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에 실린 글의 내용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TEL 02-708-2293 FAX 02-708-2209 E-mail : weekly@gokams.or.kr
‘문화비전 2030’, 사람이 있는 문화
.지난 5월 16일 ‘새문화정책준비단’이 8개월 동안 고생 끝에 마련한‘문화비전2030, 사람이 있는 문화’(이하 문화비전2030) 정책발표가 있었다. 22차례의 준비단 회의, 6회의 분과별 현장토론회, 4회의 문체부 장관 및 실국 관계자 워크숍, 13회에 걸친 찾아가는 문화청책토론회 등 총 70여회에 결친 행사를 통해 만든 문화비전2030은 국가 문화정책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문화비전2030은 2004년에 만들어진 ‘창의한국’이래 처음으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틀을 갖춘 국가 문화정책 보고서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문화예술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블랙리스트 사태와 위계와 권력에 의한 예술계 젠더폭력을 고발하는 미투운동(Me Too movement) 이후에 발표하는 자리였던 만큼 문화비전2030은 문화정책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문화비전2030은 어떤 취지와 배경 하에서 만들어졌을까? 첫째, 진보 정부 10년, 보수정부 10년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화비전의 필요성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문화가 정치, 경제, 이념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의 기본권으로 인식되고 실천되게 하는 것이 문화비전2030을 만든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었다.
둘째,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하는 문화정책의 장기 계획이 필요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도래에 따른 노동시간의 단축과 일자리의 급변에 따른 인간소외가 예상되기 때문에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문화플랜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통일 분위기가 고조되었지만, 오랫동안 대립한 군사적 긴장관계를 완전히 해소하기까지 남북을 하나로 묶는 문화플랜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또한 인구감소와 기후변화, 에너지 소비 억제를 위한 생태적 삶을 살기 위해 문화가 사회변화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셋째, 앞서 언급했듯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와 미투운동을 성찰하는 문화정책 수립이 필요했다.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민간 중심으로 구성된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위원회에서 광범위한 진상조사를 진행했고, 그에 따른 제도개선을 위한 권고안을 발표했다. 미투운동은 오랫동안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남성 권력이 자행한 젠더폭력을 고발하고 관련자 처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 안의 블랙리스트를 거세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비전의 수립에 있어 블랙리스트 사태를 극복하고 미투운동의 의미들을 성찰하는 구체적인 실천과제들이 제시되어야 할 시점에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기본 가치와 철학에 충실한 문화비전 수립이 필요했다. 박근혜 정부가 취임사에서 강조했던 ‘문화융성’이란 구호는 허구적 기표에 불과했을 뿐, 결국 그것은 검열융성으로 귀결되었다. 문화의 기본 가치가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다. 문화가 경제발전과 사회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표와 함께, 문화의 고유한 가치들이 사회 안에서 구현될 수 있는 기본 문제의식이 절실하다는 점이 문화비전2030을 만들게 된 배경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문화비전이 제시하는 3대 가치와 방향을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문화비전의 3대 가치는 자율성, 다양성, 창의성이다. 이는 ‘문화기본법’ 제2조의 조항을 참고했다. 문화기본법 제2조는 “이 법은 문화가 민주국가의 발전과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임을 인식하고, 문화의 가치가 교육, 환경, 인권, 복지, 정치, 경제, 여가 등 우리 사회 영역 전반에 확산될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그 역할을 다하며, 개인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받지 아니하도록 하고, 문화의 다양성, 자율성과 창조성의 원리가 조화롭게 실현되도록 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한다.”로 되어 있다.
