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에게듣다] 티사 호(Tisa Ho) 홍콩아트페스티벌 총감독

“일은 내가 아니라 팀이 하는 것”

이승엽 _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과 교수

홍콩아트페스티벌은 전통이 오랜 축제다. 그런 만큼 부담이 크다. 내가 홍콩아트페스티벌에 부임했을 때 비전이 뭐냐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왜 그런 것이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일은 내가 아니라 팀이 하는 것이다. 그들과 미래를 개척하겠다. 나는 우리 스태프가 자랑스럽다.



홍콩아트페스티벌홍콩 아트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간 김에 페스티벌 총감독인 티사 호(Tisa Ho)씨를 만났다.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진 예술경영 전문가인 티사 호씨와의 인터뷰는 축제가 한창인 2월 17일 오전에 약 1시간 15분간 진행되었다. 장소는 홍콩 완차이 지역에 있는 홍콩 아트센터 12층 홍콩 아트 페스티벌 사무국. 사무국 구석에 총감독인 그의 자리가 있었다. 인터뷰 자리에는 연극담당 기획자인 소궉원이 배석했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은 근대적 의미에서 시작된 국제공연예술축제로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서가 깊다. 1973년 시작했다. 우리나라 공연단체로는 극단 학전(<지하철 1호선>), 극단 여행자(<한여름밤의 꿈>), 임진택 씨 등이 초청받은 바 있다. 금년에는 안무가 박호빈씨가 데니 융 프로젝트에 초청받아 협업하였고 안무가 김남진이 '아시아 태평양 댄스 플랫폼'에 초대받았다. 홍콩아트센터, 홍콩문화센터, 홍콩공연예술원 등 홍콩의 주요 공연장에서 약 한 달간 개최된다. 금년은 2월 6일에 시작해서 3월 8일에 막을 내린다. 연극, 무용, 오페라, 중국 오페라(경극, 곤극 등), 클래식 음악, 월드 뮤직 등 공연예술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홍콩아트페스티벌

40여 개의 작품이 180여 회 공연되는데 그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클래식 음악이다. 금년에는 하이팅크가 이끄는 시카고심포니오케스트라를 필두로 13개의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금년 공연작품에는 작년에 LG아트센터와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에 왔던 아이슬란드의 베스트푸트와 금년에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할 '아크람 칸과 쥘리에트 비노슈'가 포함되어 있다.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베스트푸트의 <변신>은 홍콩에서도 인기가 높아 추가공연을 마련할 정도다. 홍콩 반환 이후 중국 공연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개막 당시 축제 측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축제 전체 객석의 88%가 팔렸다고 한다. 역시 축제 측의 발표에 의하면 작년에는 모두 98%가 유료관객으로 채워지고 90%의 공연이 매진되었다고 전한다.

2005년 홍콩아트페스티벌의 CEO로 부임한 티사 호씨는 1948년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랐다. 홍콩에서 대학까지 다녔고 영국 시티대학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방송 쪽 일을 하다가 싱가포르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예술경영 현장에 뛰어들었다. 싱가포르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는 9년간 일했다. 그의 작업배경을 클래식 음악으로 보는 것은 이 때의 경력 때문이다.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작가이며 편집자이기도 하다. 홍콩예술경영자협회 회장, 아시아태평양예술축제 협의회 부회장도 맡고 있다.



아시아의 유서 깊은 국제공연예술제, 홍콩아트페스티벌

타사 호반갑다. 이 분야에서 일한지 30년 쯤 되었나?

더 되었다. 젊게 봐주니 고맙다. 1948년생이다. 더 자세한 인적사항은 묻지 마라. 전에 호주 정부의 초청으로 호주에 방문했을 때 내 사사로운 사적 정보가 여기저기 복사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나는 물론이고 내 남편의 이름과 직업, 나이 등도 들어 있으니 난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성한 두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간단히 본인 소개를 해달라


홍콩에서 대학을 마치고 런던 씨티대학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했다. 홍콩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라디오 같은 것과 관련된 그저 그런 일이다. 1984년에 싱가포르에 가면서 본격적으로 예술분야의 일을 했다.

싱가포르 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도 일한 것으로 안다. 예술의전당에서 근무할 때 싱가포르심포니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담당한 적이 있다.


