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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경영을 위한 제3의 큐레이션
[신년인터뷰 : 예술경영의 미래를 논하다 ③] 이명옥_사비나미술관 관장2018년을 맞아 웹진[예술경영]은 ‘예술경영의 미래를 논하다’를 주제로 문화예술의 변혁기 속에서 앞으로 ‘예술경영’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각계각층 예술경영인의 생각을 묻고자 한다.
지난 1월 25일, 안국동의 한 카페에서 사비나미술관의 이명옥 관장을 만났다. 또렷한 목소리와 쉼 없는 이야기 속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그치지 않는 열정과 고민의 흔적이 느껴졌다.
관장님께서는 사립미술관 관장으로서 현장과 강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다. 시각예술분야 담론을 이끄는 자신만의 예술경영 철학은 무엇인가?
큰 틀에서는 문화예술이 특수한 영역이기에 예술경영도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이 예술경영에서 가장 필요하다. 미술관 경영적 측면에서 보자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미술관이나 시드머니가 있는 기업 문화재단미술관과 달리 개인이 설립하여 운영하는 사립미술관은 어려움이 많다. 안정된 자본을 가진 국·공립, 기업재단 미술관은 수년 동안에 걸쳐 대형전시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 비해 사비나미술관은 늘 재정상태가 불안했다. 대체로 기획전 예산의 상당 부분은 공공자금에 의존하는데 1년 단위 공모사업에 선정된다는 보장이 없어 장기적 운영계획을 짜기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사비나미술관을 설립한 이후 20년 동안 다른 미술관과 차별화되는 경영전략이 무엇일까 줄곧 고민했다.
경쟁력을 가지려면 다른 미술관이 관심을 두지 않거나 시도하지 않은 기획 아이템을 개발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나름의 틈새전략으로써 참고했던 것이 페스트 패션(fast fashion)을 추구하는 ‘자라(zara)’ 유니클로(Uniqlo)와 같은 의류브랜드였고, 이에 착안해 시대적 트렌드를 신속하게 포착한 핫 이슈를 기획전에 반영한 것이다. 또, 대형미술관보다 발 빠르게 시대적 변화상이나 제 4차 산업혁명의 산물인 최첨단 기술을 받아들여 전시에 도입하면서 그 결과로 큰 미술관을 능가할 수 있는 브랜드 가치와 파급력을 가지고자 했다. 말하자면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소개한 ‘히든챔피언’1)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국공립 대형사립미술관과의 차별화 전략으로써 기술, 융·복합 등 시대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미술관의 문턱을 낮춰 관객이 많이 방문하는 미술관,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작지만 강한 미술관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1)히든챔피언 :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Hermann Simon)이 창안한 개념으로 자신의 저서 『히든챔피언』이란 책에서 소개한 개념.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각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우량 강소기업을 지칭하는 용어이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민간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시각예술 단체들을 위한 예술경영의 방향성을 말씀해주신 것 같다. 저는 예술경영인, 예술가들에게 프런티어 정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앞서가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심스럽지만, 공연, 출판 등 다른 분야보다는 시각예술계가 상대적으로 향유자의 욕구를 파악하지 못하고 공급자 위주의 시각을 가지고 안주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미술이라는 틀에 갇혀 생각을 제한(blocking)하거나, 어차피 대중은 미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우월감으로 안정되고 표준화된(standard)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합리화하는 풍조가 은연중 형성되었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대다수의 작가는 도전과 혁신정신으로 무장한 아방가르드(Avant-garde), 또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인데 비해 미술계 중간 매개자인 디렉터, 전시기획자, 비평가들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행보를 보인 점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어차피 예술경영이란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예술경영이 1에 1을 더해서 2가 나오지 않는 분야라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승리하는 전략들을 과감하게 시도해보아야 하고, 안되더라도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최근 예술경영의 흐름은 두 가지 트랙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의 최신기술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하는 것, 또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예를 들면 아날로그적 감성과 향수를 자극하는, 직접 만드는 체험학습 등)에 대한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술경영은 이 두 가지 트랙을 동시에 가져가야 한다.
