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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극 <마사지사> 유럽축제 투어 동행기
리뷰_유럽 페스티벌 투어유럽의 여름은 축제로 바쁘다. 도시 곳곳에 광장이 자리하고 있고, 저녁 아홉시가 넘은 시간에야 비로소 해가 지기 시작하는 도시의 특성은 거리극을 하기에 참 좋은 환경이 된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샬롱축제(Chalon dans la rue festival des Espaces Publics)나 오리악축제(Aurillac Festival International de Theatre de Rue), 스페인의 타레가축제(Fira Tarrega Teatre al Carrer) 이외에도 크고 작은 도시마다 저마다의 색깔로 거리극축제들이 수없이 이어진다. 거리극을 창작하기 위한 창작소와 제작 지원 시스템의 확보, 축제 간 공동제작 등의 제작 환경들이 새롭고 다양한 작품들을 활발하게 선보일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축제가 바쁜 만큼 프로그래머들도 바쁘다. 좋은 작품을 선정해서 다음 축제의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위해 수많은 축제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관람하고 예술가들을 만난다. 폴란드에서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비주얼씨어터 꽃’의 <마사지사> 유럽 투어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유럽에서 공연을 올렸던 2016년 스페인 타레가에서 작품을 본 프로그래머들이 연이어 작품을 초청 하면서 2017년 영국 런던, 스톡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어 2018년에는 폴란드 크라코프, 그단스크, 그리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공연을 올렸다.
투어 매니저로서 동행한 비주얼씨어터 꽃은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이 통합된 시각연극(Visual Theater)를 추구하는 공연예술 단체이다. 시각예술적 재료와 연극적 재료, 그리고 음악적 재료를 통합하여 삶의 깊이를 탐구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으며, 거리와 일상의 공간 등 일상을 예술적 공간으로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 이번 <마사지사> 투어에는 이철성 대표·연출과 하소정, 김혜원 설치작가가 함께했다.
<마사지사>는 워크숍을 통해 시민배우들과 함께 만드는 커뮤니티 퍼포먼스이다. 이철성 대표가 고안하고 창작했다. 이 작품은 머무르는 도시의 시민들을 만나 4일에서 길게는 6일간의 워크숍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고, 그 시민들이 직접 배우가 되어 이들이 다시 관객들을 공연에 참여시키는 이중의 참여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특성 덕분에 <마사지사> 투어는 늘 한 도시에 다른 예술가들보다 좀 더 길게 머무르며, 도시를 좀 더 진하게 만날 수 있게 도와준다.
축제는 우리가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시민 공연자들을 모집하고, 워크숍의 채비를 해둔다. 우리는 도착해서 시민들을 만나 워크숍을 하며, 그 도시의 관객들을 끌어안을 준비를 한다. 커뮤니티 퍼포먼스인데다가 장소와 공간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거리극 공연이어서 가는 도시마다, 만나는 관객들과 그날의 분위기마다 매번 공연은 다른 모습을 한다. 투어를 하며 그 어느 공연 하나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울리카 국제 거리극 축제는 극단 KTO가 운영하고 예술감독 예지 존(Jerzy Zoń)이 이끌어가고 있는 폴란드 크라코프의 거리예술축제로 1988년 창설, 매년 7월 초에 진행된다. 흐린 날씨 덕분인지 더 또렷해 보이는 바벨성의 모습이 강 저 편에 내다보이는 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고, 환상 속에 있던 축제가 현실이 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마주해야 했다. 첫 며칠은 공연과 연습에 필요한 종이를 구하느라 사방팔방 분주했고, 참가자들이 들쭉날쭉 참여하지 않도록 워크숍 시간을 조정하느라 제법 애를 쓴데다가, 공연 장소에 장비들이 제대로 준비가 될런지도 아리송한 상태로 긴장 속 첫 주를 보냈다.
울리카 국제 거리극 축제에서 만난 시민들은 지금까지의 세계 마사지사들 중에서 가장 어렸다.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이 셋, 그리고 삼십대 한명, 게다가 최초로 열일곱의 십대 청소년도 마사지사로 합류했다. 바람만 불어도 꺄르르 웃기 바쁜 청춘들과 함께 하는 워크숍은 때로는 진지했지만 종종 집중하기 힘들만큼 산만해서 공연 직전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축제의 예술감독이 직접 살피고 골랐다는 크라코프 구도심의 둘레길 작은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무사히 첫 공연이 시작되었다.
