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에게듣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백남준은 소외되어 있다”

양지연 _ 동덕여대 큐레이터과 교수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라는 수사만 있지 백남준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다. 백남준의 독보적인 사유의 패턴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얼마간 백남준 연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일종의 운동처럼. 앞으로 있을 국제세미나의 제목은 모두 '백남준의 선물'이 될 것이다. 21세기 예술의 어머니로서 우리 각자의 사고, 감각, 삶의 형태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예술은 나누어야 한다는 '증여로서의 예술' 개념이 그의 선물이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작년 10월 문을 연 지 6개월에 접어들었다. 이미 아트센터 내부 설계와 개관 기념행사 준비 등 개관 전부터 총 책임을 맡아 숨 가쁘게 일해 온 것으로 한다. 그간의 일을 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보다 이 집을 완성시킨 일이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을. 건물의 외관만 갖춰진 상태에서 관장직을 맡게 되었다. 전시실을 포함해 미술관에 필요한 내부 인테리어를 직접 구상하고 밤낮없이 기본 도면을 그려가며 8~9월 두 달 만에 계획한 것이 끝났다. 매우 한국적인 상황이고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이 공간이 개관할 때 어떤 모습으로 될지 참 궁금했다. 내부 설계 구상을 위해 답사 여행을 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부석사를 비롯해 조그만 사찰, 서원 건축들을 보면서 공간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무공간, 전시실, 카페테리아, 가구, 전등, 바닥 등을 직접 디자인했다. 등 대형 설치 작품들의 상설화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지금까지 큰 국제 프로젝트들을 많이 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외국 전문가들의 관심과 시선, 백남준이라는 무게가 심리적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이고, 모든 것은 단 한번의 기회이다. 최선을 다해 성취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자신이 오래 살 집이니만큼 무엇보다 백 선생이 크게 도왔다고 믿는다.


"백남준은 굉장히 어려운 예술가"

이영철
백남준 선생 자신이 생존에 미래에 지어질 이곳을 일컬어 명명했다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이 기관의 미션과도 연관될 것이다.

백 선생이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2032년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고. 그래서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것은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 오래 가는 곳을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2032년은 너무 멀다. 그 사이에 우리가 백남준의 뛰어난 위업에 대해 똑바로 규명해내지 못하면, 백남준의 이름은 전설이나 신화처럼은 남겠지만 그 위업에 대한 평가 작업은 지금처럼 피상적이거나 서서히 잊혀질 지도 모른다.

워홀, 보이스, 케이지 등과 비교할 때, 최근 10년 동안 국내외에서 백남준에 대해 영향력 있는 논문은 사실상 한편도 안 나왔다. 우리 여건이 좋아지고는 있다지만 그의 위업을 감당하고 그것을 바깥 세상에 증명해내기에는 선진국과 막대한 격차가 있다. 또한 지금까지 비디오아트의 '아버지', '선구자', '조지 워싱턴' 등 수사적 표현만 떠다닐 뿐, 백남준 사유와 예술적 행적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 심층을 탐사하여 이론적으로 밝혀내고 교육 현장 안팎에서 그를 이해하려는 작업이 너무나 부족하다.

지난 20년 간 한국은 백남준 이미지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반대급부로 그의 국제적인 명성과 이미지를 이용하고 과도하게 소모해 왔다. 가난과 역경 속에서 성공 신화를 이룬 백남준 또한 고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집은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외국의 경우를 좀더 언급하겠다. 휘트니 미술관, 브레멘 쿤스트할레,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등이 많은 노력을 들여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로 만들어냈다는 점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독일 칼스루에의 ZKM(Zentrum fur Kunst und Medientechnologie,·미디어아트센터)은 설립 취지를 통해 백남준의 초기 예술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백남준 예술은 그가 남긴 탁월한 글들, 인터뷰들, 작품들과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에게는 낯설음과 난삽함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바탕에 깔려있는 인종주의적 우월성 때문인지 국제적으로 비중 있는 서구 이론가들, 인문학자들에 의해 진지하게 다뤄지질 않았다.