최근 미술관들은 전시영역 외에도 미술교육, 카페, 아트샵과 같은 부가적 공간을 운영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현 시점에서 미술관 경영에서 보완되어야 할 분야가 있다면 무엇일까?
큐레이션(curation)을 활용한 사업에 관심이 많다. 큐레이션은 큐레이터에서 파생한 단어인데도 정작 미술계에서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큐레이션의 영역이 많은데 아직 수요창출을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아쉽다. 다른 분야에서는 이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흥미로운 성공사례들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고객의 성향이나 체형에 맞는 옷을 골라주는 스타트업 스티치픽스(Stitch Fix)는 의류 스타일링과 전자상거래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알고리즘을 접목해 대성공을 거두었고 ‘의류업계의 넷플릭스’로 불리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 ‘책 골라주는 책방, 잉크(iinnk)’는 사용자가 읽은 책을 바탕으로 취향을 분석해 새로운 책을 추천해주는 모바일 앱으로 2017년 창조경제타운 아이디어 사업화 우수 사례로 선정되었다. '이케아 플레이스'는 증강현실(AR) 기술을 사용해 가구 구입 전 미리 체험해 보는 모바일 앱으로 소비자의 인기를 끌고 있다. 평소 이런 사례들을 미술계에 접목할 수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기존 미술계에서 답을 찾기 보다는 다른 분야에서는 어떤 새로운 경영전략이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런 변화상을 미술계에 접목하는 예술경영전략을 추천한다.
과거 미술계의 주요 직업군이 ‘큐레이터’로 한정되어 있었다면, 최근은 그 외에도 갤러리스트·아트 딜러·컨설턴트·옥셔니어·아트페어 운영자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그 외 시각예술분야/미술관 경영에 ‘전문영역의 개발’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며, 어떤 영역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까?
시각예술분야에서라면 전시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디스플레이, 동선, 조명, 색 배치 등 전시디자인은 전시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전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직군으로서는 아직 미비하고, 그 역할도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대체로 기획자나 작가가 담당하고 있다. 현재 국내는 전시디자인에 대한 매뉴얼 없이 해외에 다니면서 눈썰미로 배워오는 실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 등 극히 일부 공공미술관에서 전시디자이너가 활동하고 있다.
향후 새로운 직업군으로서 잠재력이 크다고 본다. 사비나미술관의 경우 전시디자인 담당자가 별도로 있지는 않지만 외부 미술관의 전시디자이너나 그 외 전문가 자문을 구하고 협업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고 있다. 국내 미술계는 일자리의 분업화와 전문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1월 10일자 헤럴드경제 칼럼에서 ‘#selfie(셀피)-나를 찍는 사람들’ 전시가 지자체에 판매되었다는 이야기가 무척 신선하게 들렸다. 기획비를 주고 사갔다고 표현하셨는데, 이 과정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작년에 큰 호응을 얻은 ‘#selfie_나를 찍는 사람들’은 창원문화재단이 ‘기획비’를 주고 전시를 사갔고 현재 전시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기획사들의 블록버스터 전시가 순회전을 한 것과는 다르게, 순수 사립미술관의 기획전시를 기획비를 받고 공공기관에 판매한 사례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마음이 뿌듯하다. 일종의 라이선스를 판 경우라 수익구조도 일반 순회전과는 다르다. 주요 전시나 미술관들이 수도권에 집중되고 지역은 하드웨어는 구축했지만 소프트웨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방식이 가동률이 낮은 지역 전시공간에 도움이 되리라 보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된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현 미술계에 좀 더 다양한 수익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젊고 혁신적인 작품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기획이 수반되어야 하고, 이것이 반복됨으로써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말씀하신 새로운 흐름, 또는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공연마켓이 있듯이 소위 ‘비주얼 아트마켓’이 있으면 어떨까 상상해봤다. 미술작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전시를 보여주고 ‘기획’을 판매하는 마켓이다. 