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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프레젠트> 공동제작 투어 동행기
리뷰_유럽 페스티벌 투어(재)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2011년 발간한 「국제공동제작 매뉴얼」에 따르면 공연예술의 국제공동제작(international co-production)이란 ‘여러 국가의 제작 파트너가 계약을 맺어 제작 또는 과정 지향적 프로젝트의 창작 및 유통을 지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매뉴얼에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공동투자 모델’로 여러 기관, 축제, 극장이 한 예술가의 신작에 공동으로 제작비를 지원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협력 모델’로 여러 예술가가 협력하여 한 작품을 만드는 형태이다. 국제 공연예술계에서는 ‘공동제작’이라고 하면 전자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국에서 진행되는 ‘공동제작’은 콜라보레이션의 성격을 띄는 후자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상주단체가 아닌 예술가의 신작을 제작하는 예술 기관이 소수인 데다가, 공동제작에 필수적인 해외 기관과의 신뢰와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기관은 더욱 드물다는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공동제작은 한 기관이 부담해야 하는 제작비를 줄여주기 때문에 더 많은 작가에게 신작 제작의 기회를 열어주고, 더 나아가 공동제작 기관들은 해당 공연을 반드시 초청하기 때문에 작품은 자동으로 해외 투어의 기회를 확보한다. 일회성 교류 프로젝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신작 제작 생태계와 확실한 해외 유통망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국내에도 점차 확대되어야 할 시스템이다.
김지선 작가의 <딥 프레젠트>는 국내에서는 드물게 이러한 공동제작 시스템을 통해 제작되고 유통된 사례이다. 작품은 ‘아웃소싱’을 오늘날 사회를 작동시키는 주요한 축이라고 보고 4개의 인공지능 캐릭터를 통해 이제는 인간의 사유마저 아웃소싱하게 된 과정을 추적하는 논휴먼 퍼포먼스이다.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과 벨기에의 쿤스텐페스티벌, 네덜란드의 스프링페스티벌, 오스트리아의 빈 축제주간이 공동으로 제작비를 분담하고 유통을 진행했다. 지난해 10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쇼케이스를 가진 뒤, 올해 5월 12일부터 27일까지 약 3주간 유럽 3개국에서 투어를 마쳤다. 이 글에서는 작품이 방문했던 축제를 소개하고 공동제작 프로젝트가 진행된 과정을 톺아본다.
첫 방문지는 벨기에의 쿤스텐페스티벌(Kunstenfestivaldesarts). 크리스토프 슬라그뮐더(Christophe Slagmuylder) 예술감독이 이끄는 쿤스텐페스티벌은 ‘축제들의 축제’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컨템포러리 공연예술계의 경향을 일선에서 선도하는 축제이다. 매년 5월 브뤼셀에서 열리는데, 장르나 국적에 관계없이 오늘날 가장 시급한 이슈에 관해 날카로운 관점과 고유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작가를 엄선하여 선보인다. 프로그램의 절반가량이 신작으로 채워지고 세계 초연인 작품도 많아서 위험부담이 크지만, 그만큼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 전 세계 예술감독, 프로그래머, 큐레이터들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올해 역시 37편의 작품 중 18편이 제작 또는 공동제작 되었다. 특히 올해는 브라질 출신 작가의 작품이 6편이나 소개될 정도로 급속히 우경화되고 있는 브라질의 정치상황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김지선 작가의 경우 2016년에 이미 <다음 신의 클라이막스>라는 작품으로 쿤스텐페스티벌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이후 슬라그뮐더 감독은 김지선 작가의 다음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딥 프레젠트>의 구상 단계에부터 공동제작자로 합류했다. 지난해 10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쇼케이스를 관람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여러 차례 작가와 미팅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쿤스텐페스티벌의 경우 작품의 제작비를 지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피드백을 공유하며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쿤스텐페스티벌은 공동제작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축제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작품에 관심을 가질만한 다른 기관을 소개해주거나 중간 연결자로 기능한다. <딥 프레젠트>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네덜란드의 스프링페스티벌, 오스트리아의 빈 축제주간을 공동제작자로 추가 섭외했고, 이 축제들이 열리는 5월에 공연 투어를 확정하였다.