최근 뉴욕에서 발간된『20세기 현대 미술』(로잘린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 책을 보면 다른 현대예술가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백남준이 아주 취약하게 다뤄지거나 왜곡되어 있다. 레프 마노비치가 쓴『뉴 미디어의 이해』라는 책에서는 이름조차 빠져 있다.

바로 이점에 백남준아트센터가 나아갈 방향이 존재한다. 해낼 수 있느냐가 문제다. 비엔나 현대미술관은 1963년 백남준의 첫 개인전을 재연하는 전시를 개최했다. 오랜 연구의 결과물이었고 적절한 때였다. 그것은 무명 시절의 보이스가 한 말처럼 분명 '역사적 모멘트'였다. 하지만 45년이 지나 이제 그것의 의미를 알리는 작업을 시작하는 셈이다.

세상이 알아주는 것은 저절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란 백남준아트센터가 백남준의 정신에 대한 국제적인 공동 연구와 전시의 메카가 되는 것이다.

 

'뮤지엄은 문화적 기억 장치'라는 혹자의 표현대로, 이곳은 백남준에 대한 기억 장치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영철 관장의 지적대로 백남준에 대한 우리(한국 그리고 미술계)의 집단적 기억은 피상적이고 신화화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남준아트센터의 활동을 통해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갖기를 바라는 집단적 기억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백남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자리매김하고자 하는가?



백남준의 독보적인 사유 패턴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깊은 인류학적, 문명사적 사유에 바탕을 둔 신화론적 예술관을 펼쳤다. TV로 작업하면서 항상 신석기 시대를 떠올린다고 한 것이나, TV는 인류 최초의 달이라고 한 말 등을 보면 그가 테크놀로지를 단순히 진화론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다. 이는 50년대 말 구조주의 인류학의 사유 패턴과 유사하다고 보는데, 그 사상을 그토록 강렬하고 일관되게 펼쳐나간 예술가는 동서양을 통틀어 백남준이 독보적이다. 이러한 백 선생의 사유 방식과 패턴을 파고들지 못하면 백남준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백남준의 경우 전문 연구자들이 별로 없어 똑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다.

 

필자 양지연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이영철
 

"'백남준의 선물', 국제공동연구로 그의 사유를 제대로 규명해야"

흔히 떠올리는 비디오아트 작업을 넘어, 총체적이고 직관적인 백남준의 사유 패턴을 파고들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전시, 교육, 홍보만으로는 파급효과가 약할 듯하다.

얼마간 백남준 연구가 폭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일종의 운동처럼. 국제 세미나를 계속할 것이다. 인문학, 테크놀로지, 예술 분야에서 한국 전문가들도 연구를 많이 해야겠지만,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백남준의 사유와 활동을 제대로 규명해야 한다. 앞으로 있을 국제세미나의 제목은 모두 '백남준의 선물'이 될 것이다. 무엇이 백남준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가. 20세기까지 서구 주도, 부계 중심의 위계적 역사관을 훌쩍 뛰어넘어 백남준은 21세기 예술 패러다임의 어머니로서 우리 각자의 사고, 감각, 삶의 형태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예술은 나누어야 한다는 '증여로서의 예술' 개념을 몸소 실천했던 인물이다.

이곳이 백남준 연구의 중심이 되자면, 소장자료의 양과 질도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비디오 조각과 설치작품이 20여 점, 드로잉, 페인팅이 40여 점 있고. 등 교육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은 백 선생 생존 시에 다시 제작하였다. 대형 오리지널 설치 작품들은 주로 외국 미술관들에 있다. 2천 2백여 점의 비디오 영상물과 사진, 편지 등의 자료 역시 중요한데 이 분야에서는 여기서 최대 규모로 소장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온 <메모라빌리아>가 있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주요 미술관에 들어가 있어 구입하기 어렵고, 개인 소장품도 귀중한 것은 시장에 잘 나오지 않는다. 더욱이 현재 수집 예산이 너무 적어서 일 년에 1~2점 사면 고작이다. 따라서 백남준 연구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보완하는 쪽으로 신경을 쓰려고 하지만 이 또한 쉽지가 않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이제 시작이다. 이곳이 잘 되기 위해 어떠한 것이 필요한가?

