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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의 딜레마, 기술이 해결할까?
.#1. ‘햄릿’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백을 읊조리는 모습이 가로 9미터 세로 6미터의 대형 스크린 한가득 펼쳐진다.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
영화관이 아니다. 공연장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의 모습이다. 관객들은 객석 어디에서도 불편함 없이 배우 컴버배치의 섬세한 표정 연기를 감상한다. 지난해 봄 일찌감치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던 영국 국립극장 NT라이브의 국립극장 해오름 중계 실황이다.
#2. 어린 왕자가 아찔한 높이의 공중에서 사막의 황량한 여정을 생각하는 듯 어딘가를 내려다본다. 장면이 바뀌자 몽환적인 행성의 여정이 3D 영상으로 펼쳐진다.
이 역시 영화관이나 TV가 아니다. 안애순 예술감독의 현대무용 ‘어린 왕자’가 공연되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 풍경이다. 공중에 떠있는 어린 왕자의 모습은 홀로그램으로 구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인터랙티브 미디어 파사드 등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빚어낸 환상의 미디어 공간들이 무용수들의 몸짓과 어울려 어린 왕자가 여행하는 행성의 세계를 그려낸다.
아서 단토(Arthur Danto)와 장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d) 등에 의해 “죽었다”며 사형선고를 받았던(그 의미야 어떻든 간에) 예술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새로운 창작 방법,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 서로 다른 표현과 소통 방식의 융합이 예술의 새로운 트렌드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여기에 소셜 미디어의 출현은 예술로 하여금 20세기까지 지속되었던 자기 충족성 혹은 자기 만족성이라는 폐쇄적 구도를 벗어나게 하고 있다.
예술 장르나 양식(style)은 그때그때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태와 연관해 발생한다는 헤겔의 말이 맞아떨어지는 시대다. 이처럼 예술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 추동력은 바로 기술이다. 그렇다. 예술의 역사는 기술적 제수단의 계속적인 혁신과 개선의 역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술의 발전은 결국 기술의 활용과 지배의 과정으로, 능력과 의도, 표현매체와 표현내용의 조화된 일치로 볼 수 있다(A. 하우저).
마샬 맥루언(1997)이 “지난 세기 인류의 테크놀로지 발전과 확장으로 탄생한 갖가지 매체를 통해 우리가 이제까지 감각이나 신경을 이미 확장하였다”라고 말한 대목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오는 지금이다.
앞의 두 장면으로 되돌아가보자. 첫 장면은 기술을 통해 예술 유통방식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고, 두 번째는 창작 단계에서 예술과 기술이 만난 장면이다. 이 중 첫 번째 장면과 관련된 공연예술의 유통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동안 공연예술의 유통창구는 공연장이 거의 유일했다. 그런데 공연장은 수익을 내기 쉽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족한 공연시설을 확충하고, 협소한 수요를 늘리며, 가격을 낮추는 등 다양한 노력과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장기 공연이 가능한 구조를 구축하기도 하고, 공연예술관광 등의 융합과 공생 마케팅을 펼치기도 한다. 또 시간적·공간적·경제적 접근성을 확대함으로써 수익성을 높이려 애쓰고 있다. 1일 공연 횟수를 늘리고 공연수요가 있는 곳을 찾아가며 1회 공연시간을 줄임으로써 티켓 가격을 낮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공연장 자체가 숙명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를 모두 극복하기엔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영상 기술이 오랜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유통 창구를 만들어주고 있다. 우선 공연영상은 인터넷을 통한 마케팅 및 홍보, 비디오 클립 형식의 짧은 프리뷰 노출에 의한 디지털 사전경험 등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특히 최근 공연예술 실황영상이 시공간적 경계를 뛰어넘어 예술 소통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공연장 이외의 유통 플랫폼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 오페라, 클래식, 발레 등의 공연예술이 디지털 영상기술과의 결합을 통해 기존 공연장 위주의 플랫폼에서 영화관과 웹 등 새로운 개방형 플랫폼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해외에서는 2000년대 후반부터 온라인 공연실황중계시스템을 본격 도입하고 있다. 뉴욕의 메트(MET) 오페라는 이미 연 수익 426억 원을 기록,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앞에서 예로 든 영국 국립극장의 NT라이브는 성공사례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이외에 베를린필하모닉은 디지털 콘서트홀을 2008년부터 운영하고 있고, 유럽의 인터넷방송 메디치TV는 발레, 클래식, 오페라 등을 제공하며 시카고 심포니 라디오가 웹과 모바일로 공연실황을 중계하고 있다. 또 클래식 음악 웹사이트 클래시컬플래닛(classical planet)은 유럽의 신진 연주자들의 콘서트 실황과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마스터클래스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공공 공연장을 중심으로 공연영상의 실황중계가 활발해지고 있다. 국립극장은 2014년 연극 ‘워 호스’, ‘다리에서 본 풍경’ 등을 시작으로 처음에 예로 든 데이비드 컴버배치의 ‘햄릿’ 등을 상영해 예상외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용인문화재단은 오페라 ‘사랑의 묘약’, ‘아이다’ 등을 레퍼토리로 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의 ‘The Met : Live in HD’ 실황영상을 선보인다. 