신작 초연은 성공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축제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따르는 모험이다. 매해 여러 편의 신작을 초연하는 쿤스텐페스티벌은 그러한 모험을 수행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확립한 축제라는 인상을 받았다. <딥 프레젠트>는 떼아트르 나시오날(Théâtre National)의 스튜디오 극장에서 공연되었는데, 셋업 일정을 1~2일 남짓 주는 일반 축제의 관례와 달리 5일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졌고, 이는 작품의 마지막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축제 기술팀의 유연한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자막 투사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패널의 위치, 작동 프로그램 등이 변경되었는데 무대팀, 영상팀, 자막팀 너나 할 것 없이 더 나은 해결책을 찾으려고 함께 고민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모험에는 관객도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축제의 정신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이 대부분 실험적이고 쉽지 않은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공연에서나 전 연령층의 관객을 볼 수 있었다. 쿤스텐페스티벌은 매년 ‘페스티벌 센터’를 운영하는데, 이곳에서는 관객들이 모여 늦은 밤까지 자신이 본 공연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때로는 작가에게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 펼쳐졌다. 컨템포러리 예술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도를 높이고 미래의 관객층을 만들어내기 위한 프로그램으로는 ‘영아티스트리포터(Young Artist Reporter)’가 있다. 매년 20명의 청년 기자단이 작가와 대화를 나누고, 리허설에 참여하고, 공연을 관람한 뒤 작품에 대한 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블로그에 공유한다. <딥 프레젠트>를 맡았던 노라 올리바스(Nora Olivares)는 작품을 본 뒤 웹툰을 그렸고, 또 다른 리포터는 필립 게마허(Phillip Gehmacher)의 작품에서 느낀 바를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위트레흐트는 브뤼셀에서 기차로 약 2시간 반 거리에 떨어져 있는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이다. 라이너 호프만(Rainer Hofmann) 예술감독이 이끄는 스프링페스티벌(SPRING Performing Arts Festival)은 매년 5월에 10일간 열린다. 규모는 작지만, 세계 유수 축제들과 작품을 공동제작하여 적은 제작 예산으로 퀄리티 높은 국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동시에 네덜란드 작가들의 신작을 적극적으로 제작하고 초연한다. 특히 프로그램 대부분을 단독으로 초청하기보다는 비슷한 기간에 개최되는 다른 유럽 축제와 공동제작하거나 ‘유럽 투어’를 조직하여 초청 경비를 절약한다. 또, 매년 ‘프로그래머 데이(Programmer’s Day)’를 개최하는데, 쿤스텐페스티벌을 찾은 세계 전문가들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스프링페스티벌을 방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이 자리에서는 네덜란드 작가들을 만나고 신작을 볼 기회가 마련된다.
스프링페스티벌에서 <딥 프레젠트>를 공연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공연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였다. 평균 연령 34.9세를 자랑하는 젊은 도시임을 입증하듯, 위트레흐트의 관객층은 20~30대가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강아지 로봇, 인공지능, 움짤, 트위터 등 <딥 프레젠트>가 다루는 소재와 사용하는 언어가 젊은 층에 소구하는 바가 커서 그런지 브뤼셀 공연에서는 듣기 힘들었던 웃음소리를 위트레흐트에서는 공연 내내 들을 수 있었다. 이렇듯 젊고 적극적인 관객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스프링페스티벌은 올해부터 관객과의 대화에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다고 한다. 으레 그렇듯 사회자와 작가가 무대에 올라 객석을 바라보고 질의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모두 무대 위에 올라와 둥그렇게 앉는다. 질문은 관객이 작가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자가 관객에게 던진다. ‘방금 본 작품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작품을 보면서 들었던 질문은?’ 등이 그것이다. 작품에 대한 관객의 피드백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 정도로 풍부하게 들을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에 특별한 경험이었다. 관객 역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작가에게 디테일한 제작 에피소드를 들으며 작품을 훨씬 더 확장된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연예술이라는 장르가 관객 혼자만의 일방적 체험이 아니라, 예술가와 관객이, 또 관객과 관객 간이 나누는 유기적인 소통임을 상기시켜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빈 축제주간(Wiener Festwochen)은 1951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유럽을 예술을 통해 재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설립되었다. 무려 67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아비뇽페스티벌과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축제로 꼽히는 빈 축제주간은 매년 5~6월에 6주간 열린다. 보신각 타종행사를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인파가 시청 앞을 메우는 개막식으로 시작해서 대형 오페라, 실험 연극, 무용 공연, 야외 음악페스티벌, 전시 등 규모와 장르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올해는 토마스 치어호퍼킨(Tomas Zierhofer-Kin) 예술감독의 지휘 아래 ‘공포’, ‘거짓’, ‘진실’. ‘민주주의’, ‘개인’, ‘미래’ 등을 키워드로 한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한편, 축제의 차기 예술감독으로 쿤스텐페스티벌의 크리스토프 슬라그뮐더가 선임되어, 2019년부터는 빈 축제주간이 어떤 파격적인 변화를 꾀할지 주목할 만하다.
