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리소설읽는밤① 탐정-하드보일드

끈끈한 담뱃진처럼 씁쓸하게 배어나오는

김봉석 _ 대중문화 평론가, 컬처매거진 [BRUT] 편집장

① 탐정-하드보일드: 구체적인 사실과 증거를 근거로 판단하여 가려진 진실을 찾아낸다, 동기를 찾아내고 정황을 추리하여 필연적인 결과를 끌어낸다. 이게 바로 추리소설의 기본법칙이다. 그리고 인간의 격정적인 감정과 치밀한 두뇌게임이 버무려지는 각종 범죄에는, 반드시 세상사의 일면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어린 시절에 추리 소설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예전에는 누구나 홈즈와 루팡에서 시작했다. 사람의 외면을 보는 것만으로 과거 이력을 줄줄 맞춰내는 명탐정 홈즈와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부자들의 물건을 훔쳐내는 의적 루팡은 어린 시절의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 중에서도 셜록 홈즈는 우리가 흔히 '추리소설'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등장하는 명탐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10대가 좋아하는 『소년탐정 김전일』『명탐정 코난』 등의 '명탐정'과 조금 거리가 있지만, 사소한 증거에서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사건의 전후관계를 재구성하는 논리력 그리고 때로 악당과 대결할 때 필요한 전투력까지 셜록 홈즈는 탐정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면을 꿰뚫는 통찰력, 사건을 재구성하는 논리력

디어스토커 모자와 돋보기(혹은 파이프)가 셜록홈즈의 상징이다. 「Mysteries of Sherlock Holmes」다만 어린 시절에 본 홈즈는 아동용으로 각색된 경우가 많았기에 그 시절에는 전모를 알 수 없었다. 흥미로운 사건을 만났을 때의 홈즈는 지나칠 정도로 쾌활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자기도취형 탐정이다. 그러면서도 냉소적이고 '수사'에 필요한 지식 이외의 즐거움이나 인간관계 등을 거부하는 홈즈는 차갑고 변덕스러운 인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마약 중독자이기도 하고. 하드보일드가 등장하면서 필립 말로우처럼 염세적인 탐정들이 흔해졌지만, 추리소설의 여명기에 등장한 홈즈 역시 이토록 '비정한' 탐정이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온갖 끔찍하고 잔혹한 범죄를 접하는 사람이, 늘 쾌활하고 명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완역본으로 나온 셜록 홈즈 전집을 읽어보면, 분명히 아동용 미스터리물은 아니다. 아내의 부탁으로 행동거지가 의심스러운 남편을 뒤쫓아보니 그는 거지로 변장해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구걸로 얻는 수입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는, 직장을 그만 둔 것이다. 성실한 직장인보다 거지의 수입이 많다는 것은,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거대한 문제의 일부이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는 근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모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원래 범죄라는 것은, 그런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그런 걸 일일이 이해할 리는 만무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추리는 일종의 게임이고, 그 게임의 방식을 읽는 것뿐이니까.

영국의 TV시리즈로 만들어진 미스 마플의 모습 <Marple: The Classic Mysteries Collection>구체적인 사실과 증거를 근거로 판단하여 가려진 진실을 찾아낸다, 동기를 찾아내고 정황을 추리하여 필연적인 결과를 끌어낸다. 이게 바로 추리소설의 기본법칙이다. 추리소설은 논리적인 사유로 움직이는 장르다. 추리 소설을 많이 읽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구성 원리나 인간들 간의 관계도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를 보면, 아무리 작은 범죄라도 세상의 어떤 논리나 법칙을 드러낸다. 작은 마을에서 단 한 번도 대도시에 나가보지 않은 미스 마플이지만, 그녀는 세상의 모든 법칙과 사람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헤아리고 있다. 인간의 격정적인 감정과 치밀한 두뇌게임이 버무려지는 각종 범죄에는, 반드시 세상사의 일면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드리운 전후 절망과 불안의 그림자

어린 시절, 서양의 추리소설은 물론 SF까지 수록되어 있던 동서추리문고를 하나 둘 읽어 나가다가, '하드보일드'라는 말을 발견했다. 더쉴 해미트의 『피의 수확』,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미키 스필레인의 『심판은 내가 한다』 등의 하드보일드 소설은 이미 보았던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과는 조금 달랐다. 여전히 사건은 얽혀 있지만, 밀실이나 외딴 곳에서 범인의 트릭을 깨기 위해 고민하는 탐정이 아니다. 필립 말로우나 마이크 해머 같은 하드보일드의 탐정들은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범인을 추적하고 사회비리의 현장 속으로 파고든다.

