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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만들어나갈 또 하나의 무대, 가상현실
예술산업과 기술Ⅰ역사적으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예술계는 요동쳤다. 기존 예술이 뉴미디어와 만나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고, 뉴미디어에 어울리는 표현 양식이 개발되고, 관객들에게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예술적 감흥을 선사했다.
예술가의 시각으로 현실을 반영하던 회화는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사실성보다는 오히려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콘서트나 실제 라이브 음악 감상의 문화는 레코드의 개발로 이제 어느 곳에서나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기차가 기차역에 도착하는 장면을 담은 세계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뤼미에르 형제, 1895)’가 나온 이후 영화는 다양한 예술적 실험이 이어지면서 여러 예술 장르들을 만들어 냈다. 이처럼, 뉴미디어의 등장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새로운 예술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가상현실이라는 뉴미디어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구글(Google)의 ‘버추얼 아트 세션(virtualart.chromeexperiments.com)’ 가상공간에 입장해 보자. 정면에 네모난 상자와 더불어 양손에 팔레트와 막대기를 들고 작업하는 흐릿한 실루엣의 한 사람이 보인다. 이곳은 바로 새로운 조각품을 디자인하고 있는 조각가의 가상 작업실이다. 구글의 틸트 브러시(Tilt Brush)를 이용해 동물 모양으로 조각하는 모습을 좌우로 살펴보고, 예술가의 움직임을 눈앞에서 체험할 수 있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국의 ‘달리 박물관(thedali.org)’은 ‘달리의 꿈(Dreams of Dali)’을 주제로 16년 1월부터 6월까지 가상현실 전시회를 개최했다. 가상현실로 구현된 달리의 작품에서는 모래바람이 불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시선을 압도한다. 3D 입체로 구현된 달리의 작품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일반적으로 가상현실이라고 하면 가상현실 게임 정도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현실과 가상을 아우르는 혼합현실(Mixed Reality)까지 넓혀서 생각해보면, 가상현실의 영역은 한층 넓어진다. 앞선 사례와 같이 3D로 완전하게 창조한 가상현실도 있지만 현실의 지형 정보를 나타내는 GPS와 연동돼 가상 캐릭터를 포획하는 ‘포켓몬 고(Pokemon Go)’처럼 가상 객체가 현실에 덧입혀져 경험하는 증강현실도 있다. 그리고 미국의 더 보이드(The Void)가 시도하고 있는 ‘가상현실 테마파크’처럼 시각은 가상현실에 머물러 있지만 현실에서의 신체 행동과 직접 연동하는 가상현실도 있다. 또한,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면 실시간으로 연결해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마치 그곳에 있는 것처럼 경험하거나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가상공간에서 함께 교류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가상현실은 가상세계에 구현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그러면서도 생생한 현실감을 안겨 준다. 2014년 여름, 영국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갤러리는 한밤중에 텔레프레즌스 로봇을 통해 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이벤트를 개최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런던을 방문하지 않고도 나를 대신해 미술관을 이동하는 텔레프레즌스 로봇을 원격으로 조종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비록 360도 카메라를 장착하지는 않았지만 1인칭 시점에서 즐기는 생생한 예술 경험은 예술에 대한 거리를 좁혀주었다.
가상현실은 결국 누군가의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새롭게 구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예술적인 활동이 반영된다. 예술 작품 안에서 예술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가상현실에서는 무엇이든 예술이 된다.
문화예술 장르별로 스토리텔링의 방법이 다르듯이 가상현실에서도 가상현실에 맞는 새로운 문법이 개발된다. 특히, 시각 중심의 가상현실 콘텐츠가 청각, 촉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예술 작품에서도 감각적인 요소가 중요하게 취급된다. 가상현실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무심코 가상의 객체를 만지려고 손을 뻗는 일이 매우 흔하게 벌어진다. 이러한 가상현실의 실감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감각적인 자극이 동원된다. 이를테면 풀밭에 예쁜 장미꽃이 피어 있으면 향기로운 장미향이 느껴지고, 해변에 파도가 치고 있을 때는 작은 물방울이 튄다. 고가구를 만지면 다소 거칠지만 정감 있는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온다.
예술작품에 손대지 말라거나 조용히 해달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예술 작품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오히려 강조한다.
오랫동안 예술 세계는 보호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관객의 역할은 단지 예술가의 작품을 먼발치에서 감상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가상현실에서 구현한 예술 작품은 관객들을 초대하고 직접 참여시킨다. 이로써 관객조차 예술 작품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 요소가 된다. 예술가가 심사숙고한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예술 작품 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자신만의 감상법을 발견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아무도 어느 순간에 추임새를 넣으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작품에 몰두해 반응하는 전통 민속극의 무대처럼 관객들은 가상현실로 구현된 예술 작품 안에서 자신만의 예술 활동을 펼친다.
가상현실을 활용하면 예술가들은 가상공간을 구축하는 건축가가 되어 관객들의 동선을 예상하고 매 순간마다 무엇을 체험하게 될지 고려하면서 관객들과 일대일로 상호작용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예술 작품은 예술가가 아니라 관객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다.
가상현실에 대한 상상은 생각보다 오래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그 가능성이 탐색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가 등장한 이래로 작년 말부터 삼성전자, HTC, 소니 등에서 본격적으로 HMD 기기가(Head Mounted Display, 안경처럼 머리에 쓰고 대형 영상을 즐길 수 있는 영상표시장치) 출시됐다. 이어서 가상현실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도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장시간 HMD를 착용할 경우에 어지럼증을 느낄 수 있고, 정교하게 조작할 수 있는 컨트롤러와 전문가 수준의 창작 소프트웨어가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은 등 제약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가상현실이 예술가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주고,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무대가 될 것은 틀림없다.
가상현실은 단순한 기술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그동안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던 것을 입체적으로 시각화함으로써 인간이 활동하는 공간을 확장하며,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원격으로 연결해주는 새로운 미디어이다. 현실이 아닌 가상을 기반으로 인간이 창조해낸 새로운 공간에서 사람들은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감각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유인오는 ㈜메타트렌드 대표이사, 메타트렌드연구소 소장. 최신 사용자 경험 트렌드와 디지털 라이프스타일 분석 및 예측전문가로,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의 신상품 개발 및 미래예측 UX시나리오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과 주요 대학에서 특강을 진행했고, 미래부, 산업통산자원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다수 기관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