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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회 사이에 변화 불어넣기
난 반 호트_유럽공연예술회의(IETM) 사무총장IETM(International Network for Contemporary Performing Arts, 유럽공연예술회의)은 1981년 출범한 국제 비영리 네트워크로, 전 세계 50여 개국 500개 이상의 기관과 개인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회원사 간 혁신적인 컨템포러리 공연 작품의 교류 및 협업을 도모하고 네트워킹을 촉진하기 위해 정기총회 개최, 연구 및 출판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IETM은 매년 유럽 도시를 순회하며 정기 총회를 연다. 유럽 외 지역과는 위성회의*와 카라반*을 통해 교류한다. 올해 서울아트마켓(PAMS)를 찾은 IETM의 난 반 호트 (Nan van Houte) 사무총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최근 유럽 공연계의 동향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 위성회의 : IETM의 위성회의는 정기 총회와 달리 한 해에 여러 차례, 다양한 국가에서 진행된다. 20-200명이 참가하며, 위성회의 개최국 혹은 해당권역 공연계의 주요 이슈와 특정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 카라반 : IETM의 카라반 프로그램은 특정 도시, 국가 혹은 권역의 공연예술계를 리서치하는 단기여행 프로그램이다. 최대 25명이 참가할 수 있으며, 방문지의 주요 극장, 현지 아티스트 및 문화계 관계자들과 교류한다.
IETM의 사무총장을 맡기 전에 어떤 작업들을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컨템포러리 음악극 단체의 드라마터그로 공연계에 첫 발을 들였습니다. 이후 암스테르담의 프라스카티 극장(Theatre Frascati)의 총감독으로 15년 간 활동하며 연극 및 다원분야의 국제교류, 관객개발, 젊은 아티스트 지원 등 다방면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2008년부터는 네덜란드 시어터 인스티튜트(Theater Instituut Nederland)의 책임 프로그래머로 활동했습니다. 1999년부터 IETM 멤버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1년 간 의장직을 맡은 바가 있습니다. 2013년에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어 내년 3월까지를 임기로 활동하고 있지요.
IETM의 사무총장을 맡은 이후 지난 5년간의 유럽 공연계의 주요한 변화와 이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럽 공연계에서 IETM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요? IETM은 언제나 사회적 이슈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예술가들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사무총장으로 부임했을 당시에 유럽엔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있었습니다. 경제위기가 그 중 하나였죠. 각 국의 문화계 예산이 삭감됐고, 소수의 취미활동과 같은 현대예술을 세금으로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됐습니다. 또한 유럽 내에 고조되는 민족주의 역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국제 교류보다 국내의 문제에 집중하고 강력한 민족적 정체성을 다시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사이 중동 난민의 문제는 더욱 불거졌습니다. 난민에 대한 공포는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각 국은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죠. 사람들은 더욱 방어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인종차별 역시 확산되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을 더욱 고민하게 됐습니다.
최근 사회 전반에 경종을 울린 미투 운동(Me Too movement) 역시 문화예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연계 내의 여러 가지 피해사례가 연달아 폭로됐죠. 우리의 창작환경을 돌아보고, 예술가들을 위한 안전한 작업 환경이 어떻게 조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한 현장에서의 성비 균형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죠.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 공연계엔 사회적 이슈들 외에도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창작과 생활예술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공연 창작에 디지털 기술을 적극 접목할 것인지, 무대예술이 갖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지켜낼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지속됐죠. 공연은 단순하게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것들이 사무총장으로 부임한 이후 지난 5년간 발생했습니다. IETM은 지난 몇 년간 이런 이슈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뤄왔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특히 젊은 예술가들은 이런 방향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지지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낼 때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지요. IETM은 유럽 문화예술계의 이슈에 대해 국제적인 담론을 형성함으로서 예술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각국의 문화 기관과 정책입안자들에게 이러한 이슈에 대해 끊임없이 우리의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예술과 사회 사이의 큰 장벽을 허물고 변화를 불어넣는 것,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미션이자 비전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지난 몇 년간 난민 문제가 유럽의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예멘 난민 문제 등으로 여러 의견이 충돌하고 있기에 남의 일처럼만 느껴지지 않는데요. 그런 이유인지 몰라도 최근 유럽 예술가들의 다수 작품이 ‘난민’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유럽 각 국의 정부는 보수화되고 있는데, 이런 정치적 변화가 유럽 예술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시는지요? 이미 몇몇 국가에서는 그에 대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폴란드, 그리스, 크로아티아, 루마니아의 경우 난민들과 함께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은 정부의 지원에서 배제되고 있어요. 일련의 블랙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죠. 또한 자신들의 예술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문화예술기금을 신청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예술가들도 있습니다. 그나마 북유럽이나 서유럽의 경우는 나은 편입니다.
