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택 과천한마당축제 예술감독

예술을 배신하지 말라

이승엽 _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과 교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자신의 예술관을 타인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 비굴하면 안 된다. 아부도 안 된다. 결국은 '예술'이 문제를 해결해주더라.

우리나라의 주요한 공연축제는 대부분 예술감독이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이런 예술감독 시스템이 실제 축제에 적용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공연예술 축제의 최장수 예술 감독은 누굴까? 아마도 춘천마임축제의 유진규 감독일 것이다. 20여 년 전에 마임축제를 만들고 예술감독이 된 이래 지금까지 그대로이니 그를 따를 자가 없다. 그렇지만 마임축제는 마임협의회가 스스로 만든 축제이고 지금의 예술감독 시스템과는 맥락이 다르다고 제쳐둔다면 과천한마당축제의 임수택 예술감독이 으뜸이다. 임명직 예술감독으로는 그가 최장수다. 2003년부터 시작했으니 무려 7년째다. 6월 25일 속리산에서 열린 한국공연예술축제협의회 총회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이 협의회의 첫 회장이기도 하다.)



임명직 국내 최장수 축제 예술감독

직업이 뭔가? 축제 예술감독 외에도 연출가로 대학 강사로, 번역가 등으로 워낙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당연히 과천한마당축제 예술감독이다. 연출가로서는 2년 전쯤에 공연한 <쥐사냥>이 마지막이다. 그때도 집중이 잘 안되고 어색하더라. 명색이 거리극축제의 예술감독인데 실내극을 하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극 연출을 하면 되지 않나?

글쎄다. 아직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내 역할은 젊은 사람들을 자극해서 좋은 거리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토론을 거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작년에 공연했던 우리 작품 두 개가 금년에 프랑스에 진출하게 된 것도 작은 성과다.

어떤 작품이 가나?

비주얼씨어터컴퍼니 꽃의 <자화상>과 앨리스 김의 <쉬크> 등이다. 금년도 샬롱거리극축제에는 오프프로그램으로, 모를레 거리극축제에는 공식참가작으로 참가하게 된다. 대견하고 기쁘다.

과천한마당축제에 간여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건가? 만만치 않은 축제인데...

내가 과천축제에 참여한 것이 2003년이다. 그때까지 나는 거리극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고교동창 중 한 명이 과천시장에 출마한다기에 문화예술부문의 공약에 쓰라고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나중에 보니 내 의견은 하나도 채택하지 않았더라. 그런데 그 친구가 시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과천축제의 예술감독은 박인배 씨였다. 그는 임진택, 정진수 씨에 이어 2000년부터 3년 동안 축제를 맡았는데 변화의 시기였던 것 같다. 그의 후임으로 내가 축제 예술감독을 덜컥 맡게 되었다. 무엇보다 1990년대 중반부터 과천시에 거주해온 '과천시민'이란 점이 강점이라면 강점이었다.(웃음)


"축제 만들면서 거리극의 매력에 빠졌다"

그럼 당시에는 거리극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이 크지 않았겠다.

그렇다. 당시 인터뷰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축제의 중심을 실내극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마당극이나 거리극을 보니 매력이 있더라. 점점 빠지게 되었다. 실내극의 비중을 높이려던 마음은 금방 접었다. 축제가 나를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3년 전부터는 축제 프로그램에서 실내극을 완전히 없앴다. 놀라운 변화 아닌가!
 

임수택

놀라운 변화의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사실 2003년 축제의 성공이 큰 힘이 되었다. 그 중에 개막작 <기원>의 몫이 컸다. 2003년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전쟁이 있었던 해다. 전쟁이 끝난 5일 후에 바그다드에서 무용공연이 열렸다는 외신을 보았다. 충격적이었다. 예술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 훌륭한 시도였다. 그 팀을 찾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KBS 특집 프로그램을 보고 담당 PD와 통역자까지 연결하고서야 바그다드와 선이 닿았다. 결국 전쟁 당사국인 미국(HOBT)과 이라크(마르독 극단) 그리고 한국의 예술가가 합동으로 축제의 개막공연을 꾸몄다. 공연 전에 미국의 예술가들이 이라크 예술가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미국에도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말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공연은 감동적이고 그만큼 성공적이었다. 동시대 전 지구적 핫 이슈를 한국의 인구 6만 명 소도시에서 건드린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2004년에 축제조직이 재단법인으로 전환되고 나는 정식으로 임기 3년의 예술감독에 취임했다. 금년이 두 번째 임기의 마지막 해다. 지금 우리 축제의 시민 인지도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가? 무려 93%다. 참여율도 87%에 이른다.

