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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바가 뒤섞이는 생각하는 바다
지역, 민간, 자생 3중고 속 공간플랫폼 전략‘생각하는 바다’는 부산의 광안리 해변과 요즘 핫하다는 민락수변공원 사이쯤에 있다. 이곳은 바다를 매립해 만든 땅에 건물들이 들어선 곳으로, 예전에는 실제 바다였다. 횟집이 밀집되어 있는 활어회센터에서 걸어서 5분이면 닿는데 주변은 수산물 도매 가게들이 즐비한 다소 엉뚱한 곳에 위치해 있다. 유동인구가 적은 길목인데다 지하이기까지 해서 광안리 근처라는 이유로 특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순전히 인연과 우연에 의한 것이다. 이 공간에서 먼저 인문학, 와인, 음악 살롱 역할을 해 왔던 ‘카페 나다’를 운영해 오신 선생님의 전화 한 통으로 인수를 결정했다. 생각하는 바다를 찾는 분들 중에는 이곳이 노래방이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다. 비록 광안리 해변의 특수는 못 누려도 이곳은 바다였고, 노래방이었으며, 카페 나다였고, 지금은 생각하는 바다다. 카페 나다에서 물려받은 물건 중에는 노래방 기계가 있어 가끔 노래방으로 변신이 가능하고, 스타일과 내용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살롱의 기능을 하고 있어 우연히 겹친 것 치고는 이 장소의 역사가 어떻게든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전화를 받고 덜컥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또 전화를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간의 상을 그리며 하나둘 채워갔다. 혼자의 상상이 아니라 함께 모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들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공간이 탄생했다. 이름에서도 유추되는 바와 같이 생각하는 바다는 과정 중심, 참여하는 주체들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플랫폼이자 공간이다.
우선 이 공간은 70평이 넘는 규모에, 구조적으로도 홀과 그 밖에 몇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역에서 개별 주체들이 고군분투하는 방식의 한계를 너무 자주 목격했던 터라, 자원을 효율적으로 공유하는 플랫폼이 절실하다 생각했고 공유 오피스를 고민하게 되었다. 지역 주체들이 지속성과 현실적인 기반을 만들어가는 데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각자의 공간을 마련하는 등의 초기 비용, 공간을 포함한 운영의 비용, 판로 개척 등을 개별 단체가 추진하기에는 여러모로 벅찬 경우가 많고 어렵게 시작하더라도 시행착오를 겪느라 많은 시간과 비용을 쓰게 된다.
생각하는 바다는 이런 어려움을 물리적인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것과 더불어 느슨하지만 공동의 브랜드를 구축함으로써 상생을 도모하는 공유 오피스이다. 공간의 공유를 통해 비용을 줄일 뿐 아니라 출판, 디자인, 서점, 사진과 영상, 기획 등 서로 거래 가능한 품목을 지닌 주체들 간의 거래 활성화를 통해 상생과 더불어 각 단체의 지속 기반을 만들고자 했다.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주체들의 형태도 주식회사 법인, 개인사업자, 비영리 법인, 개인 등 형태가 다양한데 회계, 가능한 지원과 세재혜택 등 다양한 정보 공유나 참조의 지점이 생겨나고 있다.
비용을 줄이고 정보를 공유하고, 각자 거래 가능한 품목을 거래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공동의 브랜드를 구축할 뿐 아니라 덤으로 30~40명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홀 공간을 확보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강좌든 세미나든, 네트워크든, 파티든 필연적으로 사람들이 만나고 모이는 프로그램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문화영역에서 자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상의 여지를 확대하는 큰 창구가 된다. 공간에 입주해 있는 주체들의 필요에 따라 커뮤니티 프로그램이나 워크숍부터, 정책 관련 세미나, 교육 프로그램, 북토크나 파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다소 주제를 넘나드는 다양한 일들이 열리다 보니 대관 요청도 종종 온다.
여러 실험을 해볼 수 있는 홀을 확보한 김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논의하다가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일단 함께 입주 출판사의 경험과 정보 등을 바탕으로 재미난 콘셉트의 서점을 상상할 수 있었다. 생각하는 바다라는 이름과 어울리게 ‘어부들’이라 이름 지은 서점을 홀 한 켠에 구성했다.
고기 어(漁) 자가 아니라 말씀 어(語) 자를 쓴 어부(語夫)들이다. 매대도 어종으로 구성했는데 청어(靑語)는 ‘미래의 주인공들을 위한 책’, 전어(田語)는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책’, 광어(狂語)는 ‘미쳐서 아름다운 책’, 장어(壯語)는 ‘우리 모두를 위해 싸우려는 책’, 홍어(紅魚)는 ‘빨간책’, 방어(方語)는 ‘지역을 알아갈 수 있는 책’, 민어(民語)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 등으로 발칙하게 큐레이션 되어 있다.
