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F1] 이주노동자 중심 예술프로젝트 ‘믹스라이스’

쌀과 말의 섞임, 지속 가능한 삶의 미술

강수미 _ 미학

어느 허름한 공장처럼 보이는 곳에서 아시아계 남성 두 사람이 앉아 노래를 시작한다.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악기는 값싼 기타 한 대와 드럼 대용의 플라스틱 통, 그들의 발치에 서 있는 일종의 악보대는 맥주병을 담는 플라스틱 상자이다. 이렇게 공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조촐한 상태에서 두 사람이 부르는 곡은, 연주 소도구만큼이나 '어설픈' 가사와 음률로 이뤄진 <섞인 말들(Mixlanguages)>이라는 노래이다. '섞인 말'? 말이 섞였다는 뜻인가? 누구의 말이, 어떻게 섞인다는 것인가? 이 알 듯 모를 듯한 제목의 노래는 앞으로 우리가 이 글에서 논하려는 '믹스라이스'(Mixrice, www.mixrice.org)'라는 예술가 그룹이 지향하는 바의 활동 범위를 매우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그 정체를 모르는 이 그룹의 예술 프로젝트에 다가서고자 한다면, 반드시는 아니지만 <섞인 말들>부터 들어보는 것이 좋다. 조금 긺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 가사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안녕하세요. 사장. 팀장. 공장장. 이거 하고. 이거 끝나고. 저거 하고. 두 개 끝나면 저거 해. 설렁설렁 하지 마. 불량 만들지 마세요. 다 했어요? 일 다 했어? 아이고. 이리 와. 야 이 새끼야. 이거 틀렸어. 몇 개 불량이었어요? 이거 비싸. 이거 사 가지고 가. 진짜 외국 사람이 맞나? 눈이 이쁘다. 잘 생겼다. 피가 섞인다. 네팔 사람 맞나요? 아이 시끄러워. 니네 나라 이런 거 있어? 인도네시아에 달 있어? 네팔에 해 있어? 니네 나라는 숟가락 없냐? 한국에 얼마 동안 있었어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대강의 의미가 잡히는 가사들이 아닌가. 시적이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은, 반말조의 명령어와 비속어와 비아냥거리는 말들의 연속 속에서 어떤 현실의 미화되지 않은 익숙한 풍경이 펼쳐지지 않는가. 내용도 뒤죽박죽 섞여 있고, 문맥도 뚝뚝 끊기지만, 위 가사는 듣는 이로 하여금 한국의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그밖에 다른 사람들(가장 포괄적으로는 한국인 다수, 가장 구체적으로는 한국인 고용주)의 관계 및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매우 분명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믹스라이스의 비디오 중 하나인 <섞인 말들>이 일깨우는 것은, 다름 아닌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 및 한국 사회의 다문화화'이다.요컨대 '잘사는 나라' 한국의 자국민과 이곳에 돈 벌러 온 '못사는 나라'의 피부색 다르고 말도 다른 외국인. 말하자면 이 노래에는 이렇게 두 주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제3세계 출신 외국인노동자(유럽이나 영미권에서 온 백인이 아니라)와 한국어가 모국어인 고용주/동료/이웃들 사이의 대화, 갈등, 심리가 가사를 통해 알알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나아가 별스럽지 않은 말인 것 같지만, 사실 불편한 표현들, 낯을 붉힐만한 질문들, 한껏 교만스러운 언어들이 경쾌한 타악기 리듬에 실려 현재까지 한국사회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큰 문제 중 하나를 환기시킨다.

여기 믹스라이스의 비디오 중 하나인 <섞인 말들>이 일깨우는 것은, 다름 아닌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 및 한국사회의 다문화화'이다. 이 문제를 "예술문화 활동의 새로운 모델을 연구하고 제시하기 위해" 지난 2001년 경기도 부천에서 결성된 프로젝트 팀 믹스라이스는 예술행위를 통해 풀어보려 한다. 위 노래는 그 활동과정에서 나온 작품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겪은 한국을 거울처럼 비추며 이 사회에 대해 말한다.

외국인 (불법)노동자가 한국에서 겪는 각종 차별이나 물리적·심리적 폭력, 열악한 삶을 '휴머니즘에 입각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시선'으로 대리 중계하는 한국의 숱한 매스미디어와는 달리 말이다. 직접 자신의 시각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허울만 좋은 도덕적 비판이 아니라 유머러스하지만 명쾌한 비판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피억압자들이 '중심'이 되어 펼치는 사회적 활동에 도움을 주고 그들과 협업하며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믹스라이스가 설정한 예술 활동의 범위라면, 그 과정의 직접성, 자발성, 즉흥성, 유머는 믹스라이스가 지향하는 예술 프로젝트의 핵심 성격이다.




