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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예술’과 ‘만남’으로 물드는 스페인 타레가
리뷰_스페인 피라타레가(Fira Tarrega)(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한국-스페인 커넥션>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9월 8일(목)부터 13일(화)까지 스페인을 방문하였으며 필자 외에 양길호(모다트 대표), 오치운(운프로젝트그룹 대표/연출), 정은경(극단 무소의뿔, 대표/연출), 정성진(의정부음악극축제 기획홍보팀장), 차정훈(컬쳐버스 프로듀서), 채충명((사)아시테지 한국본부, 축제 프로그래머)이 함께 하였다. 리서치는 9월 8일(목)부터 11일(일)까지 피라타레가 <Fira Tàrrega>*를 플랫폼으로 하여 여러 단체와의 미팅 및 프레젠테이션 참석, 거리예술 관람을 통해 스페인 거리예술의 동향을 살피고, 이후 12일(월)부터 13일(화)까지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창작센터를 방문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한번 방문한 것으로 스페인의 거리예술에 대해 논하기는 무리가 있으나, 단 며칠이라도 가서 보고 느낀 점을 작게나마 공유하고자 한다.
* 피라타레가(Fira Tàrrega)는 축제와 마켓을 겸하는 형태의 행사로, 신체극 및 거리극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1981년 창설되어 매년 9월에 스페인 타레가에서 개최되는 거리예술축제로서 2007년부터 “Creative Land”라는 슬로건 하에 마켓이 시작되었다.
타레가(Tarrega)에 대한 첫인상은 ‘소탈함’이다. 이것을 스페인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확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필자가 수년간 본 스페인 예술가들도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약간은 거칠지언정 솔직한 모습이 있었다. 타레가의 작은 골목들은 여기가 과연 예술축제가 열리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본연의 기능에만 충실한 모습이었고, 지역 주민들의 사는 모습 또한 여느 동네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거리에서 공연이라도 시작되면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관객들이 그곳이 축제 장소임을 알려준다. 예술가와 관객, 그리고 평소보다 늘어난 방문객과 그로 인해 붐비는 가게들 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장식도, 군더더기도 보이지 않는 타레가는 마치 축제계의 고수와도 같은 인상을 남겼다. 늘 ‘일상 속의 예술’, ‘일상 속의 축제’를 부르짖지만 정작 이렇게 그 지역과 지역주민의 삶에 이질감 없이 녹아든 축제가 있었던가.
피라타레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만남’이라 하고 싶다. 공연예술축제를 간다고 했을 때 흔히 작품을 많이 보는 것을 기대하는데, 타레가에서는 오히려 만남에 더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피라타레가의 마켓 플레이스이자 전문가들의 주요 네트워킹 장소인 라로티야(La Llotja)에는 축제에 참여하는 단체들의 홍보부스가 빙 둘러져 있고, 한쪽에는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공간이, 가운데 곳곳에는 작은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만남을 주선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거기에 예술가, 프리젠터, 프로듀서는 물론 정부 산하기관, 예술가협회(association), 지역별 서커스연합 등 세분화된 단체 및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야말로 ‘시장’을 방불케 한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그야말로 멘붕이 올 것만 같은 산만함이 없지 않지만, 또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작은 지방 축제에서 이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피라타레가의 놀라운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고민은 ‘그럼 만나서 뭘 하는가?’다. 초반에 필자는 이 고민으로 적잖이 피로했다. 만남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고,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오갈 리 만무했다. 며칠이 지난 후 피라타레가 측 아트마켓 디렉터인 마이크 리발타(Mike Ribalta)가 한 평범하기 그지없던 말이 명쾌한 답처럼 들렸다. 피라타레가는 만남의 장소라고. 어쩌면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는 성과주의에 길들여져 스스로를 옭아맸던 건 아닐까. 라로티야(La Llotja)에서부터 런치미팅, 프로 클럽, 프레젠테이션 등 전문가를 위한 네트워킹 프로그램이 가득한 피라타레가에서 누군가 이 고민을 시작한다면 마음이 꽤 복잡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피라타레가는 설레는 첫 소개팅과 같은 자리라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물꼬를 트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피라타레가의 공식초청작들은 대부분 이름 있는 단체들의 신작으로 구성되었다. 신작이라 약간은 느슨해 보이는 부분이 조금씩 있었지만 그 또한 따끈따끈한 새 공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일 수도 있겠다. 스페인 거리극에서 느낀 전반적인 모습은 앞서 언급한 ‘소탈함’과도 일맥상통한다.(소탈함이 작품 규모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대규모의 화려한 스페인 작품들도 많지만, 또 그 안에서 느껴지는 스페인식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모습들이 있다) 세트는 주로 기능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텍스트적인 요소보다는 움직임과 몸에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장르에서는 춤과 서커스가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공식 초청작 중에는 실내에서 하는 작품이 적지 않았는데, 체육관이나 다른 시설물을 공연장소로 활용하는 유연함이 돋보였다. 그러나 요즘 많이 시도되고 있는 ‘특정 공간공연(Site-specific theatre)은 의외로 적었다.
