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토리텔링마케팅-세라자데의 시대가 왔다 ④

'스토리'로 재래시장을 살린다

정영선 _ (주)브랜드스토리 기획이사

연재순서: ④ '스토리'로 재래시장을 살린다
'단골'이라는 단어는 참 재미있다. 손님과 상인이 함께 쓰니 말이다. 사실 이 '단골'이라는 단어는 '무당'을 의미하는 '당골'에서 왔다. 당골과 손님을 끈끈하게 이어준 것은 '이야기'였다.

전통시장은 모든 정부의 화두였다. 그곳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도, 그 물건을 사는 소비자도 모두 한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서민들이기 때문이다.

참조 이미지 - 시장 풍경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시설현대화사업이었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처럼 청결하고 위생적인 환경을 갖추기 위해 아케이드를 씌우고 주차장을 만들었다. 다음으로 진행된 것이 아티스트 레지던시(Artist Residency)이다. 전통시장의 빈 점포에 예술가들을 입주시켜 창작활동을 하게 한 것이다. 이 사업은 처음부터 시장의 매출 증대보다는 시장을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문화를 통해 전통시장의 매출을 올릴 수는 없을까?' 이것이 2008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문전성시 프로젝트(화를 활용한 통시장 활범사업)'의 목표다. 기존의 시장 시설 현대화 작업이 우리 재래시장의 건축, 환경 같은 기능적 측면을 보완하고 강화했다면 문전성시 프로젝트는 그 초석 위에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얹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내발성과 지속성 -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원칙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위해 2008년 4월, 건축ㆍ문화기획ㆍ공공디자인ㆍ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컨설팅단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각 지자체로부터 추천받은 전통시장들을 현장 답사한 끝에 수원 못골시장을 시범사업 대상시장으로 결정했다.

점포수가 90개 남짓 되는 작은 시장이 선정된 이유는 이곳이 전통시장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시장들이 비디오 대여점이나 슈퍼마켓 등이 뒤섞여 있는 데 반해, 못골시장은 점포 대부분이 식자재를 취급하고 있다. 게다가 고만고만한 크기의 점포들이 줄줄이 어깨동무를 하고 골목형태로 늘어선 모습이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아기자기하다.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문화 프로젝트의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전문가가 나간 후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따라서 상인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쉽고 대중적인 프로그램, 즉 내발성과 지속성이 보장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들이 궁극적으로는 매출을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전통시장은 대형마트나 백화점과 정면승부를 할 것이 아니라 전통시장만의 매력을 발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단골, 당골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거대한 자판기 같다. 깔끔하고 친절하지만 정이 없다. 반면 전통시장에는 사람이 있다. 좀 투박하고 불친절해도 단골손님에게는 다르다. 상대방 가족의 안부를 서로 묻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눈물짓는다. 그러므로 전통시장이 살 길은 하나다. '단골장사'를 하는 것이다.

원래 '단골'은 '당골'이라는 말에서 왔다. '당골'은 '무당'을 부르는 말이다. 좁고 엄격한 지역사회에 살던 옛사람들은 고민이 있어도 소문이 날까봐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풀어 준 것이 동네 무당이었다. 딱히 신통력을 부리지 않고 그저 고민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무당은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고 친근한 존재였다.

단골이라는 말 속에는 '남한테 차마 하기 부끄러운 이야기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속편한 사이' 혹은 '밑천 다 까고 이야기하는 사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무당과 손님을 끈끈하게 이어 준 것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혈육보다 더 친근감을 느꼈고, 평생 친구가 되기도 했다. 전통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먼저 상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고객들로 하여금 그 상인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 상인과 고객이 서로 흉허물 없이 속마음 터놓고 지내는 진짜 단골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제공 매거진 '가는 날이 장날']



이야기가 있는 시장

'이야기가 있는 시장'을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90개 점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상인들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향, 어린 시절, 첫사랑, 실패담, 가슴 아픈 기억, 꿈... 상인들은 이 예민한 주제들 앞에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굳이 아픈 과거를 왜 들추느냐며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넉 달 간 시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열었다. 같이 장사를 하고, 비가 오면 같이 물건을 운반하고, 밤에는 함께 술을 마셨다. 어느 새 상인들은 속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때로는 작가와 상인이 함께 끌어안고 울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배꼽이 빠지게 웃기도 했다.

