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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아트센터의 1년,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올해로 LG아트센터가 개관한 지 만 20년이 되었다. LG아트센터는 개관 직전 겪은 혹독한 IMF 시절의 사회 경제적 불안과 더불어 새롭게 도래할 밀레니엄 시대에 대한 부푼 기대를 동시에 맞으며 3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00년 개관했다. 개관 이래 20년간 혁신적이고 참신한 기획 프로그램과 국내 처음으로 시즌제와 패키지 제도의 시행, 초대권 없는 공연장 운영, 극장 매니지먼트 시스템 개발과 데이터베이스 마케팅 시행 등 프로그래밍 면에서나 극장 운영 면에서 공연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국내 공연시장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민간 기업에서 운영하는 첫 대형 공연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이미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들에서 2,000석 규모의 클래식 전용 홀, 1500석 규모의 다목적 홀 등 여러 공연장 건설 계획을 가졌었지만 IMF를 겪으면서 그 같은 계획들을 줄줄이 취소한 사실을 알고 있던 데다, 앞서 1985년 화려하게 오픈한 호암아트홀이 영화관을 거쳐 점점 공연장 기능을 축소하는 과정을 지켜본 탓에 경제논리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민간 기업의 문화 투자에 대한 한계를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이야 강남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예술의전당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주요 문화 시설이 강북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강남은 소비와 향락의 중심지이지 문화를 즐기러 오는 곳이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래서 더욱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강남 비즈니스 타운 한가운데에 38층 오피스 빌딩과 연결된 1,000석 규모의 다목적 공연장이 2000년 3월 문을 열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공연장 운영은 전문가가 나서서 해야지 그룹 내에서 문화에 대한 식견도 없는 사람들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모기업 경영자의 마인드가 있었다는 점이다. 예술의전당에서 15년간 여러 부서를 두루 거치며 현장의 가능성과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 초대 극장장으로 개관 4년 전부터 부임하여 설계 단계에서부터 공연장 프로그래밍 방향성을 잡는 일까지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필자는 아트센터의 두 번째 멤버로 입사했다. 그전에 민간 기획사에서 겨우 일 년 반의 일천한 경험만 가지고 입사했지만 3년간의 준비 기간 덕분에 공연장이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 콘텐츠와 공연장의 아이덴티티가 얼마나 중요한지 전 세계 공연장을 대상으로 폭넓은 스터디를 진행하며 아트센터의 모습을 고민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LG아트센터가 어떤 콘텐츠를 담는 공연장이 되어야 하는지 내외부적으로 다방면에서 논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가 가진 한계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즉 예술의전당이라고 하는 국내 대표 공연장이 LG아트센터로부터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 이 극장과 경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우리 극장이 강남 비즈니스 지역 한복판, 오피스 건물의 부속 건물로 세워지다 보니 제작극장으로서 기능을 갖기에는 절대적으로 부대시설이나 설비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흥행을 목표로 하는 외부 기획사들이 결코 선호하지 않는 1,000석 규모의 애매한 객석 크기를 가진 민간극장이라는 점 등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혹은 오히려 한계를 활용해서 남들이 안 하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 이제까지는 없었지만 우리 관객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여기서 우리의 차별화 포인트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국내 공연계에서 쉽게 만나지 못했던 ‘세계적인 현대 공연예술 작품을 시차 없이 만날 수 있는 곳’이 되는 일이었다. ‘프로듀싱 공연장’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다 보니 세계의 다양한 공연을 담는 ‘프리젠팅 공연장’으로 방향을 잡았고, 대형 국공립 극장들이 하지 않았던 ‘컨템퍼러리 공연’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민간극장이기에 가능한 ‘지속성과 책임경영’ 그리고 ‘빠른 의사 결정 라인’을 장점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LG아트센터의 프로그램 기획의 기조는 ‘세계 지향, 미래지향’이 되었고, ‘세계 공연예술계의 흐름을 만날 수 있는 컨템퍼러리 공연의 장’이 되어 20년이 흐른 지금도 그 방향성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우리 극장은 사실 시즌제와 연간 패키지 제도를 국내 처음으로 시도한 곳이기도 하다. 