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도 막장, 막장 거리기에, 들을 때마다 막장에 밥이라도 비벼먹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막장 때문에 세상이 망할 지경이라고 해대는 바람에, 나는 무슨 거대한 막장이 지구 전체를 뒤덮어 인류가 당장 질식사라도 하는 줄 알았다. 도대체 왜 미디어는 막장 드라마를 '전쟁, 마마, 호환 보다 무섭다는 불법 비디오'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더한, 전 국민의 의식세계를 파탄시킬 바이러스쯤으로 규정하고 배격하고 있을까?(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참고로, 나는 소심하다.) 언론이 그간 팽배해왔던 막장식 서사전개를 잠시 잊었거나, 제대로 읽거나 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TV 드라마만 봐왔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막장이 좋다?

사실 막장 드라마라는 게 TV 드라마에 한정 지었을 때 등장한 말이고, 드라마는 결국 이야기라고 생각해본다면, 이때껏 우리는 막장 드라마를 즐겨왔다. 아니, 이게 무슨 '우린 모두 알타이어족이므로 알고 보니 형제, 자매'란 소리냐고? 당신이 소설을 읽었건 읽지 않았건 최근에 반응을 얻었던 소설은 막장식 전개에 기대어 왔다.

우선,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 현존하는 작가 중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보자. 주인공은 어머니와 누나를 차례대로 범하고, 아버지를 살해한다. 심지어 태연하게 고양이와 대화를 하기도 하고, 하늘에서는 고등어가 소나기처럼 떨어진다. 이게 무슨 귀신이 씨나락 까먹다가 장염 걸리는 소리냐고? 그렇다. 막장이다. 이 소설이 바로 권위 있는 예루살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의아한가? 세상은 이미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오타쿠들이 넘쳐나는 일본의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시대정신을 논하고 민주사회를 외쳤던 우리의 문학을 살펴보자. 최근 10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 천명관의 『고래』는 그야말로 (미안하지만) '더 막장 오브 막장'이다. 소설은 초반부터 뜬금없이 한 바보를 등장시키는데, 사실 그 바보는 남근이 몹시 거대하다는 것 외에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말없이 그것만 크다는 말이다. 정확한 크기나 길이는(이거 왠지 쑥스럽군) 묘사되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건장한 성인 남자의 팔뚝 정도는 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여주인공이 아이를 낳았는데,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소식마저 끊겨버린 남자다. 이 무슨 동정녀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하는 소리냐고? 그뿐이 아니다. 게다가 이 여주인공은 남근이 달려 있어, 어느 날 홀연히 남자가 된다는 식이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면, 박민규의 소설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그의 소설이 절정에서 심심치 않게 안드로메다로 간다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더 이상 당혹스럽지도 않다. 서사가 너무 정직하게 전개되면 아예 불안해지기까지 할 지경이다. "거, 작가 양반 당신이 숟가락 놓고 있는 동네 이야기로 일반화시키는 거 아니오!"라고 하신다면, 내 손을 잡고 같이 컴컴한 극장으로 가보자.

우린 지금 공포영화 상영관에 도착해 있다. 이제 주인공인 여대생은 막 샤워를 하려고 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로 더워서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영화가 지루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공포영화 여주인공의 필연적 운명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간에 주인공만 모를 뿐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곧 분노에 가득 찬 살인마가 엉덩이를 훤하게 드러낸 여대생을 기숙사 복도에서 벌거벗고 뛰게 만들 거란 사실을. 도대체 샤워하는 여대생의 엉덩이와 분노에 젖은 살인마의 등장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마치 아침이면 해가 뜨고 가을이면 낙엽이 떨어지는 자연의 이치와 같이 당연히 자리 잡았다. 즉, 우리는 애초부터 논리나 개연성 따위를 이야기에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동서고금 막론하고

거, 그렇고 그런 B급 성인공포영화 이야기로 논점을 흐린다고 그러시는 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어린 시절에 꿈과 희망을 키우며 읽었던 동화 몇 편을 상기해보자. 새어머니가 딸을 팔아먹고, 살인교사를 하고, 독살을 하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 이게 『백설공주』다. 게다가 독사과를 먹고 거의 죽다시피 한 백설은 왕자의 키스로 깨어난다. 어릴 때부터 성적흥분이야말로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에로티시즘의 힘을 보여주는 막장 중의 막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신데렐라와 콩쥐팥쥐와 당나라의 『유양잡조』에 나오는 '예쉔' 이야기는 어떤가. 모두 딸을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계모와 새언니의 음모와 협잡, 질투의 대서사시다. 가장 오래된 '예쉔' 이야기가 9세기 때부터 내려왔고, 신데렐라는 프랑스의 이야기니 종합하자면, 우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막장 동화를 통해 권선징악을 배우고, 꿈과 희망을 키워왔다. 그게 아니라고 발악하는 것은 이미 당신 속에 막장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감히 그렇게 하진 못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소심하다).

B급 공포영화와 동화는 그렇다 치자. 그럼, 신화는 어떤가. 오이디푸스는 어머니를 사랑한 나머지 아버지를 살해했고, 이에 뒤질세라 엘렉트라는 아버지에 대한 집념으로 어머니를 살해한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야 막장이라고 난리를 쳐봐야 사실 별스러울 게 없다. 우리는 기승전결의 형태가 갖춰진 이야기가 탄생한 순간부터, 막장식 서사를 생산해왔고, 소비해왔고, 열광해왔고, 향유해왔다. 그러니 사실 막장 드라마가 등장했다는 말은 달리 말하자면, 이제야 전통적 서사방식을 가진 드라마가 재현됐다는 말이기도 하다.(응? 그렇다고 치자.) 이제 와서, 온 가족이 저녁 무렵에 평상에 둘러 앉아 수박을 먹다가 삶의 행복을 느낀다는 식의 서사가 정통드라마라고 하는 것은 실생활과는 300억 광년 동떨어진, 빈 병 열심히 모아 재벌 되자는 소리처럼 들린다.(사실 일부일처제란 개념도 근대사회에 와서 생겨난 것 아닌가. 그에 비하면 막장 드라마는 거의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구조다.)

오이디푸스와 엘렉트라의 이름을 붙인 콤플렉스까지 등장한 마당에, 이게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는 말은 하지 말자. 막장이야말로, 인류가 이때껏 웃고, 눈물 흘리고, 박수치고, 기다려왔던 이야기였다. 이제야 제 궤도를 찾은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야말로 현실을 잊고, 도피하고,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꿈꾸게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분한 현실과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