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자신의 재능을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하는 방법을 얄미울 만큼 너무 잘 안다. 하는 일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든 ‘N잡러’, 현대미술의 중심 뉴욕보다 제주에 사는 게 좋은 제주인,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쉽고 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하는 천생 작가, 잡지 하나로 수백 명의 사람을 연결해내는 네트워커, 끊임없이 재미있는 일을 찾는 재미주의자,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양한 일을 만들어내고 추진하는 즐거움을 아는 에너지 넘치는 사람, 이나연 대표를 만나봤다.

일단 본인소개부터 부탁할까요. 미술평론, 전시기획, 출판사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뉴욕 생활 예술 유람기＞와 ＜Fresh Art New York＞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주변사람들이 책 저자, 대표, 큐레이터, 편집장, 작가 등등의 직함을 거명하며 뭐라고 부르면 좋겠냐고 종종 물어보는 일이 있더군요. 요즘엔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다는 의미에서 ‘N잡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음 커리어를 시작한 것은 미술평론에 가까웠는데, 제주에 와서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하게 됐어요. 아라리오뮤지엄에 취직해 큐레이터 활동을 통해 작가들을 만나면서 제주에서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다 2017년 잡지 씨위드(Seaweed)를 창간했습니다. 요즘은 씨위드 대표로 많이 활동하고 있고요. 하는 일은 비슷한데 직책이 많은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하나의 일이고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전문화되면서 출판사도 하고 잡지도 만들고 전시기획도 하고···. 좀 혼란스럽기도 한데, 프리랜서들의 삶이 다 이런 거 아닌가요?(웃음)

씨위드는 제주를 기반으로 한 잡지죠. 온/오프라인에 한글과 영문판을 따로 발간하면서 ‘지역도 영역도 없이 재미와 의미만 있는 신문, 문화인들의 지면놀이터’를 표방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씨위드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를 부탁드려요. 영역 구분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붙잡아 보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외국에 오래 있으면서 여행하고 여기저기 다닐 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경험이 휘발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나마 취재여행을 간 건 기록이 남더라고요. 그런 경험이 없는 친구들에게 글을 달라고 한 게 씨위드의 시작이었습니다. 제주 친구를 찾기도 했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래저래 만나는 사람들에게 글을 받기도 했어요. 표방하는 가치는 말 그대로에요. 무계획, 무질서를 지향합니다. ‘우리 맘대로 만들면서 재미있게 놀 거야’라는 식으로 만들었어요. 씨위드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씨위드 스펠링을 랜덤으로 두 번 반복해 뿌린 걸 제호로 삼고 있습니다. 지역이나 영역에 구애되지 않고 재미있는 것, 의미 있는 것들이면 가리지 않고 실었어요. 그러다 보니 창간호 때, 글을 쓴 사람, 일러스트를 한 사람, 편집한 사람, 번역한 사람을 다 헤아려 보니 100명이 넘더라고요. 2호는 300명, 3호는 400명이 됐습니다.

