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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감각으로 바라보고, 함께 성장한다!
천재현 정가악회 대표2009년 노동부가 주도하고 문화부가 협력하면서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사회적기업 바람이 불었다. 예술가에게 국가가 월급을 준다는 기대 섞인 오해와 함께 50여 개의 문화예술 단체가 예비 사회적기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정가악회도 그중 하나였다.
사회적기업 지원 정책은 일몰제 정책이기 때문에 연차별로 지원의 규모가 줄어들고, 단체의 자생력에 대한 요구는 높아진다. 해마다 커지는 단체의 자부담과 행정의 까다로운 틀로 인해 많은 단체들이 지원 기간 중간에 떨어져 나갔다. 최대 지원 기간인 5년을 마치는 시점까지 사회적기업으로 남아 있던 단체는 손꼽을 수준이었다.
2014년 말 정가악회는 그 5년을 채우고 사회적기업 지원 제도를 졸업했다.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대단한 졸업장을 받고 어디 좋은 자리로 가는 그런 졸업이 아니기 때문에 2015년부터는 오롯이 자생이라는 칼바람 부는 땅에 서야 했다.
그로부터 다시 4년이 지났고, 정가악회는 여전히 모든 단원에 대한 월급(생활임금) 체계를 유지하면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녹록지 않을 그 길을 유지하고 있는 천재현 대표를 만나 살아 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2018년 한 해 130회에 이르는 공연을 했다고 들었다. 고정비가 많이 드는 월급제를 유지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노동이었을 텐데, 굳이 월급제를 유지하는 이유가 있나?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월급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상근 고용, 지속적으로 함께함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는 예술의 완성도와 가능성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효하다. 하지만 월급제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방금 던진 질문 자체를 좀 다르게 보았으면 한다. 김용균 사건을 비롯해서 비정규직의 실태와 안타까움에 대해 사회 전체가 이야기를 쏟아 내고 있음에도, 예술가들의 삶은 그런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사회가 먼저 규정한다. 무슨 권리로, 왜?
다음 달에 돈이 없을 것이라는 불안을 예술가는 계속 안고 살아가도 되는가? 예술가의 삶과 노후에 대한 질문은 사회적 의제가 아닌가? 그것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져야 순서가 맞는 것 아닌가? 기획자는 취직해서 월급을 받는 게 당연한데, 예술가에게는 그런 삶의 조건이 없다는 것에 대한 질문과 행동은 왜 없을까? 오히려 이게 문제인 것 같다.
월급제로 하면 돈벌이를 위한 알바 대신 예술 창작을 위한 시간이 확보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가장 핵심은 우리도 내일의 밥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그것을 국가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라도 만들어서 먹고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다. 팀에서 독립해서 잘 살 수 있다면 환영하고 응원할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탁월함을 통한 생존 외에 대안적인 삶의 형태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서 이런 삶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다가 망할 수도 있다. 몇 년 전에는 블랙리스트 때문에 대부분의 지원 사업에서 떨어졌을 때, 2개월 정도 월급을 못 줘서 울며불며 잠시 헤어져 있기도 했었다. 고용과 소득의 안정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하는 단체에 대해 '잘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원을 축소하는 것이 불만이라는 얘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공생의 가치와 범위를 넓히면 앞서의 얘기와 충돌하는 것 아닌가? 일각에서는 몇몇 단체의 독식으로 보기도 하던데. 오히려 반대로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잘하고 있는 단체가 지원금을 축소하거나 끊었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사례를 찾아보고 연구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관심은 없다. 지원금에서 독립해서 잘 살더라, 뭐 이런 예시에 대한 질문과 논의는 없지 않나? 더 나아가서 같은 논리로 국공립 단체는 왜 돈을 줘야 하나? 잘해서 더 지원할 이유가 없다면, 뛰어난 사람들 뽑아서 만든 국공립 단체부터 지원을 중단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에는 보조금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의 문제가 드러난다. 보조금은 뿌려지는 돈, 겨우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면서 연명하게 만들어 주는 구휼 자금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니 ‘너만 먹으면 되냐?’ 그런 식의 발상이 나온다. 만약 이것이 진짜 예술을 위하는 돈이라면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면 되지 않겠나? 잘해서 그만 주자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술의 가치를 놓고 고민하면 된다.
