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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길이 원칙을 넘어서: 정의론 관점에서 본 예술행정
예술행정가들이 말하는 예술행정①관악기 플루트가 하나 있다. 세 명의 아이들이 각각 자기가 플루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플루트는 누구에게 주어야 합당한 것일까? 여러분은 누구에게 플루트를 주어야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아이 1. 플루트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가난한 아이 |
아리스토텔레스는『정치학』에서 플루트를 멋지게 불 수 있는 2번 아이가 플루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유는 플루트라는 악기의 만들어진 목적과 용도는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고 듣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본래 목적과 쓰임이 일치하는 합목적성을 이루기 때문이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텔로스(telos)라고 불렀다. 반면, 아마르티아 센은 『정의의 아이디어』에서 ‘누가 플루트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정의(正義)의 관점 차원에서 다룬다. 1번 가난한 아이는 플루트를 가져 보기는커녕 연주해 본 적도, 심지어 들어본 적도 없다. 이 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플루트를 가지고 연주하는 법을 배워 잘 불 수 있다면 평등의 관점에서 정의로울 수 있다(필요원칙). 2번 플루트를 잘 불 줄 아는 아이가 플루트를 갖게 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그 플루트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라는 원래 만들어진 목적과 용도가 일치하게 되고 그 음악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이 또한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재능원칙). 3번 플루트를 만든 아이가 플루트를 가지는 것도 역시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 그 아이가 플루트를 만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플루트는 만든 아이의 소유다(응분원칙). 이렇게 상황과 관점에 따라 플루트를 갖게 되는 아이는 각각 다를 수 있다. 즉, 정의(正義)의 기준과 원칙에 따라 ‘정의로움’은 달라질 수 있다.1) 여기서 중요한 질문! 예술 분야에서 정의의 원칙과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가? 예술 발전을 위한 공공지원 자원의 (분배)정의는 예술행정이 결정하는가? 아니면 예술현장이 결정하는가? 예술현장은 실재적 정의의 실현을 위해 당사자성 또는 행위주체적 측면에서 당연히 그 결정 권한이 현장에 있다고 한다. 반면, 예술행정은 공적 정의의 실현을 위한 절차적 정당성과 공공성 실천을 위해 예술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담되,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결정은 행정이 담당한다고 한다.2)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은 상호 의존관계다. 예술행정은 예술현장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예술현장은 예술행정이 없이 예술 발전을 도모하기 어렵다. 상호성의 관계인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은 협력을 맺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갈등은 양자의 상호성이 불균형을 이룰 때 발생한다. 양자 간의 갈등은 주로 예술행정이 예술현장에 특정 목적과 가치를 강제하며 통제, 지배하려 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예술현장이 예술행정의 규범적 가치와 체계, 공식적 절차, 공적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요구할 때 발생하기도 한다. 최근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의 갈등을 상호성의 관계 하에 갈등해결을 모색하고 상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협치(거버넌스)와 관련한 논의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 분야의 협치는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이 수직적 위계 관계가 아닌 수평적 파트너십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협치 관계의 원칙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예술현장은 소통과 협력이 부족한 예술행정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며, 예술행정을 ‘갑’이라 한다. 반면, 예술행정은 예술현장의 다양한 요구와 문제 제기를 수용, 반영하는 적극적인 행정을 본연의 역할로 인정하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재량 밖의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와 민원제기로 인해 예술행정이 오히려 ‘을’의 입장이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서로를 갑과 을의 위계관계로 바라보는 것이다. 상호 불신이 강하다.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의 관계와 관련해 영국 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의 ‘팔길이 원칙(Arm’s length)‘이 유명하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이 정의롭다는 팔길이 원칙은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의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 다르게 이해된다. 예술현장의 예술적 자율성은 예술행정이 침해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하지만 공공 자원(예산, 공간, 인력 등)을 집행하는기 때문에 공익 실현과 절차적 투명성 등의 공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개입과 통제는 정당하다고 본다. 단, 예술현장은 예술행정이 현장의 수요와 필요를 적극 반영하여 지원하되, 실행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상호 신뢰성을 바탕으로 개입, 규제, 통제하지 말아야 할 기본 원칙으로 팔길이 원칙이 준용되기를 요구한다. 예술행정의 개입이 예술현장의 자유권과 행복추구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예술현장은 예술행정이 권위적 태도와 편의주의적 행정을 지양하고, 현장을 더 존중하는 실효적 예술행정을 펼치라고 요구한다. 나아가 예술행정의 주체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 오래된 이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의 갈등은 완전한 해소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부 들어서 분권과 자치 논의가 활발하다. 분권은 위에서 아래로, 자치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행위다. 중앙정부와 공공기관이 독점해 온 권한을 지역으로, 시민사회로 분배하는 것이 분권이고, 지역과 시민들이 그 권한을 가지고 참여, 결정, 실행하여 중앙정부와 공공기관의 역할과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자치다. 분권과 자치는 상호 관계성을 가지며, 분권과 자치가 유기적으로 선순환할 때 민주주의는 발전한다.