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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산업화 연대기, 예술이 가야 할 길은?
김혜준 영화진흥위원회 공정환경조성센터장예술은 현재 큰 파도 앞에, 혹은 파도 위에 놓여있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여전히 표류 중이지만, 이것의 해결이 향후 예술 현장에 미칠 영향은 적지 않다. 지원제도 개선 논의는 중앙정부부터 지자체 문화재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이야기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모델은 나오지 않고 있다. 최근 서울문화재단 사태는 온라인에 ‘시장실패’라는 단어가 다시 회자되게 했지만, 정작 ‘시장 성공’을 위한 방법이나 ‘시장을 넘어선 상상력’ 어느 것도 후속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민주주의, 협치, 자치권 등의 사회운동 과제와 지속가능성이라는 경제적 이슈가 하나의 큰 파도를 만들고 있는데, 이 파도 앞에서 예술은 어디로 물살을 가를 것인가?
영화는 기초예술 영역보다 일찍 사회운동 과제와 자본 축적을 통한 산업화 과정을 지나왔다. 복제 가능성이라는 매체 특성의 차이를 고려하면 딴 동네 이야기일 수 있지만, 영화도 한때 영세함을 넘어서기 위한 고군분투를 거쳤다. 그 과정에서 혹 지금의 예술씬에 도움이 될 경험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김혜준 공정환경센터장을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운동사이자 산업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영화 신(scene)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포괄적인 질문을 먼저 보내드렸다. 영화 씬(scene)이 지나온 길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 설명을 부탁드린다. 개인적 이야기와 좀 중첩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80년대에 광주와의 연관 속에서 공연예술, 연희 등의 작품을 경험하고 그 길에 대해 고민한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갔다 오고, 조금 철이 든 후에 문화 운동을 시작하다 보니, 뭐가 더 효과적일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영화와 공연 분야 중 고민하다가, 파급력과 효과성을 생각해 영화가 나을 것 같다고 결론을 지었다.
당시 영화 운동이라는 것은 1988년을 거치면서 시작된 *‘직배 반대 투쟁’과 이후에 이어진 스크린쿼터 감시단 활동이었는데, 감시단 활동이 영화 정책과 관련된 본격적인 나의 출발점이었다. 달랑 세 사람이 감시단을 만들어서 열심히도 현장을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스크린쿼터 감시만으로는 안 되는데 하면서, 검열 철폐 등 (정책을) 금방금방 디자인하던 시기였다. 복잡계가 아니었다. 명쾌했다.
* 직배 반대 투쟁: 국내 배급사에 의한 제한적 외화 수입에서 해외 영화사의 직접 배급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문화 산업을 개방하는 것에 대해 국내 영화계에서 진행된 반대 투쟁
요약해 보면 8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던 할리우드 영화 직배에 대한 반대 투쟁이 90년대 중후반까지 관통하고 있었는데, 이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국 영화가 망가질 것이냐 아니면 살아날 수 있느냐를 고민하던 세대들이 영화로 보여 주고 정책으로 보여 주고 조직화로 보여 주고 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1992년 개봉한 기획 영화 <결혼 이야기>는 영화 제작 시스템의 변화를 보여 주는 작품이었고 동시에 지금의 천만 영화의 맹아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세대들이 한국 영화의 내발적 가능성을 만드는 가운데,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 같은 외부로부터의 세례, 할리우드 개방 앞에서의 절박감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한국 영화가 산업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방금 언급한 ‘독일문화원과 프랑스문화원에서의 세례’란 무엇인가? 검열이 있던 시기였기에 검열을 통과한 영화만 볼 수 있었고, 그게 기껏해야 할리우드 영화나 홍콩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는 보면서 배우는 것이지 않나? 책에는 *고다르가 어쩌고 하는데 그걸 봐야 하지 않겠나? 그러던 시절에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은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해방구였다. 그곳에서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만들어 봐야겠다’고 창작을 위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준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 고다르: 장뤼크 고다르(Jean Luc Godard).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영화감독.
