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에 실린 글의 내용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TEL 02-708-2293 FAX 02-708-2209 E-mail : weekly@gokams.or.kr
종이책에서 미래를 찾다
영미권 시각예술 출판과 유통 현황세계 출판 시장은 영미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언어권별 출판 시장이 자체 동력으로 활성화되고 있지만, 영어로 된 콘텐츠는 접근성과 활용성 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고 실제로도 다양한 양질의 출판 콘텐츠가 영미권 시장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유통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영국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출판 시장을 가진 곳이다. 출판사로 사업자 등록을 한 곳이 약 2,500개이며, 영국출판협회에서 발행한 출판연감에 따르면 2016년 내수 및 해외 시장에서 약 48억 파운드라는 매출 성과를 냈다. 특히 2016년부터는 파운드의 화폐 가치 하락으로 해외 시장 매출이 점점 증가하며 전체 매출의 54%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내수 시장은 종이책 출판이 점점 소멸해 갈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디지털 서적 판매는 감소한 반면 지난해 종이책 매출이 7.6% 증가해 201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고, 서점 판매 역시 42%로 책 판매량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영국의 시각예술 출판 시장 역시 이러한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형 체인 서점뿐만 아니라 미술관 서점, 독립서점을 중심으로 시각예술 출판 시장은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며 점점 콘텐츠뿐만 아니라 책의 만듦새까지 살피는 양질의 출판물들을 선호하는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아트 북들을 생산하는 독립 출판사들이 합류하고 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점들이 증가하면서 출판물들의 종류가 단순히 모노그래프나 일반교양서 등에 그치지 않고 매우 다양해지는 상황이다.
시각예술의 디지털 출판물은 출판 시장의 전체 흐름과 마찬가지로 점점 그 수요가 감소하고 있다. 책의 만듦새를 강점으로 하는 출판물이 많아지고 아트 북이 단순히 책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예술적 오브제로 간주하게 되면서 구매자의 목적과 동기를 충족시키지 못하기에 그렇다. 디지털 출판물의 대부분이 정보를 목적으로 하거나 텍스트 중심으로 구성된 책들을 위주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 9월 5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프로젝트 비아 기획형 리서치 지원사업-시각예술 출판 워크숍’ 내용을 바탕으로, 영미권의 시각예술 출판 현황과 출판물 제안 방식, 제작 과정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시각예술 출판 시장은 크게 트레이드 마켓과 컬리지 마켓으로 나뉠 수 있다. 트레이드 마켓은 말 그대로 일반 독자와 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이미지 중심의 소장용 책을, 컬리지 마켓은 전공 서적 및 교양서 중심 서적을 말한다. 세부적으로 뮤지엄과 갤러리의 출판물, 현대 미술가들만을 소개하는 출판물, 대학 출판사, 아티스트 북, 예술 이론서 위주의 출판물로 구분될 수 있다.
① 트레이드 마켓 출판사
영국 내 트레이드 마켓의 대표 출판사로는 테임즈 & 허드슨(Thames & Hudson), 파이돈(Phaidon), 프레스텔(Prestel), 발터 쾨니히(Walther Koenig), 로렌스 킹(Laurence King), 스키라(Skira) 등이 있다. 출판사와 유통사를 함께 운영해 생산되면 바로 배급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들은 주로 미술관, 갤러리 등 예술 기관과 협업하거나 출판 제안서, 시장의 요구에 맞춘 출판사 내부의 자체 기획을 통해 일반 독자들과 시장을 겨냥한 책들을 많이 제작한다.
② 뮤지엄과 갤러리 출판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제작되는 출판물은 전시 또는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많다. 이에 따라 미술관 내부에 출판 부서를 설치하거나 트레이드 마켓에 속한 대형 시각예술 출판사와 협력하면서 전문성과 자원을 활용한 출판물들을 제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마케팅 면에서도 기존의 미술관 서점 또는 아트숍 외에 전시가 끝나는 지점에 아트 상품과 함께 해당 전시 도록, 전시와 관련한 기존에 출간된 책들을 함께 배치해 독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상업화랑에 소속된 출판사의 경우에는 굉장히 프라이빗한 형태로, 미술작품 세일즈 및 마케팅을 위한 도구로써 제작된다. 책이 한 권 만들어지더라도 제작비가 많이 투여되며 그만큼 한 권의 가격이 매우 비싸다. 영국 내에 가장 활발하게 출판물을 생산해 내고 있는 뮤지엄과 갤러리는 테이트 퍼블리싱(Tate Publishing),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출판부서(Victoria and Albert Museum Publications), 데이비드 즈워너 북스(David Zwirner Books), 화이트채플 갤러리의 출판팀(Whitechapel Gallery Publications) 등이 있다.
③ 동시대 미술가들을 다루는 출판사
현대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한 출판물들은 동시대 미술계의 관심과 트렌드에 맞춰 제작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과 미국 작가군이며, 아티스트와 갤러리 및 예술적 행동에 대한 것들이다. 대표적인 출판사들이 무스(Mousse), JRP 링기에르(JRP Ringier)이다. 2006년에 설립된 ‘무스’ 출판사는 주로 신생 갤러리의 젊은 작가들을 많이 다루며, 책의 종류는 예술가들의 모노그래프, 아티스트북, 큐레이터 프로젝트 북으로 구성된다. 유럽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JRP 링기에르’ 출판사는 유망한 젊은 예술가와 예술가의 역사, 미학, 학술 출판물의 연구를 통해 한 세대의 예술가들을 새롭게 매핑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④ 아티스트 북
아티스트 북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특성상, 대형 화보 중심으로 구성되며 동시에 다른 이벤트(북페어, 세미나, 아카이브 등)와 함께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출판사들 중 뉴욕 첼시에 위치한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 www.printedmatter.org)’는 아티스트 북을 대형 출판사나 유통 업체를 끼지 않고도 유통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 중 하나다. 1976년에 설립된 이 곳은 비영리 기관으로서, 비영리 상점을 운영하고 있고 온라인 카탈로그 및 기타 유통 채널(전 세계의 다양한 오프라인 행사)을 통해 예술가 또는 소규모 출판사들의 책 32,000여 권 이상을 매년 유통하고 있다. 또한 예술가 본인 또는 아티스트 북을 만든 독립출판사가 자신의 책을 제안할 수 있도록 그 창구를 언제나 열어놓는다.