예술가의 생존이 문제라면 이건 복지의 측면이기 때문에 다른 차원에서 논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술 작품 지원을 놓고 많이 받았네 오래 받았네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제도와 사업의 취지가 작품 지원에 있다면 작품으로 평가를 해야지 단체를 두고 자주 받았다 크게 받았다 등으로 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수출도 가능한 국제 경쟁력이 있는 좋은 작품을 키우자고 하면서 정작 국제 교류 플랫폼에서는 형평성의 문제가 논의되는 맥락이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런데 정말 웃픈 것은 이 바닥이 너무 가난하다 보니 예술가들 스스로가 많이 받은 놈은 더 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기금은 나눠 먹는 거고 연명하라고 주는 돈이라는 시각 자체가 문제다. 그러니 작품으로 승부를 보는 사례가 거의 안 나오고, 기금에 의존해서 실제로 연명만 하는 수준이 되는 거다.
단체 활동 외에 국악 생태계의 조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 온 것으로 안다. 단체 간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있고, 최근에는 <노느니 프로젝트>라는 국악인 집담회도 몇 차례 개최한 것으로 안다. 지난 수년간 그런 노력을 해 오는 가운데 국악의 생태계는 얼마나 성장하고 분화했나?
농사에 비유해 보자. 여기에 이런저런 나무를 심고 그렇게 해서 밭이 하나 만들어지면 그다음에 그 밭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아직 밭이 없다는 것이다. 기획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밭도 없는데 이 밭을 만들겠다는 기획자는 없고 다들 소일거리를 찾아서 여기저기 다니는 격이다. 유목하는 기획자라고 할까나?
그리고 열매가 맺히기까지의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걸 기다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 단체를 운영하다 보면 3년 차 정도에는 어떤 이슈가 생기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10년 차 정도에는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지 않나? 농사꾼이 아닌 사람은 그저 멀뚱히 ‘왜 열매가 안 열리지’라고 하지만, 농사를 오래 지은 사람들은 지금이 씨 뿌릴 때인지, 밭을 갈 때인지, 열매가 열릴 때인지, 저 땅은 좀 쉬어야 할 때인지 등에 대한 감을 가지게 된다. 이게 일종의 경영의 감각인데, 이런 농부의 눈, 경영의 감각을 가지고 예술 단체를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나 싶다. 그런 사람이 없다. (참고로 정가악회의 미션은 “국악의 밭을 일구는 건강한 농부”이다.)
하지만 10년을 기다리면 잘 될 거라는 믿음이나 확신 없이 그만큼 버틸 수 없는 것 아닌가? 스타트업들이 도전하고 버티는 것은 대박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장을 목도하기 때문일 텐데, 예술에서 그런 기대를 가질 수 있는가? 10년을 기다려서 대박 난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농부의 마음이 아니다. 성공할지 아닐지를 장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때에 맞춰서 해야 할 일의 사이클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밭을 일구는 사람은 그런 삶을 살아 봐야 하는 것이다. 결과에 대한 믿음이 아닌 과정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정작 젊은 국악인들도 이 생태계에 대한 기대와 믿음, 묵묵함을 버리는 것 같다. 최근에는 젊은 국악 전공자들 스스로가 국악인이 아닌 음악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예술에 장르를 구분을 하는 게 온당함이라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벗어나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다. 어떻게 보는가?
음악인이라. 멋있네!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기초 예술로서의 전통음악을 하는 단계가 있을 수 있고, 그보다 좀 더 넓은 음악의 영역으로, 또 때로는 예술 일반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고 본다. 서울 사람인 동시에, 한국인이고, 아시아인이고, 지구인인 것 아닌가? 정체성은 관계와 맥락에서 형성되는 것이니까, 자기가 속한 맥락에 맞게 정체성을 취하면 될 문제라고 본다. 물론 현재의 트렌드에는 겉멋도 있고, 전통이라는 장르에 대한 지긋지긋함 때문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전통 혹은 국악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모으려는 사람들이다. 보통 그렇게 가두려는 사람들은 모여진 집단의 머릿수가 자기 권력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국악이라는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철옹성을 다음 세대에 강요하고 있으니 젊은 연주자들 입장에서는 벗어나고 싶을 수 있다. 젊은 연주자들에게 ‘그건 국악이니 아니니, 그런 옷차림과 머리 모양은 국악인이니 아니니’라고 따질 일이 아니다. 그냥 다양한 정체성을 탐색하도록 권하는 게 맞다. 오히려 국악이라는 이름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그 저의가 무엇인지 물어봐야 한다.
