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웹진에 실린 글의 내용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TEL 02-708-2293 FAX 02-708-2209 E-mail : weekly@gokams.or.kr
주 52시간 노동과 문화예술의 미래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됨에 따라 주당 근무시간의 한계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었다. 이 제도는 권고규정이 아닌 강행규정으로 시행되어, 이를 위반한 사업주는 징역이나 벌금의 처벌 대상이 된다. 2018년 2월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라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었는데, 그동안 가졌던 계도 기간이 지난 3월 말로 끝나고 이번 4월부터 본격적으로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공기관에 적용된다. 30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기업 규모별 시행 시기 차등화에 따라 단계적으로 소규모 사업장까지 전면 확대될 예정이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도입이 가지는 사회적 의의는 한국 사회가 과로 사회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이 과로 사회라는 것은 여러 지표에서 확인된다. OECD 국가들의 노동 시간 추세 보고에서 2017년 한국은 37개국 중 멕시코, 코스타리카 다음으로 가장 노동 시간이 긴 나라였다. 또 다른 OECD 통계인 일과 삶의 균형(WLB: Work-Life Balance) 지표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타난다. 일과 삶의 균형 지표는 주 50시간 이상 장시간 근로자의 비율과 여가 및 개인적 돌봄에 쓴 시간으로 산출된다. 한국은 주 50시간 이상 장시간 근로자의 비율이 20.8%로 OECD 평균인 13%에 비해 크게 높았고, 여가와 개인적 돌봄에 쓴 평균 시간은 14.7시간으로 OECD 평균인 15시간에 비해 낮았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일과 삶의 균형 지표는 38개국 중 35위로 최하위권이고, 한국보다 지수가 낮은 나라는 터키, 멕시코, 이스라엘 정도였다. 과로 사회의 성격은 휴가 사용에도 잘 드러난다. 2016년 국민여가활동조사에서는 연가 휴가 일수가 평균 5.9일에 머물렀으며, 익스피디아(Expedia)가 2017년에 30개국 15,000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휴가결핍조사(Vacation Deprivation Report)에서 한국은 휴가가 부족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81%로 조사 대상 국가들 중 휴가 결핍 정도가 가장 높았다.
기업 쪽에서도 과로 사회의 상황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증가하였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매킨지와 함께 조사한 ‘한국 기업의 조직건강도와 기업문화 종합보고서’를 보면, 한국 기업문화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상습적 야근’이 제기되었다. 주 5일 중 평균 2.3일 야근을 하며, 3일 이상 야근을 하는 경우도 43%나 되었다. 특히 야근의 원인이 업무량 과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야근의 주원인은 비효율적 회의, 과도한 보고, 소통 부재의 일방적 업무 지시로 분석되었다. ‘야근의 역설’로 상습적 야근자의 업무 생산성이 일반 직장인에 비해 낮을 뿐 아니라 생산적 업무 시간의 길이도 짧았다.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의 77%가 글로벌 평균에 비해서 조직 건강도가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비합리적 기업문화에 대한 저항이 삶의 질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확산되었다. 밀레니얼 세대의 WLB 인식과 의미 있고 행복한 체험에 대한 강조가 사회 트렌드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시간은 이제 의미 있는 체험으로 전환되어야 할 자원으로 인식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합리적 기업문화를 젊은 세대가 수용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6년에 발표한 「청년들의 취업 눈높이 실태와 과제」에 따르면, 청년층의 취업 선호도에서 근무 시간 준수와 주 5일 근무를 취업 선택의 핵심 기준으로 생각하는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잡코리아의 직장인 대상 설문 조사에서도 근무 시간 준수가 좋은 직장 조건 1위로 나타났다.
