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에 실린 글의 내용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TEL 02-708-2293 FAX 02-708-2209 E-mail : weekly@gokams.or.kr
남아공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 문화 현상과 쟁점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은 주지하다시피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공의 인종분리 법과 정책)로 인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나라이다. 1948년에 시작된 이 제도는 1990년부터 관련 법률들이 폐지되면서 1993년 유색인종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고, 결국 1994년 넬슨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면서 종결되었다. 그런 점에서 남아공의 모든 정책은 1994년을 기점으로 새롭게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의 치유와 회복의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Post Apartheid)로 불리는 1994년 이후 지금까지의 상황은 무척 지난해 보인다. 지난 5월 8일 총선 결과 집권당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가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역대 최저 득표율이라는 오명과 그동안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책임도 큰 부담이다. 가난과 불평등이 여전한 가운데 과연 문화가 어떤 역할을 해줄지를 생각한다면, 남아공의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본격적인 정책 분석은 아니지만, 필자가 연구년을 계기로 47일간 남아공에 머물면서 지낸 경험과 함께 단상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남아공은 무지개의 나라를 표방하고 있다. 남아공의 미래를 모든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다양성 속에서 통합(union)을 이루겠다는 취지다. 남아공은 11개의 공식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Afrikaans, 네덜란드 출신 이주자들의 후손이 독자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만들어 낸 언어) 외에 여러 부족들이 사용하는 코사어, 줄루어, 소토어, 은데벨레어 등이 포함된다. 실제로 월드컵 개막식 당시 5개 언어로 조합된 남아공 국가가 연주되었고,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헌법의 언덕(Constitution Hill)’에 가면 남아공 민주주의의 상징인 헌법재판소가 있는데, 정문 벽에는 헌법재판소 이름을 11개 공식 언어로 적고 있다. 또 지난 4월 26일에는 포트엘리자베스(Port Elizabeth)에 있는 넬슨 만델라 대학교에서 원주민 언어로 논문을 작성한 학생들의 박사학위 수여식과 학술대회가 개최되었고, 문화부장관이 참석하여 언어 정책을 천명하기도 했다.
언어 다양성은 정체성의 문제이자 인류의 풍부한 자산이지만, 근저에는 남아공이 지향하는 ‘탈식민’과 ‘아프리카성(Africanness)’의 회복이라는 실천적 맥락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화 다양성은 결코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유럽에서 문화 다양성이 나오게 된 배경도 다르지 않다. 근대화에 따른 식민주의와 값싼 노동력 유입으로 빚어진 문화의 차이와 차별, 그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남아공의 경우는 정말 오래 되었고, 훨씬 처절하다. 가깝게는 남아공 번영을 촉발했던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것이고, 더 멀리 가자면 17세기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실시한 노예 제도로 인한 것이다.
케이프타운은 도시의 아름다움과 명성과는 반대로 노예 제도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1658년부터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이곳은 미국으로 가는 외국인 노예를 태운 배까지도 정박하는 도시였다. 동인도회사는 1679년에 노예를 수용하기 위한 건물을 지었고 무려 1807년까지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부족한 노동력을 충족하기 위해, 그리고 아시아 무역을 위해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노예를 포획하였고, 그래서 늘어난 노예들을 수용소 근처에 마을을 만들어 수용했다. 여기가 지금의 보캅(Bo Kaap, ‘케이프 언덕 위’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구역이다. 특히 보캅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의 이주민이 많아 무슬림 지역이 되었다. 노예 수용소였던 건물은 이후 건물의 기능이 바뀌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1998년에 노예박물관(Slave Lodge)으로 재탄생하였다. 박물관에는 아프리카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모이면서 형성된 문화 다양성에 대한 전시가 큰 비중을 가지고 다루어져 있다.
다른 한편 영화 <디스트릭트 9>에 영감을 주었다는 케이프타운의 ‘디스트릭트 6’(이하 D6) 구역도 마찬가지다. D6는 유색인종 노예와 노동자, 장인들이 살던 곳으로 노예박물관 바로 아래에, 그리고 항구 가까이 위치한 중심가에 있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이곳을 백인 구역으로 정하면서 거주민들을 모두 황폐한 곳으로 쫓아버렸다. D6 공동주택에 무려 5만 5천여 명이 살았고, 비록 가난한 지역이었지만 그들의 풍부한 문화 다양성으로 뮤지컬과 연극, 시, 소설, 재즈 음악 등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D6박물관이 생겼고, 여기에는 당시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결국 문화 다양성은 노예의 문화로부터 형성되었던 것이고, 그런 점에서 밑으로부터의 문화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문화 다양성이 자리하는 데는 아마도 시간이 더 걸릴 듯싶다. 남아공에는 여전히 백인 구역과 흑인 구역이 나뉘어 있다. 요하네스버그나 프리토리아의 경우 시내 중심은 흑인 구역처럼, 그리고 백인들은 시내와 떨어진 곳에 그들만의 저택과 쇼핑몰, 문화시설을 구비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의 로즈뱅크(Rosebank) 구에는 최고급 상업 갤러리들이 모여 있고, 그중 미술관급의 Circa 갤러리는 ‘Thirty Keyes’라는 이름의 아파트 분양을 포함한 예술 구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립 문화예술기관은 경쟁력이 높고, 당연히 관람객은 백인 중심일 수밖에 없다. 케이프타운에서 2018년 문을 연 노벌 재단(Norval Foudation) 미술관이 그렇고, V&A 워터 프론트 회사가 투자를 해서 만든 자이츠 현대미술관(Zeitz MOCAA)이 그렇다. 물론 자이츠미술관은 공립의 위상을 갖지만 민간 자본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른 출발점을 갖는다.