중견과 원로의 역할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겠다. 사람에게 생애 주기가 있듯이 예술가의 활동에서도 생애 주기가 있을 것이다. 중견이라 볼 수 있는 대표님 생각에는 중견으로서 본인의 역할을 무엇이라 보는가?
사람들은 나를 30대 중반 정도로 본다. (침묵... 그리고 다시 인터뷰) 딱히 중견의 역할에 대한 규정 같은 것은 없다. 그냥 10년 산 사람이 5년 산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얘기가 있고, 20년 산 사람이 10년 산 사람에게 해 줄 얘기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치가 나눠질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
나의 주 관심은 사람의 성장인데, 문제는 성장도 독점된다는 것이다. 정가악회든, 어떤 팀이든, 개인이든 잘 나가게 되면 돈이 들어오고, 돈이 들어오니까 또 작품에 더 쏟아부어서 성공을 지속한다. 일종의 선순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예술가가 왜 잘 나갈까를 생각해 보면 특정한 경험을 통해 공부하고 성장한 계기가 있다. 그렇다면 그 경험이 무엇인지 골똘히 살피고, 사회적으로 나누고, 할 수 있다면 사회 시스템으로 전환해도 모자랄 판에, 좋은 경험을 밥그릇처럼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청년 세대에게 좀 넘겨야 하지 않나 싶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져야 현재의 삶에 대한 성찰과 성장의 욕구, 방향이 생길 텐데, 그런 성장은 질적으로 좋은 경험을 통해 생기는 것 아닌가?
아직 단체 안에서도, 국악계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은데, 경북 의성으로 주 활동지를 옮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로컬이 유행이라서 가는 것은 아닐 텐데 본인에게 지역은 어떤 의미이고, 왜 가는가?
사회 전체적인 변화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예술 정책 관련해서 얘기하는 자리에 가 보면, 전국 단위 예술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나 지역의 예술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나 내용이 똑같다. 예술은 그냥 다 서울이다. 이미 예술 과포화 상태인 서울이 예술의 유일한 모델인 듯하다.
그래서 정가악회가 어디에서 돈을 버나 자세히 살펴보니, 서울에서 돈을 버는 게 아니더라. 축제, 순회공연 등 지역에서 주로 돈을 벌었다. 실제로 예술인 모두가 서울에서 생계를 다 해결할 수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지역에도 좋은 기획자가 있어야 하고 예술적 리터러시가 높아져야 한다. 그래야 예술가 전체가 살아갈 지평도 넓어진다. 그간에는 지역이 정책적 시혜의 대상일 뿐이었던 것 같은데, 결국에는 예술가가 살아가려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땅을 넓히고 개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역에서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지역에는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수백억씩 돈이 들어가고 있다.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고 건물을 마구 짓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사람에게 자원을 쓰는 방향으로 가 보자고 주장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참 난감한 것은 쏟아지는 돈을 사람에게는 넉넉히 쓸 수 있는 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인건비는 보조금 규정으로 3~4만 원 정도로 제한되어 있으니, 그걸로 생계라도 해결할 만큼 벌게 하려면 땀나도록 뛰게 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의 성장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돈을 좀 더 쓴다고 토목건축에 수백억 쓰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크겠나?
마지막 질문이다. 예술 작업, 예술경영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내 삶의 이유를 딱히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냥 살아지는 것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다는 것 정도 아닐까? 물론 나도 불안이 있다. 늙음에 대해, 내가 죽었을 때 남겨지는 가족에 대한 불안 등이 있다. 하지만 삶의 이유는 모호해도 해야 할 일들은 그나마 명확히 보이니, 그것들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정가악회는 분화하고, 성장하고 있다. 그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들도 단체와 함께 성숙해 가고 있는 것 같다. 현시점에서는 2018년처럼 130회 공연이라는 가혹한 수준의 노동 외에 다른 방식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방안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단체의 성장, 생태계의 성장, 그 속에서의 사람의 성장은 기존의 구조와는 질적으로 다른 지평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생태계와 질서가 출현하는 것은 낭만적인 상상 같지만, 돌아보면 그러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지평의 끝 선에 정가악회와 천재현 대표가 서 있기에, 부디 꿋꿋하기를 기원한다.
설동준은 학부 때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후 아무 관련 없는 예술 분야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서른 살에 국악 단체에서 기획 및 단체경영 업무로 예술업에 발을 들였고, 현재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예술, 과학기술, 신학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공학을 전공하면서 사람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생활문화, 인력양성, 문화예술교육 영역에 대한 연구 및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