몇 년도인가? 그 때 오케스트라 매니저는 내가 아닌 것 같다. 나는 1991년부터 약 9년간 일했다. (그는 이 기간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오케스트라 연합체를 결성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페스티벌도 만들었다는데?

그렇다. 별로 큰 축제는 아니다. 금년으로 16회쯤 되는데 피아노페스티벌이다. 싱가포르아트페스티벌도 잠시 간여했다.

홍콩아트페스티벌로 홍콩에 금의환향한 셈이다.

2005년에 돌아왔으니 금년으로 네 번째 축제를 맞았다. 전임자는 더글러스 고티에(현 호주 애들레이드 페스티벌 센터 사장)였다.

총감독 지명 당시 홍콩아트페스티벌 이사회 의장 찰스 리씨는 '그는 축제에 강력한 경영력과 예술적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다. 그는 고도의 예술적 수준과 관객만족의 우리의 오랜 전통을 만족시켜줄 것이다'라고 기대를 표시한 것으로 안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은 전통이 오랜 축제다. 그런 만큼 부담이 크다. 내가 홍콩아트페스티벌에 부임했을 때 비전이 뭐냐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왜 그런 것이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일은 내가 아니라 팀이 하는 것이다. 그들과 미래를 개척하겠다. 나는 우리 스태프가 자랑스럽다.




"우리는 아날로그 커뮤니케이션이 통하는 작은 조직"

사무실이 북적인다. 스태프는 몇 명이나 되나?

상근 스태프가 모두 17명이다. 크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 팀은 매우 강력하다. 이들이 모두 예술적, 사업적 지식과 판단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무엇보다 열려 있다. 우리는 대화를 중시한다. 작은 조직에서는 아날로그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통한다. 예를 들어 금년에 공연한 팀 크라우치 공연의 경우 나와 연극담당 프로그래머인 소궉원이 에딘버러에서 공연을 보았다. 둘이 따로 보았는데 나중에 얘기해보니 둘 다 좋아하더라. 이처럼 우리의 관심 대상이 되는 공연은 관련된 사람이 다 보려고 한다. 물론 의견이 다를 때는 기획담당들이 나를 압박한다. 나는 이 압박을 즐거이 받는다.

우리 실정으로 보면 17명의 상근 인원은 많아 보인다.

그렇지 않다. 축제 프로그래밍과 진행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체제작과 공동제작도 하니 일손이 필요하다. 물론 축제 기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초청공연 외에 자체제작을 많이 하는가?

자체제작은 대충 3가지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첫째는 순수한 자체제작이다. 팀을 짜고 연습하고 공연하는 전 과정을 우리가 맡는다. 매우 힘든 작업이다. (옆에서 소궉원이 '티사가 부임한 이래 협업이 본격화되었다'고 거든다.) 두 번째는 공동제작이다. 공동제작은 홍콩 내의 극단이나 예술단체들과 하는 작업도 있지만 국제적인 작업도 있다. 금년 프로그램 중에는 주니(ZUNI)와 함께 한 데니 융의 〈Book of Ghost〉가 그러한 케이스다. 세 번째는 투자와 비슷한 개념의 위탁(commission)이다. 이번 축제에 몇 작품 선보인다. 위탁은 위험을 분산시키고 안정된 프로그래밍을 하는데 유리하다. 자체 제작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발한 작품은 텍스트를 출판도 할 계획이다.




"한마디로 하면 'In and For Hong Kong"

(뻔한 질문이지만) 공동제작은 왜 필요한가?

우리는 이미 피나 바우쉬 등과 국제적인 공동제작을 시작한 상태다. 금년 프로그램 중에는 〈The White Body〉는 5개 축제가 같이 만든 작품이다. 홍콩에서 세계 초연이 이루어지니 좋다. 앞으로 프랑스, 뉴질랜드, 홀란드 등에서도 공연될 것이다. 나는 새 작품이 한번 공연하고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때문에 공동제작을 선호한다. 〈Little Toys〉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뮤지컬도 국제적 협업이 이뤄진 좋은 예다. 홍콩과 상하이, 코펜하겐, 싱가포르 등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일본의 신국립극장과도 공동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의 예술의전당도 비슷한 작업을 한 것으로 안다. (김명화와 히라타 오리자가 쓴 <강건너 저편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로그래밍 정책은 어떤가? 특별한 것이 있나?

