

지추미술관에 전시된 모네의 '수련' 모습

▲ 지추미술관에 전시된 '수련'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의 탄생

멋진 건물이 만들어내는 멋진 공간 구성은 매혹적이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가게가 새로 열리고, 물건들이 드나들면서 다시 사람들이 늘어난다. 너무나 매력적인 판타지여서, 누구나 탐내볼만한 시도다. 그래서 해외 성공 사례를 열심히 찾아본다. 그리고 그 사례를 비싼 돈 주고 모셔 와서 고스란히 옮겨놓으면 우리도 뭔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요즘 그런 모델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나오시마'가 우선일 것이다. 제주도와 남해안 다도해 얘기라면 이 나오시마 얘기가 빠지질 않는다.

대체 나오시마 섬이 어떤 섬이길래 그럴까. 경과만 요약하면 이렇다. 이 지역에 관심 많았던 베네세그룹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이 건축가 안도 타다오를 끌어들여 섬에다 미술관과 호텔을 결합시킨 베네세하우스를 지어서 개관한 것이 1992년이다. 1997년부터는 섬 주민과 함께 섬 전체를 변화시키는 이에(家)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04년에는 말 그대로 땅 속에다 건물을 묻은 것으로 유명한 지추(地中)미술관을 지었다. 서양미술의 정수가 지추미술관에 있으니 동양미술의 정수도 지어보자 해서 2010년 이우환미술관도 만들었다. 이 작업은 이웃 섬으로도 번져갔다. 이누지마 섬의 구리제련소를 세이렌쇼미술관으로 바꿨다. 산업폐기물 불법 투기장이었던 테시마 섬에는 2010년 테시마미술관을 지었다. 사람들의 열광이 이어지자 아예 2010년부터는 이들 섬과 이웃 지역을 한데 묶어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트리엔날레를 열었다. 7월 19일 시작해 105일 동안 진행된 2010년 예술제엔 무려 95만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 책 표지

인간을 움직이는 공간

둘레 16km, 주민 수 3,300명 수준에 불과한 작은 섬 나오시마에서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예술의 섬 나오시마』(마로니에북스 펴냄)는 그 의문점에 대한 해답이다. 인터넷 조금만 뒤져보면 나오시마 관광상품이나 정보, 다녀온 사람들의 소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책엔 나오시마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주역들, 그러니까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은 물론, 건축가 안도 타다오를 비롯해 현대미술 섬을 꾸미는데 기여한 예술가, 큐레이터들의 글이 실려 있다. 자신들이 이런 판을 벌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한 것이다. 거기다 사례연구를 위해 여러 번 섬을 방문한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도 해설을 달아뒀다.

현대건축과 현대미술에 대한 너무 많은 얘기가 있으니, 여기선 그 유명한 지추미술관만 거론해보자. 안도 타다오는 노출콘크리트의 건축가다. 노출콘크리트는 빛을 빨아들인다. 그래서 자기가 번쩍이며 나서는 게 아니라 뒤로 수줍게 물러나면서 깊은 공간감을 보여준다. 그걸 또 땅에다 묻었다. 아키모토 유지 전 지추미술관장 말마따나 "밖에서 봤을 때는 건축적 부피감이 거의 없으면서 건물 안에서는 자연을 지척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남은 것은 섬에 쏟아지는 자연의 빛 뿐이다. 그 건물 안 공간에 걸린 작품은 클로드 모네의 연작 '수련' 가운데 하나다. 수많은 인상파 가운데 오직 단 하나의 인상파만 고르라면 모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빛을 연구하고 빛에 탐닉했던 화가다. 그의 그림을 부드러운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에다 걸어놓고, 그 바닥에는 직경 2cm짜리 대리석 70만개를 촘촘히 박아뒀다. 이 연출 역시 빛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빛의 화가가 그린 빛의 작품을 빛의 건축가가 빛의 공간에다 놓아둔 것이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작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지추 미술관에 전시된 ˝Time/Timeless/No Time˝ Photo_Michael Kellough 사진

▲ 지추 미술관에 전시된 "Time/Timeless/No Time"
Photo_Michael Kellough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의 육성을 들어보면 세 가지가 눈에 띈다. "예술이 자기만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역사가 지닌 장점을 끄집어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간을 움직인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단순한 감상을 넘어 보는 이의 삶의 방식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훌륭한 점이다." 그러니까 현대문명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한번 툭 던져놔 보여주는게 현대미술의 장점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예술의 위대함 운운하며 윽박지르지 말라는 거다. "인간이라면 행복해지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럼 좋은 곳은 대체 어떤 곳인가. 나는 노인이 웃으며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노인은 인생살이의 달인이다." 산업폐기물이나 밀려들던, 그래서 한때 주민 수가 300명까지 줄었던 조그만 섬 나오시마에 주목한 이유다. "나는 '공익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을 제창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한마디로 '금융자본주의'라 해도 좋을 것이다. 기업 활동의 목적은 문화이며, 경제는 문화에 종속되어야 한다. 부를 창조할 수 있는 건 기업 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의 배분 방법이 문제이며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일부를 기업 스스로가 좋은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에 공헌하는 것은 어떨까." 198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20년 이상의 시간을 나오시마 섬 일대에 투자한 이유인데, 입이 쩍 벌어질 얘기다.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Photo_Tadasu Yamamoto 사진

▲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Photo_Tadasu Yamamoto

장소의 시간성을 담아내는 작품

미술계에선 흔히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이란 말을 쓴다. 폼 좀 나는 말은 인플레이션을 겪기 마련이다. 어떤 장소에 맞춰 만들었다면 다 장소 특정적이란 말을 가져다 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구 역사를 활용하면 오르세 미술관이요, 화력발전소를 이용하면 테이트모던이라는 식이다. 그러니 제주나 남해 다도해에서 나오시마를 자처할까봐 슬슬 겁이 난다. 진짜 장소 특정적 작품은 그 장소의 시간성을 담아내는 것이지, 남의 장소, 남의 시간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해외 유명 작가를 데려와 요란한 건물 세워도 별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 아닐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가 야심작 추진을 선언했다.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서울 용산구 서계동, 그러니까 서울역 뒤편 백성희장민호극장 자리에다 서초동 예술의전당 같은 대형 복합문화예술공간을 짓겠다는 계획이다. 현실성이 있네, 없네 말들이 조금씩 나도는 모양인데, 현실화된다면 서울역과 연계된 진정한 '장소-특정적'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

 
 
조태성 필자소개
조태성은 서울신문 문화부에서 출판담당기자로 있다. 책 보고 글 쓰는 거 좋아한다 말했다가 헉헉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덧글 0개

덧글입력

quick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