먹을거리와 문화의 융화

 

영어 표기를 보면서 유추해보자면, '믹스라이스'는 동아시아지역의 주식인 '쌀'이 대표하는 '먹을거리의 섞임(mix-rice)'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우리가 논한 <섞인 말들>은 '언어의 섞임(mix-language)'이다. 언어란 문명화된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의사소통하는 매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언어의 섞임은 곧 문화의 섞임이다. 그렇다면 믹스라이스가 표방하는 먹을거리와 문화의 섞임은, 점차 한국 사회에서도 주요한 화두이자 반드시 풀어야할 의제가 돼 가고 있는 '다(多)문화의 사회적 융화 가능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여행 자유화 이후, 한국은 제도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원에서 급속히 개방됐다. 그리고 이후 이어진 국내 산업 경제의 호황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 이곳의 전체 지형은 놀라울 정도로 복합화 됐다. 사람들의 들어옴과 나감이 자유로워지면서 지리적· 문화적 경계가 유연해졌고,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삶의 물질적 환경 또한 고도로 세련돼졌다. 그러나 유연해진 경계 위에, 세련된 환경 속에, 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간 노출되지 않았거나 문제가 안 된 긴 그림자가 그 빛의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를테면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그런 멘털리티에 기반을 두고 이방인, 특히 약자로서의 이방인에게 행사하는 각종 차별과 폭력이 그렇게 노출된 부정적 그림자이다.

예컨대 베트남 등지에서 '수입'한 신부들을 생각해보고, 이 사람들을 여기 제도가, 여기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보라. 또 한국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는 와중에 내국인이 기피한 3D 산업 영역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구체적으로는 믹스라이스가 자기 목소리를 찾아주고자 하는 인도네시아, 네팔, 미얀마 출신 노동자들을 생각해보고, 이들에게 한국 정부를 비롯하여 지나가는 시민까지 노골화하는 불평등한 대우, 반감, 무시를 생각해보라.

이러한 예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사실 '순혈(純血)'에 기반을 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는 여러 지점과 차원에 뿌리 깊게 작동한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적으로 사회는 다문화하고 있고, 현실 상황이 그런 만큼, 한국 사회 전체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에 공정하고 유연하며 겸손한 태도로 다가서고 교차·융화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순한 통계 지표로 환원되는 '말뿐인 다문화사회'가 아니라 몸을 맞대고 정신을 나누는 '가장 구체적이고 내밀한 다문화사회'이기 때문이다. 믹스라이스가 먹을거리의 섞임과 문화의 섞임을 노래하는 것은 이 후자의 다문화사회를 기초부터 다지자는 의미가 크다.

믹스라이스는 한국 출신의, 여기서 나고 자라고 전문미술 교육을 받은 소위 '토종' 한국 미술가들로 이뤄진 팀이다. 그런 만큼 이들의 미술에 배타적인 의미의 '한국적인 것'과 '예술가로서의 자의식내지는 자기표현'이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텐데도, 이들의 미술작품, 활동에서는 그런 면모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정확히 말해서 믹스라이스 미술에서는 우리가 흔히 그림 소재나 기질을 빗대 말하는 '한국적인 것'을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바로 직전에 내가 살폈던 것과 같은 '한국적인 특수한 현실들'과 마주칠 뿐이다. 또 그들의 미술에서 표현의 주체는 미술가로서의 믹스라이스가 아니라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와서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표현할 수 없었던 주변부 세계의 외국인들이다.

