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브로드웨이의 유령 - 한 연극학자의 뉴욕 방랑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예술적 열망이 담긴 연극 저널

임수연_한국공연예술센터 문화사업부 차장

▲ 『브로드웨이의 유령 - 한 연극학자의 뉴욕 방랑기』 강태경 저(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4)

연극 예술은 언어라는 매체를 주요 매개로 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예술 형태보다 지역적이며,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이다. 지역별로 문화적·언어적 전통은 확고한데, 그 확고한 구체성 위에 우주적 보편성을 세워야 하니 누구나 좋은 작품이라고 칭송하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해외 연극 공연을 우리 무대로 옮겨오기 위해서는 ‘번역’이라는 또 하나의 창조의 과정뿐 아니라 ‘물리적 이동’에 따른 작품 자체의 변형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사항이 수도 없이 많다. 여기엔 극장 조건과 같은 실질적 환경뿐 아니라, 우리 관객의 관점과 지식, 취향, 그리고 공연을 관극한 궤적까지도 포함된다.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고려해야 할 사항도 많다. 무엇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 속에서 이 책을 만났다.

유한한 자의식과 무한한 절대정신

이 책의 저자 강태경 교수는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영문학자이면서, 한태숙 연출가의 <오이디푸스>(국립극단), <꼽추 리처드>(예술의 전당), <유리동물원>(명동예술극장)의 드라마투르그로 작업 현장에도 몸담아 온 연극학자이다. 그가 지난 1년간 미국 뉴저지에 체류하면서, 사진작가가 출사를 나가듯 뉴욕으로 관극 투어를 나선 방랑의 기록들을 모아 책으로 내놓았다. ‘헤겔의 유한한 자의식과 무한한 절대정신’, 저자는 줄곧 그 사이를 항해하고 있다. 강단에 서는 학자로서의 명징한 자의식과 연극 예술에 대한 무한한 연모를 품은 방랑예술가의 정서가 만나고 있다. 축제의 라인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매번 그 정체성을 정비하고, 예술성과 마케팅 가능성을 함께 가늠하는 과정에서 축제라는 덩어리 앞에 프로그래머로서 느끼는 나라는 존재의 부딪침과 갈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의식과 절대정신’과의 대면이다.

저자의 관극 궤적은 남북으로는 맨해튼의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좌석수가 500석이 넘느냐로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을 구분하지만, 때로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극장과 오프 브로드웨이의 연극 극장을 구분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를 망라하며 브루클린 덤보의 세인트 앤즈 웨어하우스, BAM에 이르고, 동서로는 첼시의 소공연장부터 이스트빌리지의 라마마와 같은 극장을 섭렵한다. 굳이 형식으로 구분하자면 링컨센터 시어터, 퍼블릭 시어터 등 유명 비영리 극장에서 공연된 웰메이드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관극 지형도가 보여주듯 동서로 뻗은 웨스트빌리지와 이스트빌리지에서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한편, 스칼렛 조핸슨, 올랜도 블룸, 에단 호크, 앨런 커밍 등 유명 스타들의 출연이 잦았던 2013년 오프 브로드웨이의 연극 작품들에 대한 리뷰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책 초반 웨스트빌리지 맥키트리 호텔에서 관극한 <그대 다시 잠들지 못하리라>에 대한 소개가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맥베스의 장면들을 공간 도처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장소특정형 체험 공연으로, 작품 속 무대를 정신병동으로 상정하였다. 멕베스 부부가 욕조에서 피를 씻고, 마녀들의 광란 파티를 배우들이 나신으로 재현하는 등 자극적인 연극 체험을 그리고 있는데, 에단 호크가 연기한 멕베스와 앨런 커밍의 일인극 맥베스를 함께 비교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가장 감동적인 공연 리뷰는 퍼블릭 시어터에서 공연된 <사천의 착한 사람>이었다. 셴테와 쉬타 역을 맡은 배우 테일러 맥(Taylor Mac)이 아기를 갖고 무대 위에서 기뻐 춤추는 모습에서 느낀 저자의 감동이 생생히 전달됐다. 배우의 성정체성까지 중첩적인 의미로 다가왔고, 과거에 들었던 그의 연설이 떠올라 작품의 의미는 배가되었다. 테일러 맥은 2013년 1월 퍼블릭 시어터에서 열린 ‘언더 더 레이더 페스티벌(Under the Radar)’에서 재치와 통찰력에 빛나는 오프닝 기조연설을 한 적이 있다. 그 연설이 재미있어서 노트를 해두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연극 예술가는 옷을 좀 멋지게 입는 블루칼라 배관공 같은 존재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필요로 하는 요구(needs)를 채워주는 일을 하니까. 뭐 가끔 우연히 원하는 것을 하게 될 수도 있다.”라고. 셴테는 그런 존재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존재, 남자와 여자가 공존하는 존재, 바로 배우다!