보석 같은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한자리에서 20년간 잡곡노점을 해서 아들을 챔피언으로 키운 어머니도 있었고, 손수레를 끌고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며 신발을 팔아 아들을 파일럿으로 만든 아버지도 있었고, 암과 싸우는 어머니를 지키며 채소를 파는 효자형제도 있었다.

이렇게 취재한 이야기들은 전문작가들의 손을 거쳐 『우리는 못골시장 라디오스타』라는 제목의 스토리북으로 발간되었다. 처음에는 취재를 거부하고 쑥스러워하던 상인들은 막상 책이 나오자 몹시 감격했다.

<우리는 못골시장 라디오 스타> 표지
그중 나를 가장 울린 사람은 못골시장 최고참 상인인 이규덕 할머니였다. 상인 각자에게 원고를 읽힌 후 내용에 문제가 없으면 서명을 하게 했는데 이규덕 할머니는 글자를 몰라 당신의 이름자 옆에 동그라미를 그림으로써 서명을 대신했다.

나중에 책자를 받아든 할머니는 "나는 글을 몰라서 이걸 못 읽지만, 글도 못 읽는 내 인생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다니 너무 신기해. 내가 너무 대단한 사람 같아. 고마워, 고마워."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이렇게 발굴된 이야기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각 상점과 상인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매대와 간판을 디자인할 수도 있다. 챔피언 아들을 키운 어머니의 노점에 아들의 글러브가 걸린다면 그것 이상 가는 간판이 있을까? 아들을 파일럿으로 만든 아버지의 가게에 장난감 비행기 날개가 달린 신발을 걸어놓는다면 얼마나 의미 있을까? 이렇게 독특한 간판을 보면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상인에게 말을 붙이게 된다.

"아줌마, 왜 노점에 권투장갑이 걸려 있어요?"
"아저씨, 이 신발에는 왜 비행기 날개가 달려 있나요?"

그러면 상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손님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온 상인의 이야기에 감동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단골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로 단골 만들기'다.

뿐만 아니라 못골시장에는 상인들이 직접 DJ가 되어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국도 생겼다. DJ들은 상인들과 손님들로부터 엽서를 받아 음악을 틀어 주기도 하고, 상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초대 손님으로 앉혀놓고 그 상인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이것은 초기 문전성시 프로젝트가 정해 놓은 대원칙 2가지를 충족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인들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내발성이 충족된 것이다. 또한 프로그램이 쉬워서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상인들이 독자적으로 프로그램을 끌어 나갈 수 있다. 지속성 또한 충족된 것이다.


자기 긍정에서 비롯되는 진심이 담긴 서비스

전통시장은 싸움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못골시장의 경우 상인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어 싸움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가장 큰 성과는 상인들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문작가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온 이야기 속에서 상인은 모두 고난에 맞선 용감한 주인공이었다. 이러한 자부심은 자연스럽게 '친절'로 발현되었다. 자신에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친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을 긍정하고 자부심을 가진 상인들이 짓는 미소는 그 어떤 도우미의 미소보다 아름답고, 투박하나마 진심이 담긴 서비스는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뛰어난 공공미술도, 새로운 마케팅도, 세련된 서비스도 결국은 '사람의 진심'보다는 힘이 약한 법이다.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결론은 단순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오로지 사람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정영선  

필자소개
정영선은 ';살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세라자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스토리텔러. 어릴 때는 구연동화로, 커서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작가로서 이야기 장사를 해 왔다. 현재 Storytelling Agency (주)브랜드스토리에서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한 기업과 도시브랜드, 관광상품 개발 및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


 

 

덧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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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골만들기
  • 2009-07-28 오전 11:41:52
연재 글을 읽으며... 이야기 속에 결국 사람이 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전성시'프로젝트는 '시장'이 아닌 '시장에서 만나지는 사람들'을 생각했던 프로젝트 인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일. 그것이 예술활동의 참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Del]
  • 정영선
  • 2009-07-29 오후 2:55:36
단골만들기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 예술활동의 참된 의미...라는 말씀에 '맞아 맞아'를 연발했습니다. 중국 문인 백거이는 시를 쓰면 장터에 나가 할머니들에게 시를 읽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가 이해하면 자기도 만족했고, 그 할머니가 이해 못하겠다고 하면 다시 썼다고 하지요. 물론 다르게 생각하시는 예술가분들도 많으시고, 그분들 지론 역시 옳다고 봅니다. 정답을 낼 수 있는 게 이 세상에 몇 가지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단골만들기님 말씀에 공감하게 되네요.^^[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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