전시기획자들이 기존 전시, 혹은 새로운 전시를 마켓에 내놓고, 전시공간을 가진 곳들과의 매칭을 시도한다면 전문 전시기획자의 영역도 활성화될 뿐만 아니라 콘텐츠가 부족한 지역문화회관이나 작은 미술관들의 수요도 충족시킬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그러자면 매칭도 하고 수익모델을 창출할 플랫폼이 필요한데, 예술경영지원센터가 그러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개인이 아닌 공적영역에서 추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경영지원센터를 언급하신 것처럼, 비단 시각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의 영역에서 공공기관이 가져가야 할 역할이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자면 공모사업의 경우 지원기관 차원에서 공모조건이나 형식을 세밀하게, 또 어렵게 규정하면 예술가들이 이에 맞추느라 자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에 좀 더 자율성을 주고, 실패를 용인하고, 실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한다. 공공기관은 예술가의 활동을 위한 보조자·협력자로 기술적, 행정적인 부분을 보완하거나 함께 고민해야 한다. 예술가들이 새로운 창조적 행위를 지속할 때 공공기관, 예술행정 분야는 그에 필요한 기초적인 토양을 만들어주고 행정 프로세스를 돕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예술영역도 스타트업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나는 예술가 그 자체가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 자체가 1인 산업인데 그들을 자꾸만 기존 스타트업 시스템 구조에 넣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길만 요구하기보다는 다양한 길, 성공과 실패조차도 열어두자는 말이다.
문화예술계에도 ‘4차 산업혁명’이 주요한 화두이다. ‘예술창작’의 주체로서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 기술의 개발로 인해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SF영화나 소설에서 그려졌던 것들이 현재 현실화, 상용화되듯이 예술가들이 가진 상상력과 창의적 발상이 4차 산업혁명의 기술로 구현되는, 일종의 컬래버레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 2017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만든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4년간 세계주요국의 일자리 760만개가 인공지능 때문에 사라질 거라고 예측했다. 그만큼 또 다른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때를 대비해야 하는데도 해결방법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다. 엄청난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는 무엇보다 선택과 판단, 분석 능력이 중요하다. 그동안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거나 그것을 도구화할 생각에만 집중했었다면, 역으로 문화예술만이 할 수 있는 틈새영역을 찾거나 만들어 자원화·경영화시켜야 한다.
새해를 맞아 웹진 <예술경영> 독자들이기도 한 예술경영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젊은 기획자나 학생들이 조언을 구하면 이렇게 말한다. 명성, 돈, 권력이 없는 것이 오히려 힘이라고,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좀 저지르라고 말이다. 경력과 브랜드를 가진 원로·중견과 경쟁해야하는 신진들은 그들이 가진 ‘날 것’의 감성과 도전정신을 보여줘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제로, 그러나 일단 시도하면 50퍼센트의 확률이 생긴다. 두려움이 있겠지만 시도한다면 성공이나 실패 어느 면에서도 깨닫는 바가 생긴다.
인생은 FM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가 미술관 관장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어렸을 적에는 시인을 꿈꾸면서 글쓰기에 즐거움을 느꼈다. 부모님은 교직을 선택하기를 바랐지만 거부하고 화가의 길을 추구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한 후 미술관 경영자로 거듭났다. 신기하게도 현재 저자로 글을 쓰고 부모님의 바람대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미술관 관장이 되어 좋아하는 작품들과 매일 만나고 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열심히 살다보니 여러 개의 길이 결국 하나의 길로 수렴되더라. 그래서 내일을 계산하지 않는다.
주요 약력
現 (사)한국사립미술관협회 명예회장
現 과학문화융합포럼 공동대표
現 국립현대미술관, 운영 자문위원
現 (재)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 운영위원, 작품수집심의위원회 위원
現 부산시립미술관 작품수집심의위원
現 미술주간 운영위원장
現 공예문화산업진흥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