하드보일드한 이미지로 디자인된 레이머드 챈들러 소설집의 표지세계와 인간에 대해 절망하고, 믿을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총뿐이라는 사내들의 고독한 싸움을 그린 하드보일드가 영화로 옮겨진 것이 '필름 누아르'라고 할 수 있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중절모를 쓰고 쓸쓸하게 걸어가는 탐정의 뒷모습. 그들은 하나의 범죄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사회의 거대한 음모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든 세계 대전의 여파는 추리 소설에게도 절망과 불안 그리고 염세주의를 안겨준 것이다. 하드보일드와 그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사회파 추리는 사건 자체의 교묘한 트릭보다는 정부와 재벌, 지역사회의 부패와 학정을 드러내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하드보일드의 재미는 폭력과 사건의 내막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하드보일드의 진짜 재미는 '암울함'을 드러내는 끈끈한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의미심장한 대사와 심리라고도 할 수 있다. 쉴 새 없이 술을 마시는 필립 말로우의 내면이 담뱃진처럼 씁쓸하게 배어나오는 하드보일드의 매력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 나왔던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의 뒤표지에는 '거칠고 감각적이고 대단히 매끄러운 것과 뒷골목의 시로 이루어진 특유의 혼합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문장이 조잡하기는 하지만, 그 의미만은 하드보일드가 진정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다. 감각적이면서 거칠고, 시적이면서 폭력적인 세계가 바로 하드보일드의 세계다.


널부러진 죽음 ... 삶의 의미가 새로워지다

원래 '하드보일드'는 헤밍웨이의 건조하고 날선 문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 차츰 냉정하고, 음울한 밑바닥 세계를 다룬 추리소설의 통칭이 되었다. 하드보일드 중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 같은 걸작은,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 문학으로 인정받았다. 단순하게 말초적 쾌감만을 위해서 즐기는 소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탐구와 세계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우수한 소설로서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순수 문학에서도 추리적인 기법을 이용한 소설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랬고, 요즘 인기 있는 작가인 폴 오스터나 무라카미 하루키도 추리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어떤 범죄의 근원을 파헤치거나, 수수께끼와 의문을 풀어가는 방법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좋은 방법이다. 독자가 호기심을 느껴 읽다보면, 뭔가 생각을 하고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되니까.

「장미의 이름」「1Q84」「기록실로의 여행」- 본격 추리소설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추리적 서사구조를 채택한 소설들


과거에는 하드보일드가 하나의 경향이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서 굳이 하드보일드라는 말을 쓰지도 않는다.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 에코』 『시인』, 제임스 엘로이의『블랙 달리아』 『LA 컨피덴셜』, 데니스 루헤인의 『비를 내리는 기도』『살인자들의 섬』 등을 보면 한결 같이 어둡고, 폭력적이다. 화사하고 유머러스하게 사건을 풀어가는 코지 미스터리라는 장르도 있긴 하지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폭행을 하는 장면이 수시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물이 밝고 경쾌하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세계의 어둠과 폭력성을 직시하는 문학. 그것이 바로 하드보일드, 현대의 범죄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어둡고 잔혹한 범죄 소설을 좋아한다. 묘하게도 죽음이 마구 널부러져 있는 범죄소설을 보고 나면, 되려 '살아 있음'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김봉석  

필자소개
김봉석은 [씨네21] [한겨레]에서 기자로 재직했으며 현재 대중문화 평론가이자 컬처매거진 [BRUT]의 편집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전방위 글쓰기』등의 책을 썼고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등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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