그만큼 잘 되고 있다는 말인가?

솔직히 요즘 좀 힘들다. 세계적으로도 거리극이 침체기인 것 같다. 눈에 확 띄는 작품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렵다. 거리극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도 예술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니 빛나는 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싶다.
 

장수 예술감독의 비결 좀 알려 달라.

원칙을 지켜야 한다. 자신의 예술관을 타인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 비굴하면 안 된다. 아부도 안 된다. 지금은 좀 안정된 편인데 나도 초기에는 정말 많이 싸웠다. 서로 잘 모를 때는 시의회에 가서도 격렬히 싸웠다. 그렇게 싸웠지만 나중에는 가장 열렬한 지원자가 된 경우도 있다. 공무원들과도 갈등이 많았는데 결국은 '예술'이 문제를 해결해 주더라. 이순신도 그랬지 않나. 죽을 각오로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나는 매년 목숨을 걸고 축제를 치른다. 다들 요즘은 투쟁의식이 약하지 않나 싶다.

과천한마당축제를 이끄는 철학은 무엇인가?

예술이다. 전에는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내세웠다. 예를 들면 기술적 완성도, 전통의 현대화, 사회적 이슈의 반영 등 구체적으로 내세웠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지키기도 힘들고 번거로웠다. '예술'이 이 모두를 포괄하는 것 같다. 축제로서의 기본적 기능인 '일탈'도 소박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다.


거리극, 놀랍게 성장했고 필요도 크다

우리나라 축제에 대해 쓴 소리를 하셨는데 전망이 그렇게 어둡나?

그 반대다. 21세기는 밀실의 세계가 강화되는 만큼 '아웃도어 라이프의 니즈'도 점점 커지는 시대다. 축제, 특히 거리극을 소재로 한 축제는 전망이 밝다. 지난번에 한국거리예술센터 창립총회를 용인에서 했는데 103명이 왔다. 2~30명 오지 않을까 했던 터라 많이 놀랐다. 문화재단이나 프로그래머들이 특히 많더라.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증거다.
 

임수택

그러고 보니 한국거리예술센터도 간여하고 있다.

그렇다. 얼마 전에 센터를 창립하면서 김석만 선생과 공동대표를 맡았다. 센터가 거리극이라는 이름 대신에 거리예술(Street Art)이라고 쓴 점을 유의 깊게 봐 달라. 야외극이라는 개념보다는 거리극으로 쓰는 것이 맞고 외연을 넓히면 거리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우리 거리극이 발전했다는 뜻인가?

그렇다. 내가 2003년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성장했다고 본다. 거리극 전문 평론가라고 하는 플로리안느 가베르라는 사람이 2004년에 우리 축제에 와서 "왜 이런 것을 하나"라고 하더라. 우리가 하는 것이 거리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모였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10년 후에 다시 와라." 우리나라는 역동적인 사회다. 그 기간은 10년이 아니라 더 짧아질 것이라고 본다.

그녀가 다시 왔는가?

아직 오직 않았다. 10년 후에 오라고 했는데 더 일찍 오고 싶다고 한다. 이제는 와도 된다고 본다. 내가 후배들에게 그런 말을 한다. 어렵게 지원금 받아 실내 공연을 하면서 오지 않는 관객을 기다리는 일은 그만해라. 지자체와 축제가 다 사준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주로 거리극을 만드는 단체만 20여 개가 된다. 나는 거리극이 '되는 장사'라고 본다. 내가 물건 하나는 잘 잡은 셈이다. 나는 운이 참 좋다.




원칙을 지키고 신뢰를 쌓아라

직설화법과 래디컬한 입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곤란한 점은 없었나?