400명이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연결에 대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네트워크를 즐기고 꾸준히 만들어가는 게 흥미롭습니다. 원래는 혼자 작업하고 혼자 글 쓰는 일만 했어요. 그런데, 제주에서는 필요에 따라 연결과 확장이 이루어지더라고요. 외국에서 살며 이제는 잊혀진 줄 알았는데, 기억해주는 걸 고마워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제주 친구들은 반대로 외부와의 연결에 대한 갈망이 있고요. 저는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도 외국에서도 살아봤어요. 제주에서 갑갑하고, 서울에서 치이고, 외국에서 외로워봤단 이야기죠. 외국생활을 오래 하며 여행 다닐 일도 많았는데, 어딘가를 가면 대부분 작가들을 만나고 스튜디오를 방문합니다. 그런 것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아요. 기자생활을 통해 훈련이 된 게 큰 것 같아요. 연락해서 시간되면 만나고, 인터뷰 하는 게 자연스럽거든요. 또, 제주에서 활동을 해 보니 동아시아를 출입하기가 참 좋습니다. 여기서는 중국이나 일본을 가는 건 비행편이나 시간 등으로 볼 때, 서울을 가는 것과 비슷해요. 제주가 그런 면에서 확장성이 있어요. 섬이 고여 있는 게 아니라 확장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갇혀있고 일할 게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뉴욕에서는 집세나 물가로 인해 운신의 폭이 좁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씨위드 창간을 보며 괜한 우려가 들기도 했습니다. 종이매체의 영향력이 많이 사라진 상황에서 조금 무모한 시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많은 경우 온라인 매체를 선호하게 되지 않나요? 비용에서든 제작에 드는 노력에서든. 역시 해외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해야겠어요. 외국에서 3, 4년 이상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면 엄청난 고립감이 들어요. 그 친구들을 찾아주고 연결해주니 좋아하고 고마워들 하더라고요. 씨위드는 작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 친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거주하기 위해서는 비자나 영주권 등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비자나 영주권을 받는데 출판 인쇄물은 큰 공신력을 주거든요. 그래서 영문판을 무리가 되어도 만들어요. 영미에선 인쇄비가 비싸서 잡지를 오프라인으로 잘 안 만드는 편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제주에 와서 잡지와 책을 만드는 게 제가 잘 할 수 있고 쉬운 일이었어요. 전시를 만드는 일은 물리적으로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드는데, 그에 비해 이 일은 상대적으로 편하고 좋죠. 비용과 관련해서는 일단 기금을 받기도 했고, 3호는 소셜펀딩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어요. 작년에는 가격을 찍긴 했는데, 거의 무료배포를 했습니다. 3호는 기금을 받지 못해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더욱 판매를 고려하게 됐어요. 팔려면 잘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볼륨도 커졌고요.(씨위드 3호는 220*270mm 대형 판형에 431쪽이라는 두께를 자랑한다) 지금껏 모아왔던 자료들에 새롭게 모은 작가 포트폴리오 등을 더해서 만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작가들이 열심히 보내줘서 생각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었어요. 한글로 2,000부, 영문으로 1,000부를 찍었습니다.

씨위드 3호 교정 작업 모습

씨위드 1, 2, 3호

씨위드의 유통에 대한 궁금증이 많습니다. 독립서점이나 편집숍 등에 유통을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별도의 기준 같은 게 있나요? 알다시피 독립서점은 수익이 잘 안 되죠. 1, 2년 운영하고 문을 닫는 경우도 많고요. 독립서점들이 씨위드를 비치해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책을 입고하면 관리를 해야 하고 디피도 해줘야 하잖아요. 이번에도 서울에서 독립서점 몇 군데에 입고를 하고 왔어요. 개인적으로 서점 주인들과 네트워킹이 되어 있어서 잘 받아주는 편이라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또, 제주에 계신 분들은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측면이 있어요. 저도 독립서점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제주독립서점 책방지도를 찍어서 무료로 배포하고 있습니다. 벌써 3쇄를 찍어 몇 만장이 유통됐어요. 씨위드 3호는 독립서점에도 유통하지만, 최초로 YES24나 알라딘 등 온라인 서점에도 입고를 했습니다. 많이 팔 거예요.(웃음)

온라인 서점에도 입고했다고는 하지만, 씨위드로 많은 수입을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수익을 위한 활동은 어떤 일들을 하나요? 큐레이터로서의 활동도 궁금합니다. 맞습니다. 씨위드만으로는 수익을 낼 수 없어서 다양한 전시 프로젝트를 하면서 인건비를 충당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넥슨 문화다양성펀드에서 후원하는 <아미다전:유성> 전시를 맡아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연말에는 제주도청 환경정책과와 함께 버드하우스 프로젝트를 하게 됐어요. 오사카에서 시작된 건데, 10월에 전시를 오픈할 예정입니다. 새집(둥지)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다양한 생명체들이 조화롭게 번영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통해 인간과 환경의 건강한 균형과 공존을 표방하는 내용입니다. 컨벤션센터와 제주시 원도심을 이원화해서 하는 큰 전시가 될 거예요. 큐레이터로서 전시기획을 맡고 있습니다.