⑤ 시각예술 이론서
이론서 중심의 출판사들은 대부분 그 규모가 크지 않을 뿐더러 시장의 규모도 작다. 독립 출판물의 형태가 가장 많으며, 주로 동시대의 문화예술, 사회 정치에 관한 이론서들을 제작하고 있다. 예술 이론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는 출판사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스턴버그 프레스(Sternberg Press, www.sternberg-press.com)’이다. 1999년 작은 규모로 시작된 이 출판사는 베를린과 뉴욕을 기반으로 출판 활동을 하며 예술 비평, 이론, 소설, 아티스트 북을 제작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건축, 디자인, 정치 등 다른 분야가 서로 비판적인 담론을 나눌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⑥ 대학 출판사
대학 출판사들 중에서 문화예술 출판에 강점을 보이는 곳들로는 MIT프레스와 미네소타 대학 출판부,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콜롬비아 대학 출판부 등이 있다. 이들 출판사는 주로 학술서 및 이론서, 아카데믹한 도서들을 출판한다. 영국보다는 미국의 대학 출판사들이 다른 언어권과 협력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먼저 출판 협력은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부적으로는 케이스마다 모두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그러함에도 일반적으로는 크게 공동으로 출판하는 것과 번역 및 라이센스만을 공유하는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시각예술 분야에서 공동으로 출판하는 경우는 대부분 전시나 공동 기획서, 이벤트에 대한 협력의 결과로서 진행된다. 이때 책의 가격과 유통은 두 출판사의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이트채플 갤러리와 MIT 대학 출판사가 함께 공동 출판한 DoCA 시리즈는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전체 기획과 편집, 저작권 구입, 디자인과 인쇄, 영국과 유럽 내의 유통을 책임지고, MIT프레스는 주제 선정에 의견을 제안하고 프로젝트 일정 관리, 미국 내 유통(이때 약 30% 할인된 협력가로 구매)을 담당한다. 번역 및 라이센스만을 공유하는 경우는 말 그대로 출판, 판권에 대한 배분의 성격만을 지닌다.
앞서 설명한 출판사들에게 제안서 제출시 규정된 형식은 없다. 그러나 각 출판사들은 자신의 웹사이트에 출판에 관한 제안서 작성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곳들이 있어, 제안하기 전 반드시 체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출판사 웹사이트에 대부분 출판 제안 담당자의 이메일 주소를 공개해 놓고 있어 그곳을 통해 제안할 수 있다. 대부분 출판하려는 책의 출판 목적과 목차, 내용, 번역된 한두 편의 원고들, 도판 리스트 등을 제공하고, 출판 시장에서 이 책이 어떤 독자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는지를 명시하는 게 좋다. 제안하려는 책의 주제와 유사한 기존에 출판된 책들 2~3권을 예로 들어 차별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력서, 기존의 출판한 도서 소개 등의 간단한 정보 사항은 기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규모가 크거나 유명한 출판사여야만 한다는 생각보다는 해당 출판사의 지향점, 이전에 출간한 출판 목록들을 살펴보고 자신의 책이 그 내용에 부합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제안하려는 책의 매력을 해당 출판사의 담당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북페어들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트북 페어로는 뉴욕 아트북 페어, 런던 아트 북 페어, 도쿄 아트 북 페어 등이 있다. 이러한 페어에서 담당자들과 네트워크를 쌓으며 자신의 책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시각예술 도서 배급사들은 주문을 받아 배급만을 담당하는 회사들이다. 영국 내에는 센트럴 북스(Central Books), 코너 하우스(Conerhouse), 아트 데이터(Art Data) 등이 있으며 미국과 유럽에는 아이디어 북스(Idea Books), 인터라트(Interart), 익스히비션 인터내셔널(Exhibitions International), 모토(Motto), D.A.P(www.artbook.com) 등이 있다. 유통 시 고려해야 할 점은 영국이 도서정가제 비시행국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공정 거래법에 의해 정가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반해, 영국은 1997년 도서정가제를 폐지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유통시 책정된 가격의 할인율은 출판 시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상에서 살펴봤듯 출판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책을 출판한다는 점, 또 해당 지역의 출판 시장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출판 제안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대형 출판사들은 아무래도 이윤 추구에 가장 큰 목적을 두고 있고, 미술관 출판부서의 경우에는 전시와 컬렉션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주제들로 출판물을 만들기는 어렵다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현실적으로 직시해야 할 부분은 영미 출판 시장이 영어권 밖 출판물의 번역 출판에 배타적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부 동력만으로도 시장이 충분히 가동되고 에너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저작물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해외 출판 저작물을 가장 적게 수입하는 곳이 영미권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른 언어권의 책을 제안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우며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서정임은 2006년부터 월간 <퍼블릭아트>, 경향 <아티클>에서 수석 기자로 일하며 창간 작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관계자들을 만나며 미술 현장을 이해해 왔다. 현재 미술칼럼니스트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