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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시작한 축제, 서른 한 해
예지 존(Jerzy Zoń)_울리카 국제 거리극 축제 예술감독축제가 시작되면 오래된 도시의 풍경이 바뀐다. 이전에 알던 곳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시민들에게 무대로 이야기를 건넨다.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크고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크라코프(Kroków)의 울리카 국제 거리극 축제(ULICA The International Festival of Street Theatres in Krakow)다.
‘울리카(Ulica)’는 폴란드어로 ‘거리’를 의미한다. 이름부터 ‘거리’를 내세우고 있는 이 축제는 크라코프의 오래된 광장과 골목, 공원과 도시 곳곳을 무대로 폴란드를 비롯한 세계의 거리극 작품들을 소개하며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극의 장이자, 어느덧 서른 한 해째를 이어오고 있다. 크라코프의 극단 KTO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극단의 연출이자 대표로 활동 중인 예지 존(Jerzy Zoń) 축제 예술감독을 만났다.
울리카 국제 거리극 축제를 운영하고 있는 극단 KTO를 소개해 주세요. 첫 시작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이들과의 작은 모임이었어요. 연극을 해보려고 시작했던 모임이 극단이 되었고, 작품이 조금씩 성장하며 오디션을 통해 단원들을 뽑아 1977년 설립 이후, 40주년이 넘는 지금까지 크라코프에 연습실과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리극과 연극을 하는 단체에요. 작품의 제작과 공연뿐만 아니라 1988년부터 시작한 거리극 축제를 30년 이상 이어오고 있고, 2005년에는 크라코프 시에서 지정하는 시립극단이 되었습니다.
민간 극단이 축제를 운영한다는 것이 특이하네요. 사실 극단에서 제작한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축제를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초반에는 우리 작품을 소개하지 않고 다른 도시의 극단들을 초청하는 데에 집중했죠. 극단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폴란드의 한 도시에 있는 축제에서 제대로 된 거리극 축제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도시가 연극으로 가득 차는 것을 봤죠. 이 축제를 크라코프에서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다음 해에 비슷한 형식의 프로그램들을 시도했어요. 그 때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던 축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 도시는 여전히 거리극을 이어가고 있어요. 축제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고, 다만 거리극이 좋아서 축제를 시작했어요.
이 축제는 크라코프 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크라코프 시는 우리가 축제를 꾸준히 이어가게 해주는 동반자입니다. 물론 축제에는 다양한 후원 기업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재원은 시 정부의 예산으로 충족됩니다. 때로는 예산이 적었던 적도 있지만, 한 번도 축제를 못한 적은 없어요. 크라코프는 폴란드의 예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여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편에 속합니다. 한 해에 도심 광장에서 진행되는 행사만 해도 수 백 가지는 넘을 거에요. 하지만 거리극은 우리 축제가 유일합니다. 이러한 풍요로부터 올해에는 조금씩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축제 기간 중 크라코프 근교의 소도시에 아웃리치 형태로 거리극 공연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올해는 아우슈비츠(Oświęcim)와 타르노프(Tarnów)에서 시범적으로 몇 개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한국과 오랜 기간 교류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올해 축제에는 여러 한국 작품을 초청하셨죠? 우리 극단은 세계의 여러 도시들을 투어하며 공연을 올립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나라에요. 한국과의 첫 교류는 2006년이었는데, 우리 극단의 작품이 과천한마당축제에 초청받아 <시간의 향기>, 몇 해 뒤에는 <눈 먼자들>이라는 거리극 작품을 공연했었습니다. 이후에는 또 다른 축제들에 초청 받아 공연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한국 작품들도 많이 보게 되었죠. 이번에 초청한 작품들은 모두 제가 직접 본 공연들입니다. 2017년에는 서울아트마켓에 델리게이트로 참여해 한국의 예술가들을 만나, 올해 축제에 초청하고자 하는 공연 프로그램들을 확정했습니다.
매해 축제 공연들을 섭외하고 기획하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리는 최근 몇 년 간 축제의 공연을 ‘포커스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구성하기 시작했어요. 유럽의 돈키호테 작품들을 한 데 모으는 일에 집중한 해도 있었고, 성경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들을 구성한 해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거리극을 여럿 초청하기도 했고요. 작년에는 책을 주제로 한 공연이 축제의 주요 테마가 되었어요. 그리고 올해는 ‘아시아’입니다. 축제의 테마를 ‘Wind from the East’로 정했어요. 한국과 싱가포르, 키르키즈스탄 등 전통과 현대를 가로지르는 여러 작품들로 구성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의 작품이 총 네 작품으로 가장 많고, 또 비중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 한국과 호주의 공동창작 작품인 <프레임시프트>와 비주얼씨어터 꽃의 <마사지사>, 씨드댄스프로젝트의 <너와 나>,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차밍 제이의 <스모키 재즈 클럽>이 초청 받았다.
한국의 작품들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폴란드의 관객들에게 아시아의 주요 거리극 단체를 소개하는 것이 포커스 프로그램의 전부입니다. 올해 아시아 포커스 프로그램에 구성한 한국 작품들은 큰 규모의 공연부터 작은 공연까지 모두 의미가 있어요. 비주얼씨어터 꽃의 <마사지사>는 워크숍을 통해 폴란드의 시민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많은 기대가 됩니다. 유럽의 문화, 그리고 연극적 전통과는 다른 아시아의 색깔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이 공연의 장소를 선정하는 데에는 특히 고민을 많이 했죠. 유럽과 한국이 어떤 교류를 해왔는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아 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동양의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작품에 드러나며, 연극의 언어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드러내며 아시아와 유럽의 접근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스무살에 처음 만났던 예지 존 감독은 한국에서 온 축제 전문가 일행에게 집에서 직접 담근 보드카 한 병을 선물로 건넸다. 그 술 한 병을 숙소에서 조금씩 나눠 마시며 밤늦도록 연극과 축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축제를 시작해서 서른 한 해째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사람. 그 해에 크라코프에서 처음 보았던 그의 축제에는 역사와 현재가 공존했으며, 서정과 환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문명의 야만도 잔인하리만큼 생생하게 담겨 있었고, 십년이 넘은 지금 다시 찾은 축제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그 정수를 이어가고 있었다. 좋아서 시작한 축제, 어느덧 서른 한 해. 축제는 이제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
임현진은 독립 기획자로, 예술과 도시, 공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여러 거리예술 축제, 창작단체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거리예술 국제교류와 공동창작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으며, 국내 작품의 해외 진출을 돕는 다리가 되고자 한다. 사단법인 한국거리예술협회의 운영위원으로 매년 서울에서 개최되는 거리예술마켓 사업을 기획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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