필자 이승엽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임수택
많이들 불편해 한다. 그래서 무섭다거나 싫다는 사람이 많다. 그래도 나는 어느 자리에 가서도 솔직하게 말한다. 래디컬하다는 것이, 예를 들어 관광축제에 대한 입장 같은 것이다. 관광축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관광을 목적으로 한 축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축제를 경제 효과니 산업적 효과니 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 이러니 기자라도 만날 때면 우리 홍보 스태프들이 안절부절 못한다. 긴장되고 등에서 땀이 난다고 한다. 나보고는 조심해달라고 한다. 바깥사람들은 우리 스태프 보고 "고생 참 많겠다"고 한다더라. 그런데 안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 믿거나 말거나.

축제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

나는 경영을 잘 모르고 또 잘 안한다. 그렇지만 룰은 지킨다. 룰이 틀리면 고치면서 가면 된다. 내가 중시하는 것은 신뢰다. 공연할 때 계약서도 읽지 말고 그냥 사인하라고 윽박지른다.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나는 배신한 적이 없다. 믿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믿지 못하면 얼마나 힘들고 소모적인가.

축제 부문에서 일하려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전에 EMI 사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비슷한 질문이 나오더라. 그의 답은 간단했다. "음악을 배신하지 말라". 같은 얘기를 해주고 싶다. "예술을 배신하지 말라". 정도를 걷고 두려워하지 말 일이다. 실패는 수도 없이 반복된다.

더 하고 싶은 말씀 없나?

있다. 나는 내가 훌륭한 예술감독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어디 가서 자랑한 적도 없다. 작년에 우리 축제가 경기도 최우수축제로 선정되었을 때 축하 전화도 많이 받고 했는데 정작 우리 축제 사무국은 조용했다.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태프들이 축제에 갖는 자부심이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훌륭한 축제가 얼마나 많은가. 벨기에의 쿤스텐 축제의 예술 감독의 예가 생각난다. 그녀는 작품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본다. 한마디로 도사다. 위험도 많고 불안하긴 하다. 사실 나도 요즘 그러고 있다.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되면 절대 초청하지 않는다.

축제도 그렇고 거리극도 그렇고 정착단계가 아니라 한참 성장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할 일이 많다. 포맷부터 모두 고민의 대상이다. 개막식 같은 것은 사실상 내가 총감독의 역할을 맡는데 매번 힘든 고비를 넘겨야 한다. 그렇게 항상 힘들게 일하지만 그만큼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침잠하고 공부할 필요를 느낀다.
(사진촬영 - 김은화, 하유나)

 

임수택 예술감독은? 1956년생.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학구파다. 1994년 <연극쟁이>로 연출가로 데뷔했고 극단 알과핵 대표, 알과핵 소극장 극장장 등을 지낸기도 했다. 한국외대 겸임교수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고 있다. 과천한마당축제는? 1997년 '세계마당극큰잔치' 97 경기-과천'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거리극축제다. 이후 과천마당극제라는 이름을 거쳐 2003년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축제를 열고 있다.




이승엽  

필자소개
이승엽은 1987년부터 예술의전당에서 극장운영과 공연제작 일을 하다가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덧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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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루
  • 2009-07-03 오전 10:32:00
질문에 '간여'라고 있는데 '관여' 같아요. 오타 신고요^^[Del]
  • 의견
  • 2009-07-03 오후 12:26:11
오타라기보다 의미상 '관여'가 적절한 듯 합니다. 사전에 '간여(干與)'는 '간예(干預)'와 같은 뜻의 말로, '관계하여 참견함'의 뜻이고, '관여(關與)'는 '어떤 일에 관계하여 참여함'의 뜻이라고 나왔네요. 감독님은 '참견'이 아닌 '참여'하신 것이니.. ^^[Del]
  • 김승수
  • 2009-07-05 오전 10:36:01
잘 읽었습니다.임대표의 뚝심이 성공예술로 성장시킨 중요요소라고 봅니다.[Del]
  • 음음
  • 2009-07-06 오후 1:18:21
이런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지만 귀여우십니다.[Del]
  • 독자
  • 2009-07-06 오후 1:19:34
두 분의 아직도 소년같은 눈빛이 참 인상적이네요.[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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