그리고 최하위층 흑인들의 집단 거주지 타운십(township)이 있다. 도시마다 예전의 타운십이 존재하는데, 규모는 각기 다르지만 필자가 가 본 포트엘리자베스의 뉴 브라이튼(New Brighton)은 주민 숫자가 30만 명에 육박한다. 물론 중산층 이상의 흑인 부유층도 일부 같이 살고 있으며, 환경 개선을 위해 학교와 병원 등의 시설을 짓고 있다. 하지만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여기에 있는 레드로케이션(Red Location) 박물관이다. 타운십 개선을 위해 박물관을 건립했지만, 운영 7년 만인 2013년에 문을 닫아 지금까지 폐쇄 상태다. 거주민들이 타운십의 전기와 물 공급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하고, 전시품을 훼손하는 등의 소요가 벌어진 결과이다. 우버를 타고 박물관에 가보았지만, 여기는 우범지대로 분류되어 차에서 내리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레드로케이션 박물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야심 찬 박물관이자 가장 불행한 박물관이다. 그리고 문화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슈를 제기한다.
‘레드로케이션’은 정부의 주택 정책을 말한다. 그리고 1994년 이후 정부의 정책 기조는 모든 정책이 국가 재건과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고, 문화정책 역시 분명하게 그런 입장을 전제한다. 그 결과로 박물관이 들어섰지만 결과는 실패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패한 것일까? 여기서 실패한 것은 ‘제도’로서의 문화이다. 남아공에서 제도로서의 문화는 식민시대의 산물이다. 오페라하우스, 극장, 콘서트홀, 박물관·미술관은 건물이나 프로그램, 컬렉션 등에서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그곳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일상에서 이미 문화를 만들며 살아간다. 기쁜 일이 있으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춤추며 노래한다. 누구도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다들 훌륭한 예술가들이다. 심지어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감옥 안에서도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담요로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시위를 할 때도 그들은 춤을 춘다.
결국 앞서 문화 다양성의 형성 과정에서 제기된 이슈가 다시 돌아오는 셈이다. 타운십에는 문화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이미 그들의 문화가 있는데도 제도로서의 문화를 (탑다운 방식으로) 억지로 꿰어 넣으면서 실패한 것은 아닐까?
남아공 문화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SACO(South African Cultural Obsevatory)가 있다. 문화부 소속이지만, 연구 주체는 포트엘리자베스에 있는 넬슨 만델라 대학이 컨소시엄으로 구성한 학자와 전문가들이다. 3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데 넬슨 만델라 대학이 2회 연속 연구를 맡고 있다. 여기에는 저명한 문화경제학자인 로즈(Rhodes) 대학교의 스노볼(Jeanette Snowball)교수가 책임연구원을 맡으면서 전반적인 남아공의 문화예술자원을 창조산업으로 활용한다는 기조에 동의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연구진은 정부가 너무 쉽게 문화를 도구화하는 데에 강한 우려를 갖고 있다.
동시에 정부의 문화정책 플랜은 계속 개진되는 상태다. 대내외적으로 의견 수렴과 정책적 타당성을 고려하여 시간을 두고 계획을 수립하는 모습이다(포괄적 문화정책 계획은 현재 4차 수정작업 단계). 그 가운데 지역문화정책은 완료되었는데, 특히 지역문화예술 진흥을 통해 지역의 사회·경제 발전과 지역의 교육 및 관광, 소규모 비즈니스 형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지역 문화기획자를 만나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보조금 경쟁과 그에 따른 협회들의 부패가 심각하다고 한다. 이는 문화 영역 전문 인력의 자질이나 정부의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이 가장 큰 요인임을 지적한다. 실제로 국립 박물관·미술관은 전시와 소장품 관리에 그치고 대부분 자체 출판물이 없다. 특히 프리토리아 미술관은 남아공 현대미술의 우수성에 비추어 볼 때 미술관 관리와 운영이 거의 방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남아공의 문화예술 현장은 엄청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아프리카 현대 예술에 대한 발견이 그렇고, 문화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얻게 된 점도 그러하며,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 세대를 위해 문화의 역할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도 그렇다. 특히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예술가들을 접할 때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한다. 남아공은 네이딘 고디머(Nadine Gordimer, 1991년 수상)와 존 맥스웰 쿠체(J.M. Coetzee, 2003년 수상) 등 두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그 외에도 아톨 푸가드(Athol Fugard), 앙드레 브링크(André Brink) 등의 대가들도 있다.
남아공 체류 말미에 케이프타운에서 두 개의 공연을 보았다. 하나는 대지를 빼앗긴 남아공 역사를 다룬 댄스 시어터였고, 다른 하나는 푸가드의 연극 <나의 아이들, 나의 아프리카!>였다. 모두 훌륭한 작품이고, 공연 역시 높은 수준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것은 흑인과 백인 학생들이 같이 어우러져 관람하는 모습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어땠냐고 묻자 “우리는 함께 살고 있고, 그래서 의미 있게 봤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흑인 학생들은 스쿨버스에서 음악을 틀고 거리에서 신나게 춤을 추지만, 백인 학생들은 조용히 승차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른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박신의는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와 문화예술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문화예술정책, 박물관 경영 관련 연구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서울시, 청주시, 부천시를 비롯한 지자체에서 정책자문 활동과 함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 한국문화예술위원, 인천문화재단 이사, 서울문화재단 정책위원회 위원장, 중소기업중앙회 문화경영특별위원, 외교부 자체평가위원,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한 학기 연구년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쳐 유럽에 체류 중이다.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