우리의 프로그래밍 방침은 단순하다. 축제를 준비하는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을 고른다.(웃음) 되도록 관객의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완성도이다. 공연의 질을 따지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 않나? 두 번째는 이 작품이 홍콩의 축제에 오는 관객을 어떤 식으로 자극하고 놀라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본다. 세 번째는 그것이 홍콩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지 않는다. 한 마디로 줄이면 'In and For Hong Kong' 이다.

예술경영 세미나를 매해 개최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창하다. 작년에 버팔로 대학과 제휴하여 '펀딩 모델 비교'라는 주제로 각국의 전문가들이 모였다. 그들의 대화는 한권의 책으로 나와있다.) 어떤 계기가 있으면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차 한잔 하면서 가볍게. 예를 들어 금년에 초청된 시카고심포니오케스트라의 내공 깊은 매니저와의 만남 자리 같은 것이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은 공연뿐 아니라 공연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도 유명하다. 예술경영 세미나는 그 중의 하나다.) 홍콩에는 예술경영협회(그가 회장이다)가 있는데 회원들끼리 관심사를 공유한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의 비용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은 커뮤니티의 니즈로부터 출발한 축제다. 지금 37회니까 시작은 식민정부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식민정부는 홍콩이라는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문화예술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에 우리 축제는 민간부문에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예산의 80%를 벌어서 충당한다. 당신 축제는 어떤가? (필자가 '지원이 약 80% 정도 된다'고 대답한다.) 80%를 지원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주공연장인 홍콩아트센터나 홍콩문화센터 등과 같은 홍콩의 공연인프라들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모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홍콩아트센터에 있는 이 사무실이나 공연장 등도 모두 돈 내고 빌린 것이다.


"사랑하라,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어렵겠다. 홍콩아트페스티벌에 대해 광고 좀 해보라

고맙다. 홍콩은 전형적인 다인종, 다문화 지역이다. 홍콩은 지정학적으로도 특별한 곳이다. 진정한 허브에 해당된다. 3~4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국가나 도시가 많다. 서울은 어떤가? 홍콩의 매력인 쇼핑은 낮에 하고 밤에는 공연을 볼 수 있다. 오고 싶은 사람은 올 수 있도록 배려한다. (페스티벌 기간이 구정 연휴와 3월 시즌 사이의 관광 비수기를 이용한다는 초기의 발상도 일리가 있다. 물론 이것이 페스티벌의 첫 번째 존재이유는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어려움은 없나? 커뮤니티는 호의적인가? 예술가 집단은 물론 정부, 기업 등이 도와야 축제는 성공한다고 본다.

왜 어렵지 않겠나. 그러나 다들 자기 일처럼 도와준다. (페스티벌의 주요 후원자로 조키 클럽과 기업이 포함되어 있다.) 그 덕에 나는 새 아이디어를 결합하여 항상 새로운 축제를 만들고 싶다.

당신을 아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나?

한국에 대해 항상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이종호 씨(SIDance 예술감독)나 안호상 씨(서울문화재단 대표) 등의 이름이 기억에 남는다. 지난 2007년에 서울문화재단의 초청으로 SINSFO1)에 참여한 적이 있다. 작년 우리 세미나에는 한국 대표가 참가했다.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하고 싶고 그 때는 가능하면 공동작업을 하고 싶다. 한국과는 무한한 가능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경영지원센터라고 아는가? 서울아트마켓을 주관하는 공공 에이전시다. 당신을 인터뷰하는 이 글도 이 기관이 발행하는 웹진에 실릴 예정이다.

PAMS는 아쉽게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2년 전인가 PAMS 초이스 심사를 의뢰받은 적도 있다. 내 사정 때문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다음에는 꼭 참여하겠다. 아쉽게 홍콩에는 예술경영지원센터 같은 데가 없다. 독특하지만 좋은 역할 모델이라고 본다.

끝으로 예술경영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당신이 만드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 쓸데가 없다.



 


 

1) 서울국제축제기획자네트워킹세미나. Seoul International Networking Seminar for the Festival Organizers.

 


 

이승엽

필자소개
이승엽은 1987년부터 예술의전당에서 극장운영과 공연제작 일을 하다가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덧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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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멀더요원
  • 2009-02-27 오전 10:59:52
역시나 알차고 위트있는 인터뷰! 좋은 정보 얻고 갑니다![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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