빈 축제주간에서는 역사가 긴 대형 페스티벌답게 체계적인 공연 초청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로덕션팀, 기술팀, 홍보팀 직원들이 공연 초청에 따르는 업무를 세세하게 나누어 진행했는데,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드라마투르그’가 그 모두를 일선에서 아우르며 자칫 분산되기 쉬운 소통을 하나로 이끌어갔다는 점이다. 축제의 드라마투르그는 국내에서는 상당히 생소한 개념인데, 한 작품이 빈의 관객과 가장 최적화된 환경에서 만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프로덕션팀, 기술팀, 홍보팀을 중재하고 조율하게 된다. <딥 프레젠트>의 담당 드라마투르그였던 이리스 라펫제더는 이미 한국에서부터 몇 차례 스카이프 미팅을 하면서 작품의 진행 상황을 살폈다. 브뤼셀에 직접 와서 초연을 관람한 후 작가와 여러 사항을 확인하고 갈 정도로 작품의 내용과 공연 환경을 세심히 살피는 모습을 보였다. 자막의 위치를 빈의 극장에 맞게 변경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거나, 작품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그 의미를 점검할 수 있게 중재한 것도 그다. 공동제작한 신작일수록 이러한 사안들을 더욱 신중하게 체크한다고 한다. 빈에서는 뮤지엄콰르티에에 위치한 할레G(Halle G)에서 공연을 했는데, 라펫제더의 역할 덕분인지 작품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 제공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셋업과 리허설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피부로 느껴질 만큼 관객의 집중도가 높았던 점, 관객과의 대화에서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는 예리한 질문들이 다수 제기되었다는 점도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이번 <딥 프레젠트>의 투어는 ‘공동제작’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한국 작가의 작품이 제작되고 유통된 유의미한 사례로, 앞으로 점차 더 많은 한국 작가들이 이 네트워크에 편입되어 자생적이면서도 국제적인 프로덕션을 진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공동제작 시스템을 통해 하나의 예술 생태계가 생겨나고, 그 안에서 유럽의 페스티벌들이 서로 다른 역할과 위치로 공생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축제들의 선두에 서서 가장 모험적인 시도를 하며 담론을 주도하는 쿤스텐페스티벌, 대형 페스티벌들 사이에서 영리한 방식으로 생존전략을 꾀하는 동시에 자국의 작가와 관객의 역량을 성장시켜나가는 스프링페스티벌, 그리고 역사가 깊은 대형 페스티벌답게 체계적인 방식으로 작가와 관객에게 모두 최적의 공연 환경을 제공하는 빈 축제주간까지. 아직은 각자도생하기 바쁜 아시아의 축제와 극장들 사이에도 언젠가는 이러한 생태계가 형성되어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작가를 지원하고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바라본다.
김신우는 페스티벌 봄, 부산국제영화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을 거쳐 2017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원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공연의 프로덕션 매니저, 통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