그런데 외국 문화원이 정책까지 이식해 주는 것은 아니다. 정책은 참고할 자료를 보고, 또 우리의 상황이라는 현실의 고민을 바탕으로 찾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어떻게 하나?’ 이런 질문 속에서 여러 채널을 통해 자료를 확보하고,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 그쪽 사람들을 실제로 불러와서 한 수 배우면서 빨리 따라 해 보고, 뭐 그렇게 했었다. 이것저것 참조하면서 열심히 조합하고 했는데,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혹자가 보기에는 너무 거칠지 않나 싶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을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러면서 국회에 가서 다른 나라에도 이런저런 사례가 있다고 들이대면서 현실을 만들어 가던 시기였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를 보면 영화계는 산업도, 제도도 자리 잡지 않은 미분화 상태에서 순식간에 산업으로 달려온 것 같다. 그런데 당시가 명쾌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니 작품도 만들고, 제도도 만들고, 검열과도 싸우고,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이 선명했다는 것인가? 맞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해야 하는 팔방미인의 활동가이기를 선택했고, 실제로도 모든 것들을 다 했다. 한편에서는 영화를 만들고, 한편에서는 이론 작업도 하고, 제도와 투쟁하기도 했다. 직배 반대 투쟁을 우리 세대가 주도했기 때문에, 그 후속 활동에 해당하는 스크린쿼터 감시단, 법 개정 및 제정 작업 등도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였던 우리가 주도할 수 있었다. 청년기였고, 피곤한 줄 몰랐고, 뭔가를 하면 되기도 하고, 그런 시기를 보냈다. 경제 성장이 압축적으로 일어나듯 우리들의 영화 활동도 무척 압축적이었다.
이슈를 굵직하게 구분해 보면 할리우드 직배를 이겨 내고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제도적 토양을 만드는 것이 하나 있었고, 그와 뗄 수 없는 것으로 검열 철폐가 있었는데 이것이 영화진흥법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거버넌스를 바꾸는 과제도 있었는데,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한 영화진흥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들을 푸는 과정에서 김대중 전 후보를 잘 만난 것도 한몫했다. 투자조합이라는 모델을 만들어서 한국 영화의 자본 토대를 안정화시키고 간접지원 생태계를 구축한 것도 이런 작업 중 하나였다.
영화 발전에 발목 잡고 있던 다양한 정책 장벽을 풀어 나갔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스크린쿼터 도입, 검열 철폐, 투자조합 결성 등의 활동과 보조를 맞춰서 작품으로 승부를 걸 만큼 한국 영화의 내적 창작 역량은 성숙해 있었나? 정책과 산업화는 기획적으로 접근한 것이고, 실제로 정책이 도입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 활용해서 개화를 시킬 수 있는 창작 역량은 내부적으로 상당히 성숙해 있었다. 때마침 정부가 사고를 치면서 영화계가 각성할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93년에, 법에 명시된 한국 영화 상영일수 146일을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일 경감해 주는 일이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인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정부를 상대로 한판 격돌을 벌였다. 그러면서 또 한 축에서는 <결혼 이야기>, <미스터 맘마>와 같은 작품들이 기획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 주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금융실명제라는 또 다른 결정적 계기가 등장했다. 금융실명제의 등장은 영화 배급망을 중심으로 형성된 불투명한 토착 자본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대기업이 영화 투자에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들 대자본은 1988년 이후에 등장한 젊은 세대를 파트너로 택했는데, 이것이 영화판에서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촉진했다.
1987년부터 시작해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영진위가 구성되고, 검열이 사라지는 시기까지 10년 남짓이었다.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영화판이 완전하게 바뀐 시기였다. 외국으로부터의 문화 콘텐츠 수입은 문화계 전반의 고민이긴 했지만 다른 분야에 비해 영화계는 명운이 걸려 있었다. 사람이나 작품이 움직여야 하는 다른 예술 장르들에 비해 필름만 가져오면 되는 영화는 콘텐츠의 이동 자체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압력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환경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작품을 잘 만들어야겠다는 자성도 하고, 동시에 정부에게 방해하지 말고 도와 달라고 설득하고, 제도도 만드는 등 내부적 노력이 동시에 작용했다. 포기하거나 극복하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다행히 포기하지 않았고, 관객들도 좀 반응해 주고, 그러니까 정책도 호응해 줄 수밖에 없었고, 뭐 그런 식으로 된 것이다.
기초 예술에 대해서는 흔히들 시장실패라고 한다. 자본이 작동하지 않는 공간인 것이다. 영화는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에 대한 이해가 생겼을 것 같은데, 자본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속성에서 벗어나 있는, 어찌 보면 기초 예술과 비슷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의 처지는 어떠한가? 독립영화, 예술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2018년 기준 4%, 한국 영화로 좁히면 0.5%다. 하지만 영화를 즐기는 미디어가 다양해지면서 영화관 스크린 점유율 기준은 비록 4%로 찍히지만, IPTV나 커뮤니티 시네마 같은 곳에서 생활 문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나름 소비되고 있다. 그런데도 위기인 것은 사실이다. 영진위의 활동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쪽으로 과감하게 무게 이동해야 한다는 고민도 있다.