위쪽부터-믹스라이스 채널과 천막극장(좌) 이주리어카(우), 에베레스트 FC믹스라이스는 이러한 '현실 비판적 미술', 또 '마이너리티 발화자의 옆에 서는 미술'을 애초 프로젝트 기획 당시부터 '목적 또는 규약'으로 설정해놓았고, 의식적으로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가 이주노동자들의 실재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도에서, 그러나 모순되게도 결국 동정적 시선 앞에 대상화시키는 난점을 피하기 위해 믹스라이스는 '믹스라이스 비디오 다이어리'라는 개념을 정하고, 외국인 노동자 스스로가 구성하고, 찍고, 말하고, 상영하는 비디오 아트를 한다. 또 그들이 서로의 경험담과 고민을 나누고 해결하는 자리를 마련하거나('믹스라이스 채널과 천막극장'), 그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거나('이주리어카'), 그들과 함께 문자 그대로 뒤얽혀 노는 '운동'을 하는데('에베레스트 FC'), 이 소소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행위들이 모두 믹스라이스가 이제까지 제시한 "예술문화 활동의 새로운 모델"이다. 또는 '비(제도)미술적인 미술'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가장 일차적으로 믹스라이스의 예술 프로젝트는 한국의 미술가와 이주노동자들의 섞임이다. 그리고 이 섞임을 통해 특정한 누구의 패권적 문법과 말이 아니라, 처지가 다른 주체들이 서로 융화하고 공유하는 경험의 내용을 한국사회에, 나아가 지구촌 모두에 확산시키는 문화-예술 실천이다.




운세과자와 믹스라이스의 힘

 

흥미롭게도 믹스라이스는 최근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을 기념하면서, '운세과자'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새해가 되면 한국인들은 더러 점을 보러 가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인터넷을 통해 올해 토정비결이라도 본다. 중국인들은 리본모양의 운세과자를 깨뜨리고 일본인들은 복주머니를 열어본다. 이런 모습들은 공동체 내에서 관례적으로 형성된 풍습의 단면이고, 그 공동체의 개인들이 심리적으로 의지하는 든든한 바위 같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미신이라든가 뒤떨어진 문화의 흔적 같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또 어느 쪽이 다른 한 쪽보다 더 우월하다든가 진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문화들의 방식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고 문화적 일방주의나 식민주의를 내세울 수 없다.

흥미롭게도 믹스라이스는 최근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을 기념하면서, '운세과자'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요컨대 이주노동자들의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현 한국(나아가 국제적) 상황에 대한 비판을 배면에 까는 부드러운 방식으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운세과자와 상관하여 각자의 다양한 메시지(사진, 기원 등)를 보내달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팀은 위에 내가 쓴 것 같은 맥락을 꼭 염두에 두고 '운세과자 프로젝트'를 기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가만 생각해보면, 필연적으로 다양한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고, 크건 작건 공동체 문화에 속해 있는 다양한 개인들의 소망에 귀 기울이며, 그 차이와 소망을 우리 모두가 나눈다는 뜻을 품을 수밖에 없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일하려면 다치지 않을 운, 월급 떼이지 않을 운, 단속에 걸리지 않을 운 등등, "제도가 아니라면 행운이라도" 좋아야 한다는 믹스라이스의 말은 무척 가슴 아프고 자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워지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 좋은 운을 나누는 행위로서 운세과자에 얽힌 나, 당신, 우리의 경험과 마음을 실어 보내는 일은 산뜻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상에서 논했듯이, 믹스라이스가 미술로 다루는 담론은 거대하고 무겁다. 그러나 그들의 실행 방식과 표현은 유머에 넘치며 때로는 매우 기발하고 때로는 싱거울 정도로 가볍다. 어떻게 수많은 역사적 시간동안 형성된 '단일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이 20세기 말부터 시작된 다문화 사회화의 경향 속에서 금세 깨질 수 있겠는가? 또 그 해체가 정당하고 올바른 목적과 현실적 요구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어떻게 별 저항이나 고민 없이 실행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휴머니즘적 시선을 극복"하고, 한국 사회에서 별 권리도 존중도 받지 못하는 이 사람들이 "스스로 [이 사회 속] 주체가 되는 과정"을 함께 꾸려나가는 믹스라이스의 예술프로젝트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성가신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서 봤듯이, 믹스라이스의 미술은 그 복잡다단하고 불편한 이야기들을 일부러 조금 어설프고 많이 우스운 형식 속에 담아낸다. 이 복잡함과 어설픔, 이 불편함과 우스움을 변증법적으로 융합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믹스라이스 미술의 힘이다. 혹은 문화실천가로서 그들의 활동이 귀한 이유이다. 풀어 말해서, 그 변증법적 융합의 힘을 원천 삼은 믹스라이스의 작품과 활동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곳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마음과 생각을 미세하게나마 바꿔나가며 '지속 가능한 삶'의 미래를 현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수미

 

필자 소개
강수미는 홍익대 회화과, 대학원 회화과 석사를 거쳐, 동 대학원 미학과에서 『테크놀로지 시대의 예술 - 발터 벤야민 사유에서 유물론적 미학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미학연구자이며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로 일한다. 또한 현재 홍익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덕여대, 성신여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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