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술행정은 분권을 실천하고 예술현장은 자치를 실현할 때, 예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협치(거버넌스)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유다.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이 협치를 통해 분권과 자치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예술진흥을 실현할 수 있다. 한편, 협치에는 조건이 있다.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이 함께 권한과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행정이 책임과 의무만 지고, 예술현장이 권리만 갖는다든가, 예술행정이 권한만 갖고 예술현장이 책임과 의무만 진다면 협치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현재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의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이에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갈등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필자의 견해는 이렇다. 우선, 상호 의존관계인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이 서로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행정은 예술현장과 사회를 매개하여 예술 지원의 사회적 당위성과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예술지원의 사회적 인식을 제고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예술현장의 수요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실질적인 지원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협력, 타협, 조정 등과 관련한 기술, 역량, 경험 등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공공성, 예술성, 효율성의 가치가 병존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그 가치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술행정의 전문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현장은 자기 예술의 실현 외에,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발명된 근대 예술4)을 사회가 체감할 수 있도록 기존 질서의 전복과 재창조 등으로 대표되는 예술의 공공성 실현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더불어 공공 자원의 집행 투명성과 책임성은 시민사회의 기본적 의무임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한 일본 사례를 공유해 보고자 한다. 다음은 예술현장의 요구를 반영한 혁신적 예술행정 사례이자 동시에 예술행정과 예술현장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공감하고 합의할 수 있는 예술행정 원칙과 기준 무엇인가? 누가 원칙과 기준을 정하는가? 예술현장은 누구의 현장인가? 예술 분야의 정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1926년 개관한 일본 도쿄도 미술관은 1975년 재개관하면서 공공성 강화라는 차원에서 전문가에 의한 전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큐레이터십을 강조했다. 도쿄도 미술관 같이 대관 공간으로 건립된 미술관들이 미술단체들의 요구에 따라 큐레이터십 운영으로 전환한 것은 전문 큐레이터가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 공공성 차원에서 더욱 적합하고 바람직하다는 논의와 인식이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이 현장의 요구와 공공성 강화차원에서 도입된 큐레이터십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공공성 강화라는 동일한 맥락에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전시가 단순히 큐레이터에 의해 전유되기보다 관람자 수요에 기반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는 ‘관람자 주권’ 논의는 역설적으로 공공성 강화라는 명목으로 큐레이터십의 축소와 폐지를 요구하게 되었다.5) |
지금 우리는 뉴딜(New Deal)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도 뉴딜 관련 사업을 한다고 한다. 필자는 뉴딜을 ‘일자리 창출 사업’으로 이해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계약’으로 이해한다. ‘Deal’은 ‘거래, 대우, 협약, 계약’이란 뜻을 가진다. ‘New Deal’은 ‘새로운 계약’ 관계를 말한다.6)
무엇이 새로운 계약일까? 참담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루스벨트의 뉴딜은 근대 사회의 탄생과 함께 등장한 사회계약, 즉, ‘국가는 개인의 재산권과 소유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개입한다’는 자유방임주의를 거부하고, 기업 규제와 증세, 복지의 확대를 통해 개인과 사회를 모두 발전시켜 나가자는 새로운 계약을 제시한 것이다.7)
사회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책임을 바탕으로 한 국가와 사회의 새로운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위한 새로운 사회 계약을 필자는 뉴딜로 이해한다. 코로나19를 통해 그 현실을 당면하게 된 첨단 신기술 발전과 심화, 기후와 생태계 위기 등의 사회,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위기 속에서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의 관계도 뉴딜, 말 그대로 ‘새로운 계약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 예술행정과 예술현장의 ‘새로운 계약’과 ‘새로운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이에 대한 논의와 실천이 활발히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1) 이 이야기는 『정의의 아이디어(Idea of Justice)』(아마르티아 센, 2019)와 『한국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김도균, 2020)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여 재구성함.
2) 관련기사 ‘전효관 사무처장, 예술 공모사업에 예술인의 자기결정권 보장 노력’ (뉴스1, 2020.2.10.)
3)「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 자료집,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2021. 3. 3.
4) 래리 쉬너(김정란 역), 『예술의 탄생』, 들녘, 2007.
5) 김세훈, 「예술영역에서 공공성의 수사학」, 『공공정책』(vol. 166), 2019.
박소현, 「일본미술관에서의 공공성 대논쟁: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2009.
6) 박지형, 『스피노자의 거미: 자연에서 배우는 민주주의』, 이음, 2019.
7) 김태일, 『국가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웅진 지식하우스, 2018.
유상진은 2000년대 초 영국에서 공부하며 ‘핫(hot)’한 창의성의 세례를 받았다. 간신히 학위를 받고 귀국 후 한국연극협회,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성남문화재단, 성북문화재단, 지역문화진흥원 등에서 창의성이 ‘갑’인 줄 알고 근무했다. 근래에는 창의성이 절대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무지를 무척 부끄러워하고 있다. 경기도청에서 문화전문관으로 ‘어공’노릇을 막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