무엇보다 백남준의 예술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대체불가능하다. 그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예술가들, 기획자들,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역동적으로 문화 생산을 이뤄내는 발전소, 국제적으로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해야 한다. 그걸 해내기 위해 정말 정신을 바짝 곤두세워 노력해야 한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소위 단계론과 도약론이 있지만, 내 경우 도약론자다. 삶이 짧으니까. 끊임없이 도약하며 좀 더 창조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구성해내야 한다. 개관기념 페스티벌 제목도 "Now Jump!", "지금 도약하라"였다. 변명하거나 눈치를 보지 말고 지금 도약하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창조적 도약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남이 정한 규칙의 종이 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이다"라는 백남준의 말은 참으로 용기를 준다.

이영철


"큐레이팅은 모험이자 호기심"

큐레이팅에 대한 이영철 관장의 신념이 '큐레이팅의 역할과 존재이유에 대해 명확히 하고자 한다'고 명시된 이곳의 미션에 반영되어 있는 듯 하다. 큐레이팅의 역할과 존재 이유는 확정적이기보다 동태적인 성격의 것이 아닐까 한다. 이영철 관장이 생각하는 큐레이팅은 무엇인가?

큐레이팅은 내가 알고 있는 것 50%, 모르는 것 50%에 걸고 일을 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 50%라는 것은 몰랐던 정보의 문제가 아니고,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아직까지 제대로 표현되어본 적 없는, 지각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한다. 내가 아는 50%라는 것은 전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포함한 것이다. 그래서 내게 큐레이팅은 내가 할 수 없는 것, 나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에 걸고 가는 모험이자 가보지 않은 것에 대한 지속적인 호기심이다. 그 때문에 의외의 우연이나 만남에 기대를 건다.

내 전시 안에는 골격이 잘 짜여 있지 않다. 그리고 명확한 기억에 의존해서 전시를 만들지도 않는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 많고, 그것을 좇으면서 전시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전시해놓고 나서도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전시를 언어로 잘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이 도리어 내 큐레이팅의 이점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남의 큐레이팅 방법에서 영감을 얻지 않는다. 외국 유명 큐레이터의 전시를 많이 보기는 하지만 재미가 없다. 그런 반면 훌륭한 사상가나 인문학자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로워서 그런 책을 읽으면서 영감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아티스트가 창작하는 프로세스에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예술가들의 작업방식처럼 전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좋아하는 것은 공간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큐레이터는 좋은 작가들을 잘 꿰는 직업이 아니고, 전시 공간에 들어가서 관객이 어떻게 느낄지 상상하면서 시공간의 컨테이너를 짜는 전시 디자이너다. 큐레이터는 전시디자이너가 될 수 있지만 거꾸로 전시디자이너가 큐레이터가 될 수는 없다. 내 경우는 큐레이터임과 동시에 전시디자이너, 이론적 성향이 강한 예술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이 기사는 4월 21일에 재편집되었습니다.

>이영철 관장-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학을,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제2회 광주비엔날레와 제2회 부산비엔날레 예술감독,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예술감독 등 굵직한 국제적 전시 기획 경험과 더불어 국제 큐레이터십 구축의 비전을 추구해 왔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전시를 기획한 바 있다. 2008년 이후 경기도에 설립된 백남준아트센터의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여 백남준의 재발견과 국제적 위상 강화를 위한 미션을 수립해 나가고 있다.




양지연  

필자소개
양지연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예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성미술관 연구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소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부교수로 재직중이다.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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