▲ 퍼블릭 시어터 로비에 설치된 셰익스피어 머신 설치물

뉴욕의 냄새, 뉴욕을 찾는 이유

이 책의 최대 장점이라면 ‘뉴욕의 냄새’라 하겠다. 책 구석구석에서 뉴욕의 풍경과 분위기까지 온몸으로 느끼려 애쓰면서 주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고 다가서는 저자의 열망이 느껴진다. 단상들과 풍경과 연극이 생각의 덩어리가 되어 묶여있다. 저자가 쌓아올린 예술적 지성의 촉들이 아우성치는 느낌이랄까.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보고 느낀 관극 여행기인데, 저자의 생애를 다 부어넣은 느낌마저 들었다. 연극을 보러 가는 흥분과 기대는 전날 기차역을 미리 탐사하게 하고 어린 시절 기차역 옆에 묻힌 몸이 불편했던 친구를 떠올리게도 한다. 넘치는 수사가 처음에는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덤보에서 우연히 만난 흑인 시인 에드윈 허들의 시집을 사서 읽고 성장하지 못한 어른을 진단하며 생각에 잠기고, 허드슨 강변에서 연 날리는 사람들에게서 심지어 미끄럼틀에서도 광대를, 배우를, 연극을 발견하는 진정성에 어느덧 감화돼 버리고 말았다. 오프 브로드웨이의 황금기를 이끌어온 연출가 리처드 포먼, 극작가 장 클로드 반 이탈리의 현존을 확인하고 존경심을 표현하는 저자에 동감하고, 배우 애드 해리스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희열에 공감했다.

이 책은 단순한 뉴욕 여행서도 아니고, 연극 리뷰 모음도 아니다. 일기와 에세이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저널(journal) 형식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손택-다시 태어나다>도 수전 손택의 저널을 연극화한 것인데, 2013년에 SPAF에서 소개했던 인연이 있어 저자의 좋은 평가가 반가웠다.)

뉴욕의 공연 현장이 궁금한 축제·공연 프로그래머, 프로듀서, 극장 관계자들에게 영감과 아이디어를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뉴욕의 공연예술 작품들을 생생히 보는 것 같은 묘사를 통해 현장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해외 작품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작품을 어떤 맥락으로 바라봐야 할지, 소개하는 관점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혹여 공연예술계와 어떤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지적·감성적 허영을 구하고 예술을 열망한다면 뉴욕은 유효한 처방이다. 앞에서 언급한 연설에서 테일러 맥이 말했듯, ‘사람들이 뉴욕을 찾는 이유는 그곳에 경제의 중심지 월스트리트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술이 있기 때문이며, 연극 예술은 과거를 배우고(learning), 현재를 살며(living), 미래를 꿈꾸도록(dreaming)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진은 책에 소개되진 않았지만, 필자가 소개하고 싶은 맨해튼의 극장들이다. 웨스트빌리지 19번가에 위치한 공연공간 '키친’(왼쪽), 뉴욕의 4대 비영리 공연극단인 라운드어바웃시어터의 ‘스튜디오 54’(오른쪽)

 

 

사진 제공_필자

 

 
 
필자소개 필자소개
임수연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연극 프로듀서로 해외공연 섭외를 담당하고 있다. 예술위원회 국제교류팀, 정책실 등에서 근무했고, 마로니에여름축제 프로듀서로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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