지역, 특히 제주에서 활동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아마도 다시 씨위드 이야기로 돌아가지 싶네요. 제주에 있는 제 또래들은 제주에 돌아오면 패배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요. 육지로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겁니다. 저는 제주에서의 삶이 좋고 만족스러웠어요. 그런데 대학 때문에 서울로 갔고, 직장이 있어서 서울에 있었고, 더 공부를 하기 위해 뉴욕에 갔습니다. 뉴욕에서 공부를 마치고도 5년을 더 지냈어요. 그 때, 나는 제주가 좋은데 왜 이렇게 떠돌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직장이 없어서 제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프리랜서로는 뉴욕이 훨씬 유리했거든요. 그러다 아라리오뮤지엄이 생겨서 제주로 오게 됐어요. 제주에선 프리랜서로 못 살 것 같았는데, 와서 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아무도 안 만들어줘서 제주에 할 일이 없던 거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뭘 만들면 후배들도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씨위드를 만들었습니다. 한 미술평론가가 씨위드를 두고 ‘제주를 경유해서 세계 여기저기를 떠도는 이들의 교포잡지’라고 이야기해줬는데, 맞는 말이에요. 제주를 경유하지만, 제주출신이건 아니건, 제주에 있건 없건 그들을 소환하는 잡지인 거죠. 우리는 ‘지면고향’이란 말을 쓰고 있어요.

지역이라서 겪는 어려움이나 돌파해야 할 지점이 있나요? 딱히 제주라서 겪는 어려움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기관과 일을 할 때 어렵다는 생각은 가끔 합니다. 사립미술관에서 일해보기도 했고 지금도 기업이나 도청, 문화재단과 등 다양한 공공기관과 일을 합니다. 의사결정과정이나 전체 프로세스 등을 돌이켜 봤을 때, 기관과 일을 하는 게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가끔은 시스템이 청년을 활용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혹시, 청년으로 호명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나요? 연장선상에서 청년 예술가, 기획자 지원정책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 사실 저는 청년이라는 생각이 없어요. 제주에선 청년주기가 좀 긴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휘둘리진 않거든요. 그런데 활동하는 20대 친구들을 보면 그런 느낌을 받곤 합니다. 저는 거절할 건 거절하고 정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젊은 작가들은 가끔 동원된다는 느낌을 받아요. 기관에서 공공지원을 받은 이들만 동원하고, 새로운 발굴에 게으른 게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관에서 주도하는 사업들에 그런 일종의 정체가 있는 것 아닐까 해요.

씨위드 4호 발간을 포함해 앞으로의 계획이나 활동목표에 대해서도 이야기 부탁드려요. 씨위드 3호를 다소 무리하며 만들었기 때문에, 4호엔 다시 가벼워져 볼까 합니다. 단행본 형식으로 디자인해서 내용도 실하고, 유통에도 유리하고, 소장가치도 있도록 만들어 볼까하는 기획단계를 밟고 있어요. 올해 하반기엔 개인적으로 3번째 단행본이 나옵니다. <그림여행>이라는 책인데, 뉴욕 말고 전 세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현대미술 씬을 취재한 이야기를 담았어요. 씨위드처럼 마이애미-홍콩-베니스-서울-제주를 왔다갔다 종횡무진 합니다. 시스템에 금(균열)을 내고, 질문을 하게하고, 기성세력을 견제하고, 획일화된 일들을 다소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일을 좋아해요. 다만 엉망진창에도 나름의 도덕성과 질서는 있어야겠지요. 나름의 카오스모시스(chaosmosis, 혼돈 속 질서)라고 할까요. 가족들은 절 히피라고 부르고, 미술계통이 아닌 친한 친구들은 대체 뭘 하고 사는 사람이냐고 물어요. 물론 가끔 저도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를 때가 있습니다.(웃음) 내년 계획이요? 조금 조용하게 지내면서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