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그을린 예술』

사회적 실재와 꿈의 만남

박돈규_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 『그을린 예술』심보선 저 (민음사, 2013년)

▲ 『그을린 예술』심보선 저
(민음사, 2013년)

 삶은 왜 이토록 이해하기 어렵고 엉망진창인가

표지는 제목만큼이나 우울하다. 주황색을 보며 국군 장병의 체육복을 잠깐 떠올렸다. 화로 속에서 이글거리던 숯의 빛깔도 스쳐갔다. 국어사전은 '그을리다'의 의미를 "햇볕이나 불, 연기 따위를 오래 쬐어 검어지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을린 예술'이라는 활자는 숯검정마냥 까맣다. "지금 내 앞에는 아름다운 말들이 모닥불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와 같은 자잘한 문장들이 표지 위로 흘러간다.


외형만으로도 읽고 싶은 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책이 있다. 정직하게 말해 '그을린 예술'은 후자였다. 프롤로그를 펼쳐보자. "예술은 죽었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라고 적혀 있다. 이 책이 예술의 죽음에 관한 것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그을린 예술'이라는 형태로 그것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이 전해진다.


이 산문집은 당초 한 권으로 묶기 위해 계획된 책이 아니다. 연구·강연·청탁 등 외부 요청으로 시작된 글들을 그러모았다.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저자는 "문학과 예술과 삶이라는 공통분모로 아우를 수 있는 글들"이라고 썼다.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을 '그을린 예술'이라 부르고 싶다"는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은 얼마나 진부한 표현인가. 그렇지 않은 예술이 얼마나 있나. 하지만 이 책은 '그을린 예술'이라는 명명(命名) 또는 렌즈로 문학과 예술,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쩌면 시나 사회학도 그런 이름 부르기에서 출발하는 것일지 모른다.


"네가 하는 예술은 참 공허한 것 같아. 그러니까 잘해. 사회가 너희 같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있으니까 말이야."


고교 선배(변호사)가 저자에게 했다는 말이다. 변호사는 생산적이지만 지루한 직업이고 예술가는 비생산적이지만 매력적인 직업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심보선은 "예술을 창작하고 해석할 때 행복한 이유는 자신의 평범하고 궁색한 처지를 타인과 함께 지각하고 나누면서 인간적으로 갱신되고 고양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까스로 자유를 되찾고 세계의 비참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그래서 불멸의 고전이다. 불가능한 것은 황홀하다.


파울로 코엘료가 지난 4월 21일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Reality is different from fiction. in fiction, things need to make sense." 현실이 하도 갑갑해서일까. 이 문장은 거꾸로 "삶은 왜 이토록 이해하기 어렵고 엉망진창인가" 하는 불평처럼 읽힌다. 현실이 팍팍하기는 지구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읽을지 모른다.

▲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앞에 위치한 조형물에는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이라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사진제공_박돈규)

▲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앞에
위치한 조형물에는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
이라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사진제공_박돈규)

 진실을 말하되 허구로 말하기

이 책에 실린 산문 중 <예술가의 (총)파업>, <저자, 전자책, 전자 문학>, <예술상(賞)과 예술장(場)>, <잔존하는 문학의 빛>이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나와의 접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이 법인화되던 시절에 나는 연극 담당이면서 문화체육관광부 출입 기자였다. 연극상과 희곡상 등 시상식을 운영했고, 외부 요청으로 심사위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출판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예술가의 (총)파업>에서 저자는 "많은 예술가와 예술 단체들이 국가와 시장의 후원을 받아서 '유희적 신체'를 발명하고 있고, 이런 발명 행위들이 국가와 시장의 관리에 의해 효과적으로 통치되고 있다"라고 썼다. "현대의 예술가는 그저 불행하게 소진되는 일만 남은 건 아닐까? 일이 없어 시간이 많을 때는 광막한 불안으로 소진되고 일에 쫓겨 시간이 없을 때는 숨 막히는 공포로 소진되는 것 아닌가?" 즉 예술가의 파업이란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된 상태 또는 과잉 착취에 대한 거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할 수 없다. 2010년 법인화된 국립극단의 경우를 보자. 당시 국립극단 단원 23명의 평균 연령은 53.2세. 대부분 입단 20~30년이 넘었다. 공연을 올려도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았다. 해마다 평가를 했지만 요식 행위에 그쳤고 정년제 논의도 노조의 반대로 유야무야됐다. 그렇게 정체되면서 단체는 예술적 긴장을 잃어버렸다. 시스템에서 배제된 것도 아니고 과잉 착취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의 파업을 지지할 연극인도 없다시피 했다. 당시 한 연극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처우가 안정적인 국립극단의 작품이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면서 예술가에겐 '불안정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그 불안정성이 사람을 갉아먹기 때문에 이상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국립극단이 이번 변화를 환골탈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직업적 안정이 반드시 예술적 저하를 초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국립극단의 경우는 불행히도 그랬다. 법인화된 국립극단의 첫 작품 <오이디푸스>(연출 한태숙)는 그 해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몸이 고되더라도 박수 받는 무대에 서길 바랄 것이다. 예술적 긴장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금이 들어가는 단체인 만큼 애정 어린 비판과 감시도 필요하다.


<예술상(賞)과 예술장(場)>은 아픈 지적이다. "이제 예술상의 주인공은 수상 작가도 아니요, 심사위원도 아니다. 상을 제정하고 시상하는 기관 자신"이라는 문장이 통렬하다. 내가 몸담은 신문사도 상을 여럿 운영하고 있지만 몇몇에 대해서는 '저걸 왜 만들었을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종이신문의 위기는 문화면의 위기와 직결돼 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존재 증명'을 위한 시상식이 늘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마라톤에 빗대면 팍팍한 앞부분이 난코스다. 시인이자 사회학자라서 가능한 시각과 글쓰기를 보여주는 대목이 반갑다. "배우가 가장 깨끗한 수건으로는 무대를 닦고 가장 더러운 걸레로는 자신의 몸을 닦는 것, 진실을 말하되 허구로 말하는 것"(연극평론가 안치운)을 모순 어법이라고 한다. 예술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그을린 예술'은 그렇게 거꾸로 비추어서 바로 보게 한다. 카프카나 말라르메처럼 낮에 일하고 밤에 글을 쓰는 것, 쉬거나 자야 할 시간에 '파업'을 벌이는 것, 그러면서 행복하게 소진되는 삶은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박돈규 필자소개
박돈규는 조선일보 문화부 출판 담당 기자로 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불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저서로 에세이 『뮤지컬 블라 블라 블라』가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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