어쨌든 독립영화는 새로운 인력을 배출해 내는 구조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예전처럼 도제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독립영화적인 방식으로 그냥 열심히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상업 영화도 해 본다. 그러다 또 쉬는 시기가 오기도 하고, 다시 돌아와서 작은 영화를 하기도 한다. 상업 영화 신(scene)과 예술영화 신(scene)이 단절되어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잘나가는 감독들이 후배들을 위해서 제작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박찬욱, 봉준호 같은 감독들은 자본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다 보니 후배들을 위해 자진해서 제작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자본은 기회비용을 발생시키려 하지 않고, 예측 가능성을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아주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이 상업 영화에서는 나오기 힘들다. 물론 포트폴리오 관리 차원에서 일부 예술 작업에도 투자하지만, 매몰비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패키지 딜(Package Deal)을 한다. 예를 들어 감독에게 예술 작업을 하면서 상업적 작업도 묶어서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좋은 영화가 발견되는 부수적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자본의 속성은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려는 것이고, 기회비용은 최대한 이전하는 것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영화계는 근대(modern)를 확실히 거쳐 온 것 같다. 자본화, 산업화 등의 단계를 어떤 식으로든 거쳐 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넷플릭스 제작 영화 같은 뉴미디어의 도전이 있지 않나? 영화계가 고민하는 근대 이후에 대한 준비는 무엇인가? 새로운 유통망이라 불리는 넷플릭스의 등장이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국제 영화제에서 넷플릭스가 <로마>와 같은 작품으로 기존 영화계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은 일종의 인정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영화관이 뭐냐?’는 식의 질문도 던지는 것이다. 과거에는 영화관을 ‘영화 궁전’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영화 상영 이후에는 사교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멀티플렉스는 오로지 돈을 잘 벌기 위한 방식으로 최적화되어 있는데, 과거 영화 궁전으로서의 영화관과 비교한다면 멀티플렉스나 IPTV나 넷플릭스가 본질에서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어쨌거나 영화는 산업화되었다고 해도 자본에 완전히 착취당해서 신(scene)을 떠날 정도로 소진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소수를 제외하고 대박으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닌 적정한 수준의 행복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속 가능성도 있고 또 일정한 회복력도 있다.
적정 행복도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공연예술이나 기초 예술에서도 가능할까? 개인적으로는 공연예술을 사회적 경제와 결합시키는 것이 불가피한 문제라고 본다. 동시다발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지역, 생활, 예술가로서의 삶을 결합하려는 노력에 힘을 쏟는 것이 산업화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의 문화예술 거버넌스가 바뀌어야 한다. 어찌 되었든 그러한 거버넌스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그 위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과 결합하는 방식, 프리랜서 협동조합 방식 등등 다양한 형태의 고민을 치열하게 해야 한다. 지속 가능성을 위한 모색에서 공공지원과 독자 생존이라는 양극 사이에서만 맴돌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지들을 몇 개 더 만들어야 한다.
영화 쪽에서 커뮤니티 시네마 같은 활동이 그런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성공 모델을 보면 사회적 경제 조직과 결합해서 관객을 조합원으로 만들고, 공연장, 사교장, 퍼브(pub) 역할을 동시에 하는 복합공간으로 자생적인 생활문화센터를 조직하는 시도들이 있다. 이런 대안적 방식을 열심히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지역의 낡은 구조로 인해서 가능성 있는 젊은 친구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새로운 기회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서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게 하는 작업을 공공 부문이 해야 한다. 가야 할 길이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김혜준 센터장은 뉴미디어의 등장이 놀랍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엔드게임>과 같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는 영화들과 트랜스 미디어 환경을 넘나들며 그런 세계관에 환호하는 팬덤 소비자 현상 앞에서 한국 영화는 또다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독한 겨울을 한 번 이겨낸 노하우가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자산이다.
공연예술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우리에게는 어떤 경험적 자산이 있을까? 2시간 남짓한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면서, 그와 나눈 대화 속에 예술 영역에서의 가난함과 그로 인한 영화 '산업'에 대한 부러움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마음이 스스로 부끄러워 지금의 예술 현장에 대한 고민의 끈을 다잡게 된다.
설동준은 학부 때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후 아무 관련 없는 예술 분야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서른 살에 국악 단체에서 기획 및 단체경영 업무로 예술업에 발을 들였고, 현재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예술, 과학기술, 신학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공학을 전공하면서 사람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생활문화, 인력양성, 문화예술교육 영역에 대한 연구 및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