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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예술이 짓는 현대의 소리
전주세계소리축제의 변화와 도전돌이켜 보니, 전주와의 인연은 꽤 깊고 질겼다. 1980년대 20대 청년이었던 나는 전주대사습놀이가 열리던 전주실내체육관을 뻔질나게도 쫓아다녔다. 체육관을 가득 메우던 낯설고도 뜨거운 기운은 젊은 청년의 마음을 달뜨게 만들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마지막 대통령상, 대사습 장원이라는 영예를 놓고 한판 전쟁을 벌이던 소리꾼들과 환호와 긴장 속에 뒤엉키던 관중들의 추임새는 실로 강렬한 충격과 잔상을 남겼다. 그 현장 자체가 내게는 전주를 상징하는 고유한 문화였다. 그 이후에도 제3세계 음악이나 실험음악의 산실이었던 전주의 작은 클럽 ‘자코’로 1990년대의 인연이 이어졌고, 2011년 무렵 드디어 전주세계소리축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연주자로 초청되어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한옥마을 무대에 몇 번 서게 된 것을 계기로, 비탈과 고개를 넘어 굽이굽이 7년여의 시간을 집행위원장으로 보내고 있다. 198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주는 여전히 내게 놀라운 가능성을 지닌 도시다. 전통예술 분야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인프라를 지닌 곳이고, 빛나는 역사를 이어나갈 핵심적인 곳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이하 소리축제)는 이 현재에 이른 ‘전통예술’을 리모델링하고 풍부한 인프라를 재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자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해외 다양한 전통예술, 예컨대 민속예술, 민족음악, 고음악, 월드뮤직 등으로 일컬어지는 동서고금의 예술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축제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내용과 기획 면에서 여러 아이디어와 결과물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선제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소리축제는 애석하게도 초기 10여 년간 부정적인 여론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이고, 우선은 그 인식을 바꾸는 게 급했다. 둘째는 지역과 대한민국 예술가, 나아가 해외 예술가들에게 소리축제의 지명도와 인지도를 높이는 게 중요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내가 택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소통’이었다. 작곡을 공부하고 드럼 연주자로 필드를 누비다, 한국적인 리듬과 화성이 왜 세계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인지 깊은 회의와 절망을 느끼다가 그 속에서 희망의 단서를 찾고자 판소리와 굿에도 기웃거렸었다. 그리고 선택한 종착지는 ‘즉흥 음악’이었는데, 누군가는 이것을 아방가르드라고 하고 정치적 표현으로는 ‘비주류’ 또는 ‘어려운 음악’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장르와 형식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작업을 통해 물밀듯이 밀려오는 음악적 갈증과 의문을 묻어가며 나름의 존재를 견뎌냈던 것 같다. 이 비주류의 즉흥 음악은 한국시장보다는 해외시장에서 더 각광받았고, 수십 년을 음악의 노마드가 되어 지구촌을 누볐다. 어쩌면 이 노마드 정신이 지금에 와서 소리축제에 작은 보탬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축제 홍보팀은 고맙게도 이런 내 여정과 방황을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힌 소리축제 맞춤형 인물’이라고 표현해주었다. 어찌 보면 가장 전통예술의 정통성을 갖춘, 기관의 전폭적인 지원이 따르는, 매우 ‘주류적인’ 소리축제가 나를 집행위원장으로 낙점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미스터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래서 인연이란 무릇 요물인 것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서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이 음악적 행보가 전주와 중앙을 잇고, 국내와 해외를 잇는 가교로써 꽤 쓸 만했다는 사실이다. 누구와도 음악에 관한 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 음악적 방황과 누구도 쉽게 가지 않았던 즉흥 음악 분야에서의 고집스러운 집요함이 소리축제가 다뤄야 할 전라북도의 전통예술을 베리에이션(variation)하고 인프라를 확장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지역 여론과도 친화적인 관계를 맺고, 나름의 프로파간다를 설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동안 지속했던 지역 언론과의 콩나물국밥 조찬 회동이 그 일환이었고, 해외에 있는 기획자들이나 음악가들과는 수시로 이메일과 SNS를 통해 소통했다. 그러면서 기획적 측면에서는 전통의 실험적 무대 확장, 국내외 전통음악의 비교 감상(더블빌 공연)과 컬래버레이션, 어린이 소리축제 강화, 찾아가는 소리축제(전라북도 14개 시군 초중고교 월드뮤직 워크숍)로의 확장 등이 전통과 현대, 세대와 세대, 전라북도 14개 지역에 고른 안배 등 그간 소리축제가 안고 있던 숙제를 하나씩 푸는 열쇠가 되었다.
이런 시도가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또 한 축으로는 지역 여론의 이해와 지지를 얻으며 드디어 날 수 있는 좌우의 날개를 얻게 된 것이다. 연초부터 몸살을 앓을 만큼 폭주하고 있는 해외 연주자들의 러브콜(이메일), 소리축제를 벤치마킹하기 위한 자문회의, 해외 기관에서의 MOU 요청, 그 누구보다 든든한 파트너이자 지지자가 되어준 지역 언론 등이 지금 소리축제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증거들이 아닐까 싶다. 스페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월드뮤직 평론가와 기획자들로 구성된 TWMC(트랜스글로벌 월드뮤직차트)는 2018년 ‘베스트 페스티벌 어워드’를 제정하고, 소리축제와 호주 워매들레이드에 공동 1위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놀랍게도 2019년에는 소리축제 단독으로 1등 상을 주었다. 우리는 이 2년 연속 수상 소식에 많은 자신감을 얻었고, 한 해 한 해 노심초사하며 수능을 치르듯 축제를 치러온 스태프들에게도 이제 조금은 편안해져도 되겠다는 말을 해 줄 수 있었다.
