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좋은 공연 추천 좀 해줘” “초대권 없니? 아니면 할인권이라도”
공연예술계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요청이다.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서양 명절’을 앞두고 등장하던 이런 말풍선이 구정이나 추석 같은 우리네 명절 즈음에 들려오기 시작한 건 최근 한두 해 사이인 것 같다.
주변만 둘러 봐도 주5일 근무에, 연차를 권장(?)하는 회사 분위기 덕에 이번 연휴 전후로 휴가를 내어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이들이 상당하다. 휴가를 길게 쓸 수 있는 명절에는 ‘D턴족’(명절 연휴 초반 고향에 바로 내려가 짧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나 집 근처에서 연휴를 보내는 스테이케이션(stay+vacation)이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추석 연휴가 포함된 9월 10일(토)부터 18일(일)까지를 ‘한가위 문화·여행주간’으로 지정해 전국 주요 관광·문화 시설 할인과 문화·축제 연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29일 기획재정부에서 발표한 한가위 문화·여행주간은 명절 연휴 기간 중 여가·문화생활을 즐기는 이들을 통해 내수 진작을 꾀한다는, 추석 민생 대책 중 하나로 올해 처음 도입됐다. 이른바 ‘문화가 있는 추석’이다.
한가위 문화여행주간 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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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명절 연휴에 국립미술관을 비롯해 4대 고궁·종묘·박물관 등은 무료 또는 할인된 가격으로 입장할 수 있었으나, 이번 한가위 문화·여행주간에는 국립시설뿐 아니라 민간시설, 농어촌 체험마을, 스포츠, 교통·숙박으로 폭이 확대되었다. 공연예술계로 시선을 돌리면 클래식 음악계는 명절을 조용하게 보내는 한편, 전통예술을 비롯해 연극, 뮤지컬 장르는 추석 연휴 기간 중 1+1 티켓 할인 이벤트, 특별 무료 공연 등을 내놓으며 도심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이들의 발길을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전체 풀을 보면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는 이벤트성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 관 주도의 공익 개념이 짙은 것이 대부분이다.
새로운 여가시간 활용, 문화예술계의 경쟁상대는 누구?
‘한가위 문화·여행주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가족 단위를 타깃으로 삼는 체험형 프로그램이 상당수를 차지해 사실상 ‘여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연휴라는 여유 시간을 통해 대중이 (소비하길) 원하는 라이프스타일 형태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경험(체험)’이라는 키워드로 추출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조합은 시즌과 분야를 막론하고 오늘날 대중을 상대로 콘텐츠-마케팅을 펼쳐야 하는 모든 이들이 당면한 난제이기도 하다.
최근 대중의 이러한 욕구와 소비 형태를 총망라한 공간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의 야심작 ‘스타필드 하남’이다. 축구장 70개 면적과 맞먹는다는 국내 최대 규모의 건물에는 쇼핑 매장뿐 아니라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테마파크, 각종 레저 시설이 들어찼다. 미국 터브먼사와 합작해 약 1조 원가량이 투자된 테마파크형 복합쇼핑몰은 국내 경제 위축으로 그간 투자에 어려움을 겪어온 대규모 매장과 스마트폰으로 인한 온라인-모바일 쇼핑의 활성화로 위협받고 있는 오프라인 매장 및 유통업계가 겪고 있는 위기 앞에 내놓은 도전장으로 평가받으며 사전 개장 사흘 만에 24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스타필드 하남 전경 ⓒ스타필드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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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를 앞두고 연일 경제면에 오르내린 뉴스를 보면서 유통업계가 당면한 과제가 현재 공연예술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유통업의 경쟁자는 동종업체가 아닌 야구장과 놀이동산이 될 것”이라는 정용진 부회장의 이야기에, “오늘날 공연장의 경쟁상대는 대형 멀티플렉스”라는 서울 모 공연장 본부장의 멘트가 문득 떠올랐다. 테마파크형 복합쇼핑몰, 쇼핑 테마파크의 등장으로 공연예술계와 경쟁상대 간의 거리는 더 멀어진 셈이다. 게다가 ‘스타필드 하남’ 오픈을 앞두고 정 부회장의 페이스북에 내세운 가치와 개념들을 살피면서, 그의 이야기에 공연예술계의 몇몇 단어들을 대입해 볼수록 고민의 결은 짙어졌다.
“단순히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집 밖을 나서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 시대의 쇼핑은 새로운 것을 눈과 입과 귀로 즐기고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라이프스타일의 한 형태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유통업의 미래는 업체 간 시장점유율이 아닌
고객의 일상을 점유하는 라이프 셰어에 달려있다”
“‘사러오는 곳’ 보다 ‘하루 종일 신나게 보고 듣고 즐기고 채우러 오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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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별별연희 공연모습 ⓒ국립극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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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통업계와 문화예술계의 다른 속성, 생태를 감안하지 않고 무작정 대입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무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효율성이든 가성비든, 정서든 취향이든 결국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가치가 있는 곳에서, 지갑을 연다. 잔인하게도 대중은 ‘여가시간 활용’이라는 목표 아래 서로 다른 생태계에서 비롯된 결과물을 동일 선상에 두고 저울질한다. 명절이든 휴일이든 그 어느 때든 기회비용을 셈하는 대중의 시선은 물건에서 비롯되는 충족감 이상의 경험, 조명 아래 선보이는 작품 너머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
어쩌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 사실, 이번 명절 연휴에 조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면 좋을지 고민이다. 연휴를 앞두고 볼만한 공연 리스트들 건네는 내게 가족이며 일가친척들이 이렇게 말할 때, 제일 난처하다.
“그거 재밌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