자율성은 개인의 자유로운 문화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자율성은 스스로 문화의 주체가 되고, 다양한 문화취향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지향한다. 다양성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이 차별받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적 힘을 펼쳐나가는 것을 말한다. 국적·인종·종교만이 아니라 세대·성·성차를 아우르고, 나아가 예술의 크고 작은 집단들이 서로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는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창의성은 단지 문화콘텐츠를 육성하는 산업 역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혁신하는 데 있어 문화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의 창의성은 교육·복지·도시재생·통일 분야에서 문화가 사회발전과 혁신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문화의 3대 가치는 ‘개인의 자율성의 보장’, ‘공동체의 다양성의 실현’, ‘사회의 창의성 확산’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문화비전의 3대 가치와 방향을 기초로 9대 의제를 설정했다. 3대 방향에 따른 9대 의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대 방향 | 9대 의제 |
개인의 자율성 보장 | 개인의 문화권리 확대 |
문화예술인/종사자 지위와 권리 보장 | |
성평등 문화의 실현 | |
공동체의 다양성 실현 | 문화다양성 보호와 확산 |
공정하고 다양한 문화생태계 조성 | |
지역 문화분권 실현 | |
사회의 창의성 확산 | 문화자원의 융합 역량강화 |
미래와 평화를 위한 문화협력 확대 | |
문화를 통한 창의적 사회혁신 |
‘개인의 자율성 보장’의 대표과제는 개인의 문화적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 향수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초등학교 입학 시에 가족과 함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첫걸음 문화카드’ 지원과 집 가까운 동네에서 문화여가를 즐기는 ‘문화놀이터’ 사업, 그리고 생활예술을 전면적으로 확대하는 ‘나도 예술가’ 프로그램이 눈에 띤다. 문화예술인/종사자 지위와 권리 보장에는 가칭 ‘예술인지위와 권리에 관한 법률’제정, 예술인 사회보장을 위한 고용보험 실시 등이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었다. ‘성평등문화 실현’은 당초 의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그 중요성을 고려하여 새로운 의제로 합류했다. 성적 위계에 의한 차별을 개선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이 문화예술계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공동체의 다양성 실현’에서 제시하는 의제는 ‘문화다양성 보호와 확산’, ‘공정하고 다양한 문화생태계 조성’, ‘지역 문화분권 실현’이다. 문화다양성 보호와 확산을 위해 문화다양성 실태조사, 사라져가는 언어와 전통문화의 보호, 그리고 관광과 체육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확대하는 과제들이 제시되었다. 또한 공정하고 다양한 문화생태계 조성을 위해 표준계약서의 의무화, 문화콘텐츠 유통불공정 행위 해소, 공정한 스포츠문화 환경 조성을 할 계획이다. 지역문화분권의 현실화하기 위해 문화도시 50개 선정, 매력적인 지역관광도시 선정, 협치를 위한 지역문화협력위원회 설립 등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사회의 창의성 확산에는 4차산업 혁명에 대비하는 융합적인 문화자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창의적인 예술교육과 문화 R&D 확대 등을 제시했고, 미래와 통일을 위한 문화협력을 확대하고자 ‘남북문화교류 협정체결’, ‘남북문화동질성회복 프로젝트’ 등을, 문화가 사회혁신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도록 일상과 삶이 통합되는 문화지대 조성, 창의적인 혁신학교 설립, 창의적 문화일자리 확대 등을 제시했다.
문화비전2030은 문화정책의 분과 중심주의에서 문화의 통합적 역할과, 가치 지향적 의제를 발굴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성평등 문화의 중요성을 부각하여 젠더평등이 문화의 영역에서 실현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문화비전2030은 문화가 사회의 다른 영역에 어떻게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담고 있어, 앞으로 문화정책이 다른 관계부처와 협력해서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문화정책은 문화정책의 혁신과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편이다. 특히 문화정책이 경제정책에 종속되어서는 곤란하다. 경제논리에 종속되지 않도록 문화정책의 새로운 발상전환이 필요한데, 가령 돈을 써야 할 것과 돈을 벌어야 할 것에 대한 장기적인 기획과 전략이 요구된다. ‘문화비전2030’은 거듭 강조하듯이 블랙리스트 사태와 미투운동을 성찰, 극복하면서 우리 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존중하고 사람의 창의적인 역량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이동연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이고, 문화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새문화정책준비단 단장과 서울시 문화시민도시 정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또한 서울아레나 MP와 플랫폼창동61 총괄예술감독,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공동조직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론, 정책, 기획을 아우르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연구자로서 <문화자본의 시대>, <문화연구의 종말과 생성>, <예술@사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