개관 3년전에 미리 공연장 개관 준비단에 합류하여 공연장 운영과 더불어 프로그램 준비를 하다 보니 미리 연간 기획공연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프로그램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는 보다 체계적인 마케팅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다양하게 고민하고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연을 기획하다 보니 국내 처음 소개하는 낯선 예술가, 낯선 형태의 작품들이 많았고, 이 새로운 20여편의 공연들을 일일이 개별적으로 홍보해서는 도저히 판매를 감당할 수 없어 다양한 카테고리로 패키지를 엮어 판매하는 것으로 마케팅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자연스레 이 과정에서 연간 공연의 패키지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매년 같은 기조가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즌제, 패키지가 정작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즌 패키지 제도도 매년 관객들의 요구와 반응에 따라 변화를 겪어 왔다. 처음에는 장르별로 패키지를 구성하거나 기획자가 임의로 카테고리를 만들어 판매했다. 혹시라도 자유롭게 원하는 공연을 고르게 할 경우 소위 인기있는 공연들만 잘 팔릴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보고 싶어할 거라 생각했던 공연과 덜 알려진 공연을 섞어 A, B, C 등 그룹으로 공연을 구성해 판매했었다. 심지어 기획자가 생각하는 '올해의 베스트 5'같은 것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획자의 의도와 관객들의 취향이 같을 리가 만무하다. 관객들의 요구는 점점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제약이 오히려 패키지 판매를 저해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 설문과 모니터링을 통해 알게 되었고, 2006년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관객들이 스스로 패키지를 구성하도록 자유 패키지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패키지 판매가 두 배 이상으로 늘게 되었고, 우려와 달리 모든 공연이 골고루 패키지의 덕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많은 고민을 통해 만든 제도라 할지라도 결국 이는 공급자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수용자, 즉 실 사용자의 의견을 끊임없이 들어야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셈이었다.
어떤 공연장이나 페스티벌도 한두 해 정도는 시선을 끄는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다. 실제로 수많은 공연장들이 가끔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성을 가지고 프로그램의 방향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모든 공연예술 기관에는 설립 취지와 기관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 혹은 예술적 목표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당연히 한 공연장의 기획 프로그램 방향성은 이러한 핵심 가치에 따라 정해진다. 때로는 공연장의 중장기 운영 전략에 따라, 혹은 어느 특별한 해에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라인업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최초 공연장 설립 시기에 세운, 한 기관이 달성하고자 하는 예술적, 운영적 가치와 목표를 큰 틀로 삼아 그 방향성 안에서 매년 다양성을 더하는 방식으로 라인업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특별히 어떤 콘셉트나 주제를 정한 후 그 주제를 관통하는 작품을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전하고자 하는 한 해의 메시지가 분명해지고 작품들의 성격에 통일성이 생기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일정 기간 동안 작품들을 관람하고 나면 중간 즈음에 이르러서는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관객들이 단조로움 혹은 피로감을 느끼거나 주제에 눌려 작품 자체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LG아트센터도 초기에는 ‘러시아 페스티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등 시즌 기획공연 안에 또 하나의 소주제 혹은 동일한 경향을 지닌 공연들을 묶어 프로그래밍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는 다양성을 가장 핵심 가치로 두고 시즌 기획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에는 특별한 주제 없이 작품들을 선정했는데도 세계 공연계에도 유행이나 경향이라는 것이 있다 보니 의도치 않게 하나의 주제나 경향이 잡히는 경우도 생긴다. 예를 들어 어느 해에는 거의 모든 연극, 무용, 심지어 음악 공연에서도 멀티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작품들로 라인업이 구성된다거나 어느 해에는 아크로바틱이 대세라거나 또는 융복합 성격이 강한 작품들이 다수가 된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간혹 극장이 추구하는 중장기 핵심 전략이 프로그램에 반영되기도 한다. 유럽 내에서 가장 명망 있는 공연장으로 유명한 파리 시립극장인 ‘떼아트르 드 라 비(Theatre de la Ville)’는 세계의 모든 안무가들이 가장 서고 싶어 하는 무대로 유명한데, 입장권이 항상 매진이라 전년도에 패키지를 구입한 관객들에게 제일 먼저 표를 구매할 수 있는 우선권을 주었고, 재구매율은 항상 80%를 넘어섰다. 