크라코프의 관객들은 공연과 함께 많이 울었다. 무대 공간으로 초대를 받아 마사지사를 받은 관객들도, 그들을 마사지한 시민공연자들도,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일반 관객들도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격려하는 박수를 보내고 부둥켜안으며 공연과 함께 울어주었다. 공연을 마치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진한 교감을 느끼며 도시도 감성을 지닌 생명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페타 축제는 그단스크 문화재단(Granski Archipelag Kultury)에서 운영하는 축제로, 폴란드 북부에서 개최되는 거리예술축제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토마스 힐데브란트(Tomasz Hildebrandt)가 2018년부터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1997년 창설, 매년 7월 중 진행된다. 그단스크는 폴란드 북부에 위치한 발트해 연안의 해양도시로, 민주화의 성지로 불릴 만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도시이다. 이 도시에서 폴란드의 전 대통령인 레흐 바웬사가 최초로 자유노조 연대를 결성하고 민주화의 문을 열었다. 그단스크는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서 국경 분쟁의 요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고, 세계대전 당시 도심의 90%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은 역사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숱한 전쟁의 역사 탓인지 도시의 곳곳에는 옛 군사시설인 망루와 방호시설이 남아 있었다. 크라코프의 울리카 축제가 구도심의 화려한 광장과 오래된 골목들을 무대로 삼는다면, 그단스크의 페타 축제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오래된 망루와 방호시설들을 중심으로 비교적 도심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공연들을 선보인다.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더하고, 소외된 지역에 예술을 통해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 축제의 주요한 역할이라고 믿는 듯 했다. 제주의 오름 같이 우뚝 솟아 있는 큰 언덕의 망루가 우리 공연의 공간이 되었다.
역사가 오래된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페타 축제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처음으로 개최해본다며 무척 기대했다. 그 축제 스태프들의 설렘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정도로 매일의 일정이 탄탄하고 유쾌했다. 축제의 바람만큼이나 들뜬 마음을 가지고 참가 신청한 시민들이 첫 워크숍 장소에 들어올 때 나도 같이 설렜다. 시민공연자들은 궂은 날씨에도 굴하지 않는 햇살처럼 끈질기게 워크숍에 참여했고, 현장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워크숍에서는 비를 맞으면서도 리허설을 멈추지 않으며 프로 배우들보다 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공연 장소인 언덕 아래에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객들은 땡볕에도 자리를 지키며 공연을 기다렸고, 공연 시작 즈음에는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고요했던 언덕을 가득 채웠다. 축제가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는지 모여드는 관객의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가득 찼던 그 언덕,– 비록 공연이 끝나고 설치해두었던 대형 종이 인형을 세 개나 잃어버렸지만, 누군가의 손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으며 – 이번 투어에서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이다.
그렉축제는 유럽 공연예술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바르셀로나 시 정부 주최의 페스티벌로 7월 한 달 간 그렉 극장의 야외무대와 도심 주요 공연장 곳곳에서 연극, 무용, 음악, 서커스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이 무대에 오른다. 1976년 처음 시작되었으며 프란세스크 카사데수스(Francesc Casadesús)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그렉 페스티벌에 가는 길은 다른 도시보다 유독 설렜다. 첫 마사지사의 공연 장소인 타레가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바르셀로나였기에, 타레가의 시민 마사지사들이 우리를 만나러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름에도 약간 쌀쌀한 날씨였던 폴란드와는 달리 바르셀로나는 뜨거운 태양과 함께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만난 반가운 얼굴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동료들이 있어서인지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 도시에서 마지막 워크숍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되기 전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은 사실 테크라이더(Technical Rider)의 작성과 세부적인 기술협의인데, 우리는 시민들을 데리고 워크숍까지 진행하는 터라, 워크숍의 참가자 모집이나 장소 선정 등부터 소소하게는 간식 준비 등의 운영 방식 협의까지 최선을 다해 모든 것들을 안정적으로 준비하고자 노력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늘 완벽하게 예측하기 힘든데, 바르셀로나에서는 우리에게 유독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사람을 모으는데 어려움을 겪곤 하는 다른 축제와 달리 그렉 축제의 사랑스러운 프로듀서는 우리가 요청한 인원보다 많은 이들을 모았다. 준비한 재료가 부족하지는 않을지, 다 수용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첫 워크숍을 진하게 진행한 후 우리는 모두와 함께 공연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참여하기로 한 시민공연자 중 한 명은 두 다리가 없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 무용수였다. 달리고 뛰고, 자리에 앉거나 일어서는 동작이 제법 포함된 공연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처음에는 사실 그와 함께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용감했고, 각각의 장면과 역할들을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화해 냈다.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의 만남 덕분에 바르셀로나의 <마사지사>는 한층 더 성장했다.
바르셀로나의 마사지사들은 유쾌했고, 춤을 정말 아름답게 췄다. 그들이 춤추는 것을 보면서 관객들도 함께 웃고 즐겼다. 축제의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바라본 밤하늘에는 개기월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마법처럼 하늘이 변하는 것을 함께 바라보며 서로에게 축하와 고마움의 인사를 건넸다.
분명 같은 공연임에도 도시의 다른 풍경에 기대어 거리극 작품은 늘 새로운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이런 묘한 도전이 계속 우리를 유혹해서 우리는 또 어딘가로 투어를 떠난다. 작품을 핑계로 낯선 도시의 누군가를 이렇게 진하게 만난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우리는 또 어느 도시를 유랑하며, 누구를 만나게 될까. 아직은 끝내기 아쉬운 <마사지사>의 다음 여정을 구상하며 뜨겁고도 열정적이었던 여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임현진은 독립 기획자로 예술과 도시·공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여러 거리예술 축제, 창작단체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거리예술 국제교류와 공동창작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으며, 국내 작품의 해외 진출을 돕는 다리가 되고자 한다. 사단법인 한국거리예술협회의 운영위원으로 매년 서울에서 개최되는 거리예술마켓 사업을 기획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