그리고 공간의 특징을 한번에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1년간 책장을 분양하는 공유책장을 만들게 되었다. 책장 한 칸을 1년간 분양받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책 등을 각자가 알아서 꾸미고 가꾸면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꺼내 읽어볼 수 있도록 공유하는 책장이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50개 가까운 책장은 빠른 시간에 분양이 완료되었다. 분양받으신 분들의 삶이 바빠 8개월이 지나도록 채워지지 않은 책장도 여럿 있지만 땅을 보며 땅 주인의 삶을 짐작하듯 이것도 공유책장이라는 참여형 프로젝트의 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입주 출판사와 협력해서 어부들 서점의 분류체계와 공유책장의 특징을 활용해서 저자와 독자, 독자와 독자가 만나 소통할 수 있는 책을 기반으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프로그램도 현재 운영 중이다. 특히 ‘예술가의 책장’이라거나 ‘메모가 있는 책장’처럼 공유책장의 주인들 중 직업이나 책 읽기 습관이 비슷한 사람을 묶어 책장의 주인과 주제가 궁금한 독자와 독자가 만나는 프로그램은 책을 매개로 한 문턱 낮은 커뮤니티 프로그램이다. 나아가 지역에서는 이례적으로 출판 편집자 양성과정(호모 에디투스)까지 출판사가 지원을 받아 진행하고 있어 커뮤니티 프로그램부터 전문성을 담보하기 위한 프로그램까지 책과 관련한 다양한 층위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문화 현장의 흐름을 보면 새로운 주체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돌볼 겨를도 없이 각자의 프로젝트 실행에 골몰하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각자는 고군분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함께할 수 있는 동료도 협력의 여지도 점점 줄고 결국 도시를 상상하는 힘도 그만큼 쪼그라들고 만다. 생각하는 바다를 만들면서 커뮤니티와 문화살롱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다.
예를 들면, 지난 연말 책 한 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정산’, 마감 전 홀로 외로이 기획서를 쓰는 기획자들을 위한 밤샘 ‘심야의 기획자’를 시작으로 다양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또 시도하고 있다. 음식과 키워드로 삶의 사유를 나누는 철학반찬은 직접 육수를 우려내는 등 정성스런 음식 탓인지 꾸준하게 인기가 있다. 4시간 가까이 시집을 소개하고 좋아하는 시를 낭독하고 직접 시를 쓰기까지 하는 시하드트레이닝데이 ‘시밥클럽’과 활동가 육아클럽에서 함께 그림책을 만드는 ‘그린북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음반 리뷰 커뮤니티 ‘슬기로운 음악생활’, 직접 곡과 가사를 써서 노래를 만들어 광안리에 버스킹을 해보는 자작곡 워크숍 ‘MAKE MY MUSIC‘ 음악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장르나 주제 중심의 커뮤니티부터 직업, 나이, 이름 등 사회적 맥락을 걷어낸 익명 커뮤니티까지, 세부적인 진행 방식에도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문화예술 현장을 진단하면서 지역에는 구매력이 없다거나, 생산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한 도시에서 문화생태계의 건강 정도를 체크하고자 한다면 문화 관련 살롱이나 커뮤니티가 얼마나 다양하게 존재하고 활성화되어 있는지를 보면 된다. 겉으로 뭔가 화려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주체가 많은 것처럼 보여도 커뮤니티 활동과 살롱의 기능을 하는 장소나 단체가 별로 없다면 그 영광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커뮤니티와 살롱은 교류의 활발한 정도를 읽는 척도이자 문화의 자생성을 읽는 척도이기도 하다. 기왕이면 생산-소비의 순환의 고리를 만들고자 지원사업의 경우 각각의 기준에 따라 참가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 외에는 유료화를 기본으로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운영하고 있다. 비용과 시간을 써가면서 만나고 즐기는 것은 생산-소비가 이뤄지는 생태계 구축의 전조라고도 할 수 있다. 지역에서, 자생하는, 문화공간을 만드는 3중고 속에서 1년도 안 된 반쪽짜리 자생이자 성취이지만 가능성과 방향성은 충분히 확인하면서 생각하는 바다는 잔잔하게 꿈틀대고 있다.
박진명은 지역운동가와 예술가 사이의 문화기획자로, 최근 생애주기형 문화기획이라는 화두를 고민하며 활동 중이다. 생활기획공간 통 공동대표, 금정예술공연지원센터장, 생각하는바다 대표로 문화공간에 대한 실험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