공연장 입장에서는 너무나 이상적인 운영이라 할 수 있지만 달리 보면 항상 오는 사람들만 극장을 방문하여 관객들의 포트폴리오가 단조로웠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 사실에 주목한 공연장 운영진들은 새로운 관객 유입을 위해 보통 4회 정도만 하던 무용 공연을 10회 이상 공연하면서 일부러 관객 점유율을 떨어뜨리면서까지 뒤늦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신규 관객들을 유치하고자 애썼다. 또한 청소년들이 볼 수 있는 공연을 매년 한두 편씩 제작하여 미래 관객 양성에 힘쓸 뿐 아니라 파리 시내 여러 극장에서 떼아트르 드 라 비의 이름으로 공연을 주최하며 관객층을 넓혀나갔다(지금은 몇 년째 극장 리노베이션으로 자체 공연장을 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파리 전역의 공연장을 빌려 공연하고 있지만, 그전부터 이미 파리의 다양한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LG아트센터의 경우에도 개관 초기에는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의 공연을 대상으로 다양성, 참신함 등에 초점을 맞춰 프로그램의 기획 방향을 정했다면, 몇 년 전부터는 포트폴리오의 다양화, 신규 관객 유입과 개발 등에 보다 방점을 찍고 기획하고 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최상의 라인업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리서치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인터넷이 있어 부지런을 떨면 예전에 비해 세계의 다양한 공연예술에 대한 정보를 비교적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긴 하나 어떤 아티스트가 세계 공연예술계를 새롭게 이끌어 가는지 끊임없이 발견하고 따라가는 일이 여전히 만만치는 않다. 그리고 동시에 수많은 가능성 안에서 해당 작품이 과연 우리 관객들에게도 유의미한 작품이 될 수 있을지, 또한 공연할 작품이 우리 공연장에서 기술적으로 완벽히 구현이 가능한지, 공연장의 전체 방향과 잘 어울리는 작품인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예산의 작품인지 등 다각적인 검토가 일어나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다 보면 처음 리스트 안에 있었던 작품들 중 마지막 시즌 브로슈어를 손에 쥐었을 때까지 남는 작품들은 고작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최종 라인업의 공연들은 중간에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제치고 결정된 작품들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든 그해 시즌 프로그램에 못 들어갔다고 해서 그냥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작품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시기상의 문제로 혹은 예산상, 기술상의 문제로 공연을 미룰지언정 결국에는 그 이듬해 가끔은 수년이 흐른 후에라도 관객과 만나게 하고야 만다.
민간이든 국공립이든 한 극장이 정체성을 최대한 잃지 않고 20년간 한결같은 프로그래밍 기조를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국공립은 국공립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어려움은 있기 마련이다. 10만 원을 훌쩍 넘는 티켓값을 받으며 장기간 공연하는 대형 뮤지컬 공연장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흔히 공연장을 상업 시설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 몇몇 뮤지컬 전용극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극장은 적자를 면치 못한다. LG아트센터 역시 비영리기관으로 연간 재정 자립도가 55%에 이르는 공공극장이다. 민간기관이라 공공기금으로 재원 마련이 안되니 모자라는 수입의 45%는 고스란히 모기업의 지원으로 메꿔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G아트센터뿐 아니라 두산아트센터, 롯데 콘서트홀 등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공연장이 여럿 된다. 모두 사회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국공립은 공연장 운영에 대한 명분이 분명하다. 반면 민간 공연장은 모기업의 경영 상황이나 경제적 논리에 흔들리기 쉽고, 내부적으로 프로그래밍의 방향성에 대해 이해를 구하거나 유지해나가기도 쉽지 않다. 기업이 왜 문화 시설을, 공연장을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매 순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하고 그렇기에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이 공연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가. 아직까지 우리의 한결 같은 답은 이것이다. 세계의 다양한 공연예술, 최고 수준의 세계 공연예술 작품을 한국에서 우리 관객들도 만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서 가치관을 확장하고 사고의 폭을 넓히고,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가치를 나누는 것, 그 역시 기업이 해야 하는 사회공헌 사업의 일환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프로그램 방향성인 것이다.
이현정은 1996년 12월, LG아트센터 건설본부팀에 합류하여 LG아트센터의 운영 기초 확립부터 기획 방향성 설정까지 일익을 담당했고, 2000년 개관 때부터는 기획팀장을 맡아 LG아트센터의 혁신적인 시즌 기획 프로그램의 기획과 홍보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