실내가 아니더라도 약간 닫힌 공간에서 관객 제한을 두고 하는 작품들도 있었는데, 그 제한이라는 것이 작품의 콘셉트 상의 제한이라기보다는 물리적 공간상의 제한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타 축제에서 보아오던 섬세한 집중도를 요구하거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야 하는, 예를 들면 회당 5명짜리 작품이 아니라, 80명이 앉을 의자밖에 없어서 80명으로 제한하는 느낌이랄까. 뭔지 모르게 스페인식의 시원시원함이 느껴졌다.
피라타레가에서는 이러한 스페인 작품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올해 ‘칠레 포커스’에서는 칠레 거리극을 두 편 소개했는데, 컨테이너 극단(Teatro Container)의 <공공의 요리(La Cocina Pública)>가 인상적이었다. 거의 백 명 가까운 관객들에게 소박한 가정 음식을 만들어주며 마치 가족끼리 식사하듯 친밀하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통해 문화를 공유한다.(몇 가지 소박한 공연도 선보인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거리극 본연의 정신과 특유의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 외에도 어반네이션(Urban Nation)은 재즈와 힙합 등을 중심으로 현대 도시문화의 단면을 선보이며 거리예술의 포용력을 넓혔다. 비유럽 국가 작품 2편도 따로 묶어 소개했는데, 그 중 우리나라의 이철성(비주얼씨어터컴퍼니 꽃) 연출이 현지 주민들과 함께 워크숍을 통해 작업한 공연 ‘맛사지사’도 포함되었다. (*본 공연은 안산국제거리극축제와 타레가거리극축제의 예술가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16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서는 피라타레가에서 추천한 까를라로비라(Carla Rovira)가 안산지역 학생들과 함께 공연한 바 있다)
타레가거리극축제(피라타레가)의 핵심인 ‘만남’을 거듭할수록 눈에 띄었던 점은 스페인에는 예술가들의 협회(association)가 활발히 활동한다는 점이다. 협회는 주로 지역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예술가들이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등록하면 협회의 일원이 된다. 대신 협회는 예술가들의 권익 보장에 앞장서며, 그 외에 작품 홍보와 유통 등 매니지먼트 성격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PACC(Professional Association of Circus Catalonia)처럼 예술가를 포함한 기획자, 테크니션, 비평가, 작가, 디자이너, 안무가 등 전문가들의 협회가 있기도 하다.
협회 외에도 바스크, 카탈루냐, 발레아레스 등 지방 정부의 예술가 지원에 대한 열의는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특히 바스크와 카탈루냐 지역은 프랑스와 국경을 이루는 스페인 북동쪽 지역으로, 현재까지도 분리독립운동이 일어나는 곳이다.(카탈루냐 주민들은 스페인과는 다른 고유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으며,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제한적 자치권을 확보하였다. 바스크 또한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민족으로 한 때 스페인의 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받은 역사를 거치며 더더욱 민족주의적으로 결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방정부의 예술가 지원 사업에서도 나타난다. 아직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스페인이지만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넉넉한 지역 재정 살림을 바탕으로 무엇보다 소속 지역의 예술가들의 해외 투어에 열을 올리는 모습은 스페인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점 중의 하나였다. 한편 축제 프로그래머로서는 해당 지역의 괜찮은 작품이 있다면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윈-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예술가연합(association)은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지방정부나 의회에 요구해서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바르셀로나에서 방문했던 서커스센터(Central del Circ)가 그러했다. 바닷가의 넓은 공간에 위치한 서커스 센터는 서커스 예술가들의 통합 레지던시 공간으로 일상 훈련을 위한 넓은 트레이닝실과 개별 창작을 발전시키는 창작공간, 개인 사무실 등을 갖추고 있다. 스페인이 유독 서커스 장르가 많이 발전했다 치더라도, 이런 공간을 예술가들의 목소리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물론 적극적으로 노력한 예술가들과 열린 마음을 가진 정책입안자들의 힘이 합쳐진 결과물일 것이다.
그 외에 방치된 공간을 예술 공간으로 바꾼 곳도 있었는데, 바르셀로나 창작공간(Fábrica de Creación de Barcelona)은 방직공장이었던 곳을 말 그대로 창작공장으로 재탄생시켰다. 총 4층 규모로 다양한 장르의 컨템포러리 예술작업이 이루어지며, 리허설룸 외에도 예술가들의 휴식공간, 네트워킹 공간, 개인 사무실, 약간의 객석을 갖춘 쇼케이스 공간 등 필요에 따라 세분화된 공간 구분이 인상적이었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메르카트 데 레스 플로르스(Mercat de les Flors)는 주로 춤 또는 피지컬씨어터 위주의 예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시였는데, 규모가 크지 않다고 해서 필요한 것들이 없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곳은 예술가가 작업하는 동안 가족과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가족들을 위한 공간(부엌과 거실 등 생활공간)까지 마련해 두는 세심함을 보였다. 어느 연습실은 설계 당시에는 계획에 있지 않았지만 사용하면서 필요성이 느껴져 공간 내에 취침이 가능한 침실을 조그맣게 마련해 두기도 했다. 마치 예술가가 예술가를 위해 만든 것 같은 세심한 배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거리예술은 지난 몇 년간 관 주도 축제들과 함께 급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주로 유통과 결과물에 집중된 감이 없지 않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 우리가 다음으로 눈을 돌려야 할 곳은 이처럼 뿌리를 튼튼히 하는 창작공간과 제작환경일 것이다.
김진영은 안산국제거리극예술축제 공연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