전라북도가 전통의 소리로 역사성을 갖고 인재를 풍부하게 배출해 온 곳이기에, 소리축제는 명분과 자부심이 응축된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자산이 될 수 있었다. 전통의 원형을 잘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면서 ‘미래의 전통’을 만들어가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 때로는 이 두 가지 역할과 가치 사이에서 이해가 충돌하고 이견이 일기도 하지만, 그것을 조율하고 설득하며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일 또한 기획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소리축제는 매년 어떤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집단이지만, 긴 축제의 역사를 놓고 볼 때는, 더욱이 전통예술의 미래를 놓고 볼 때는 한 해 한 해가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북도를 위시해 우리나라 전통예술이 ‘참신한 현대’를 향해 가는 매해의 과정을 차곡차곡 쌓아 어떤 시점에 무언가 획기적인 발자취를 남기려면, 이 한 해 한 해의 과정을 신뢰와 인내로 지켜보는 지지 세력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함께 동참하고 노력할 때, 우리 전통예술은 조금씩 힘을 얻고 보편적인 음악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더디지만 의미 있는 여정에 소리축제가 앞장서 있다.
올해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코로나19의 여파 속에서 ‘미디어-온라인 공연 5選’을 택해 관객들을 만난다. 올해의 모티브는 현악기로, 현악기를 통해 연상 가능한 이음, 연결 등을 통해 주제를 ‘__잇다(LINK)'로 정했다. 잇다 앞에 언더바 기호(_)가 있는데, 이것은 많은 관객과 아티스트들이 축제를 통해 무엇을 잇고 싶은지, 각기 다른 희망과 기대, 느낌을 가져주길 바라는 의미에서 비워두었다. 이 주제를 작년 말에 정했는데, 코로나 정국이 되고 나서 보니, 역설적으로 거리두기 속에서도 연대의 의미와 중요성을 더 부각하는 메시지가 되지 않았나, 더더욱 절묘한 주제가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 7월 프로그램 발표회에서 이 미디어-온라인 방식의 공연을 치르겠다고 공표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번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현장을 와 보지 못한 많은 관객들에게 미디어-온라인을 통해 소리축제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 매우 안도하고 감사해하고 있다. 특히 개막 공연은 해외 팀과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협연을 펼친다. 해외 팀은 온라인으로, 국내 팀은 직접 무대에 올라 국내외 연주자가 온·오프라인으로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한다. 특히나 녹화 형식이 아닌,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협연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많은 분들이 기대와 호기심을 갖고 있다. 러시아, 대만, 스페인 등 해외 9개 스폿에서 14개 국가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서 공연 시간에 맞추어 대형 LED 모니터를 통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이들의 개별 연주와 2팀, 3팀, 또는 모두가 어우러지는 초대형 시나위, 즉흥에 가까운 협연으로 실시간 연주를 진행한다.
가장 전통적인 도시 전주에서, 가장 첨단의 IT기술을 동원한 매력적인 반전의 가치가 조우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점들, 실시간 스트리밍이 가능할 것인지, 0.2초의 도착 트래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음악의 묘를 통해 커버할 예정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전통음악, 특히 시나위의 무한한 포용성에 있다. 때로는 엇박자로 때로는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지는 포용 속에서 해외 팀의 이질적인 음악과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이 유례없는 실험 자체로 우리는 새로운 역사에 도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설령 생방송 중에 방송 사고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거대한 실험극으로, 하나의 연출로써 수용되고 이해되길 바라고 있다. 기획자는 한 사람이 다 갖추기 어려운 인내와 파격을 동시에 요구받는다는 게 애환이자 숙제라고 생각한다. 소리축제의 집행위원장은 파격과 인내를 견지한 기획자이자 선동가이며, 정무적 감각을 갖춘 행정가여야 한다. (도달할 수 없는 마의 영역이기도-) 참신하고 파격적인 생각을 늘 견지해야 하고, 예술가들과 스태프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독려해야 하며, 음악적/예술적 완성을 지난하게 몸부림치며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프로파간다를 만들어내 선동하고 여론을 형성해야 하며, 정무적인 판단과 균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이 ‘인내’라는 사실이 내 성정엔 참으로 뼈아픈 팩트라는 점, 고백해 둔다.
코로나19의 파고 속에서도 인내하고 버티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건네고 싶다. 올해 뜻한 바를 다 이루지 못한 나와 스태프들 역시 새로운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다. 소리축제가 이 인내에 조금이나마 화답할 수 있는 묘안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나의 심정을 축구 경기로 표현하자면, 후반 10분 전 5:0으로 지고 있는 기분이다. 이대로 0패를 당할 수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으로 이번 축제에 임하고 있다. 이 미디어-온라인 공연을 성공시켜 1점이라도 따고 싶다. 그래서 많은 문화예술인들에게 희망의 지표가 되고 싶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 글은 나와 9년간 함께한 축제의 대외협력 부장 김회경 님의 도움으로 쓰였음을 밝힌다.
박재천은 2014년부터 전주세계소리축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다양한 음악적 경험과 학습을 토대로 독보적인 즉흥 음악 타악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외에도 음반, 축제, 해외 팀 컬래버레이션 등의 프로듀싱 활동도 활발히 해오고 있다.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무대로 한국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인물로 주목받고 있으며, 이 경험을 토대로 한국 음악이 세계 시장에서 충분한 가능성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