고양문화재단도 오페라 ‘라보엠’ 등의 공연영상을 공연장에서 상영하며,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등 세계적 오케스트라단의 공연영상을 볼 수 있다. 특히 예술의 전당은 ‘SAC 온 스크린’을 브랜드로 클래식 ‘토요콘서트’, 발레 ‘지젤’, 연극 ‘메피스토’, 오페라 ‘마술피리’ 등의 공연영상을 제작하고 있고 최근에는 공연실황을 라이브로 중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영상은 공연장 이외에 극장이나 IPTV 등을 통해 서비스되고 유튜브클래식 등으로도 영역을 확장하면서 공연의 유통 플랫폼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공연장의 티켓 수입만 가지고는 수익을 거두기 어려웠던 공연예술에 영상 플랫폼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공연의 영상화는 사실 TV가 등장하면서부터 시도돼왔다. 하지만 그동안의 공연영상은 기술적 한계로 공연장의 실황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때문에 공중파TV나 케이블TV 등을 통해 이따금씩 중계되는 공연실황은 공연의 질을 훼손한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거나 아카이브 기능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촬영기술이 고도화되고 화질도 Full HD 또는 4K급으로 개선됐다. TV드라마에 비해 어두운 조명의 무대 장면을 이제는 별도의 추가 조명 없이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공연예술 콘텐츠가 영상화될 때는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영상과 음향이 공연장 실황 분위기를 보완할 정도로 고도화되어야 하는데 이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대체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완재로서는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이제는 공연영상물이 공연장뿐 아니라 극장에서도 상영이 잦아지고 있다. 세계적 영상물 견본시인 MIPCOM이나 MIPTV 등에서도 4K공연예술 콘텐츠가 점차 많이 등장하는 등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높아지고 있다.
공연은 극장의 먼지를 먹으며 봐야 제맛이라고들 한다. 영상은 공연예술의 현장성을 100퍼센트 구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공연영상에는 실황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점들도 많다. 우선 비용이 저렴하다. 또 클로즈업을 통해 배우의 섬세한 표정연기를 볼 수 있고, 다양한 각도에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카메라 렌즈가 주는 특유의 영상미학과 다양한 카메라워크를 시청하는 것은 영상만이 주는 즐거움이다. 게다가 공연장 의자가 주는 불편함에서 벗어나 보다 안락한 환경에서 소위 예술향유의 어메니티(amenity)를 향유할 수 있다.
영상은 복제기술이다. 언제나 복제는 예술의 새로운 혁명을 낳을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문학은 인쇄본의 출현과 함께 듣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변했고, 시인과 음악가의 역할은 분리되었다. 직접 쓴 시에 곡을 붙여 노래했던 중세의 음유시인은 작가, 지식인으로 변모했다. 사진의 발명은 역설적이게도 현대미술이 탄생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기술복제 시대에 예술의 일회성이 사라지므로 아우라가 없어진다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주장은 디지털 매체에는 의미가 없다는 학자도 있다. 초기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있었던 시대에는 예술의 특성이 복사본과 대립되어 두드러지는 것이지만 지금처럼 원본과 복사본을 구별할 수 없는 시대에 일회성은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연영상에는 걱정거리도 있다. TV가 등장했을 때 연극은 드라마 장르로 바뀌면서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대중문화로 흡수 편입되었던 경력이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공연의 영상화가 그때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 본질을 잃지 않은 채 또 다른 수익원이자 대중화의 기제로 완벽하게 자리 잡을지 기대된다.
기술을 통한 공연예술 유통 플랫폼의 확장은 영상뿐 아니라 가상현실(VR)로도 이어진다. 사실 VR 역시 영상기술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VR의 사례로는 3D 기술을 지원하는 뉴글로브극장*에서 초연된 엔자 미스테리오(Enjah Mysterio)의 ‘프롬 더 셰도(From the Shadow)’, ‘제2의 삶 발레단’의 러브스토리 발레 ‘올마넨(Olmanen)’, 레드 오케스트라의 3D 가상 웹 실시간 라이브 공연 등이 있다.
(*미국 린든랩이 운영하는 VR서비스 'Second Life'의 글로브극장)
흔히 2016년을 VR 대중화의 원년이라고 한다. VR 대중화가 이제 막 걸음마 단계라는 뜻이다. VR의 대중화가 본격화되면 공연예술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부상하리라는 전망도 많다. 문화경제학자 트로스비(D. Throsby)는 예술소비를 위한 하나의 경로로서 인터넷의 출현, 그리고 문화 교류의 주요 영역으로서 광범위한 디지털 경제의 등장은 미래 예술 산업의 구조, 경영과 공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견했다. 공연영상과 이의 확장판인 VR의 사례에서 보듯이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디지털 기술은 공연예술 유통에 부흥의 기회를 주고 있다.
예술이 기술과 분리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고대에서 유래한 테크네의 개념이 ‘놀랍게도’ 그 원형 회복의 기회를 맞는 2017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본 기사는 테크M 제45호(2017년 1월)에 실린 기사를 재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