그럼 IETM에서는 이와 같은 사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지요? 그렇죠. 한 예로 최근 체코 정부가 프라하의 현대예술을 창작하는 주요극장 중 한 곳의 예산을 대폭 삭감했습니다. 해당 극장이 난민들과 함께 작업하고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을 주로 다뤄왔기 때문이죠. 우리는 성명서를 통해 유럽 공연예술계의 최대 네트워크인 IETM과 회원기관, 공연관계자들이 체코 정부의 문화정책 방향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이런 대응이 효과가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IETM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공연예술인들의 플랫폼입니다. 하지만 유럽을 넘어 국제적인 연대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위성회의를 개최하는 것이죠. 현지의 공연관계자, 문화정책자를 만나고 네트워크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국제적인 담론을 형성함으로써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앞서 유럽공연계의 미투 운동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는 올해 한국 공연계의 주요 화두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유명 연출가와 배우들이 연루되어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 바가 있죠. 최근 얀 파브로(Jan Fabre)의 성폭력 문제가 폭로되며 다시 한 번 미투 운동에 대해 환기시켰습니다. 현재 유럽 공연예술계는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미투 운동은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묻혀왔던 것들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죠. 피해자들은 그간 진실을 폭로하길 주저해왔어요. 성적 수치심을 느끼거나, 작업하는 데에 있어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경쟁적인 예술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성별 간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상하관계에서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가해자들은 미디어를 통한 폭로로 사회적인 지탄을 받은 정도입니다. 그들의 향후 작업에 영향이 있겠지만, 법적인 처벌은 대부분 증거불충분의 사유 등으로 피해갔습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예술학교에서 교사들이 저지른 성폭력이 크게 문제된 바가 있습니다. 사건발생 이후에 학교에선 ‘학생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지침서’를 만들어 교사들에게 배포했어요. 아일랜드, 스웨덴 등의 국가에선 제도를 구축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 뮌헨에서 개최되는 IETM 회의의 주제가 ‘유럽공화국(Res Publica Europa)’입니다. 유럽의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따른 주제 선택인 듯합니다. 가을총회에서 중요하게 다룰 의제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총회의 주제는 총회를 개최하는 국가에서 제안합니다. 현재 유럽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봉착해있습니다. 왜 이러한 상황을 맞이했으며 대안은 무엇인지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죠. 유럽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어지고 극우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사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발생한 것이라고 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정치인들에게 속아왔고, 시스템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거죠. 최근 벨기에에서 25세 이하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조사를 살펴보면 25%에 달하는 응답자들이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젊은 세대가 스스로에게 잠재되어 있는 힘을 믿지 않고 우경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예술이 우리 사회에 어떤 담론을 형성하고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유럽공화국’을 가을총회의 주제로 삼게 됐습니다.
그 동안 문화예술 영역의 국제교류가 아트마켓과 기관이 주도하는 행사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국제교류는 민간의 영역과 현장의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국제교류의 플랫폼 형태에도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교류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솔직히 저는 아트마켓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여전히 다양한 마켓들이 존재하지만 국제교류는 작품을 사고파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장기적 파트너쉽을 구축하는 데에 중점을 둬야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선 ‘공연을 파는 장(場)’이 아닌 ‘담론을 형성하고, 서로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IETM도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시작됐고, 참가자들에게도 작품과 관련된 비즈니스 활동은 자제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적 교류는 동등한 위치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 국의 예술가와 기관 등을 연결해 줄 수 있는 국제교류 기획자 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저희는 국제교류 활동에 새롭게 진입한 기획자들을 위해 2015년부터 매년 여름 IETM 캠퍼스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신청자 중 20-25명을 선발하여,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커뮤니케이션, 협상의 방법, 기금 조성 전략, 검열 등 다방면의 주제에 대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밀도 있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IETM 캠퍼스가 신진 기획자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추후 작업 과정에서도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년 퇴임 이후엔 어떤 계획이 있는지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그리스의 도시에서 축제를 조직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요. 축제는 처음이라 여러 면에서 도전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은퇴할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상근직으로 일 할 계획은 없어요. 다만 죽는 날까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싶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내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요. 그들이 관심이 있다면 말이죠.
이희진은 프로듀서그룹 도트의 프로듀서로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진출 및 국제공동제작을 기획해오고 있다. 극단 여행자, 크리에이티브 바키, 공연창작집단 뛰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등 한국 공연예술 단체의 해외투어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고, 한국-인도 공동제작 <바후차라마타(2014)>, 한국-독일 공동제작 <이방인 이피게니에(2016)>, 한국-영국 공동제 <미인:MIIN(2017)>, 한국-호주 공동제작 <낯선 이웃들(2017)> 등의 해외공동제작 작품을 프로듀싱했다. 또한 2018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Stuckemarkt 한국 포커스 프로그램의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국내의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굴하는데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