주 52시간 근무 시행에 앞서서 이미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WLB 지향의 기업문화 개선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2018년 대한상공회의소와 매킨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2년간 기업문화가 개선되었다는 응답이 52%로 나타났고, 특히 야근 항목에서 개선 효과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기업문화 개선 과정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의 노동시장의 양극화 심화 가능성이 증폭되었다. 경총이 2017년 발표한 신입사원 채용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대기업의 취업 경쟁률은 전년 대비 7.8% 증가한 데 비해 300인 미만 기업의 취업 경쟁률은 12.1% 감소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기업문화에 바탕을 둔 장시간 근로가 과로 사회의 중요한 원인이었으나, 이제 이러한 비합리적 기업문화에 대한 저항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기업도 과거와 같은 야근의 장시간 근로 문화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WLB에 대한 가치 부여를 반영함과 동시에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진행해 왔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었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이 문화예술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 현재 여러 가지 전망이 교차하는 상황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쟁점을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문화예술계 전체의 활성화 가능성이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은 근무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여가 시간의 증가를 가져오고, 단축된 근무 시간을 보완하기 위한 추가 일자리 창출을 통해 고용 인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한편으로는 여가 활동의 장애가 되는 시간 빈곤의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문화예술을 관람하거나 좀 더 적극적으로 문화예술 교육을 받고 동호회에 참여하며 창작 활동을 수행하는 인구가 증가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직 활동의 어려움과 생활 불안정에서 벗어나 경제적 자원과 생활 안정을 갖추어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근로 인구의 증가가 기대된다. 실제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퇴근이 빨라지면서 문화예술 활동 증가를 시사하는 조사 결과들이 발표된 바 있다. 또한 정부와 지자체가 추진하는 생활문화예술정책이나 생활예술지원센터의 설립은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하는 공공지원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가지는 긍정적인 영향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 주 52시간 근무제에 따른 초과 수당 축소 및 가처분소득 감소가 부업과 겸업의 증가로 이어지면 오히려 여가 시간의 실제적 감소와 삶의 질 하락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근무 시간 감축에 따른 추가 고용이 나타나지 않을 개연성도 있다. 인건비 증가를 감당할 여력이 없는 기업에서는 고용 증대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우 일부 안정된 직장의 정규직 중심으로 문화예술 활동이 증가하더라도 총량에서는 문화예술 활동의 증가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일단, 2018년 「문화향수실태조사」에서는 문화예술 활동이 여러 측면에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둘째, 주 52시간 근무제가 문화예술 분야에 적용될 때 문화예술 조직의 합리화를 촉진시키는 모멘텀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예술인의 절대다수가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상황에서 주 52시간 근무제가 직접적으로 예술인의 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전통과 관행 혹은 즉흥적 결정으로 특징지어졌던 조직화된 문화예술 활동에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상당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문화산업은 그동안 대규모 자본 투자, 기업의 경영기술 접목, 글로벌 진출을 경험하면서 합리화의 수준을 높여 왔다. 이제 주 52시간 근무제의 도입으로 문화예술 기관들에 시간의 합리적 운영이 강제된다. 영화산업에서 정확한 스케줄링, 예측, 관리의 능력이 강조되는 것처럼, 이제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합리적 경영이 문화예술 기관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보몰과 보웬의 ‘비용 질병(cost disease)’ 논의가 보여 주듯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합리적 경영에 따른 생산성 증가가 얼마나 가능할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문화예술 활동의 본질적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창의성의 발현이 시간의 합리적 운영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도 속단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간과 노동의 불가예측성에 대한 부담이 아웃소싱을 통해서 문화예술 기관 외부의 프리랜서 예술가나 문화 기획자들에게 전가될 가능성도 예상된다. 이렇게 된다면 여가 시간 차원의 불균등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문화예술 기관 내 종사자들의 역량 약화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문화예술계 노동시장의 양극화 문제이다. WLB에 부합하는 기업문화의 변화 과정이 기업들 사이의 양극화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처럼, 문화예술 분야 일자리에서도 주 52시간 근무제에 따라 양극화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도입으로 문화예술계에서 보호받는 종사자와 그렇지 않은 종사자의 구분이 강화되면서, 대기업이나 공공 부문의 문화예술 기관에 종사하려는 열망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종사자에 대한 제도적 보호가 강화되는 문화예술 기관은 프리랜서 예술가들의 험난한 경쟁이 파도치는 바다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된다. 방주에 올라타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문화예술 종사자와 그렇지 않은 프리랜서나 조직화의 수준이 낮은 부문 종사자 사이의 차이가 커지는 것이다. 결국 안정적인 문화예술 기관에 들어가려는 대기 인력들로 천문학적인 경쟁률이 일상화된다. 근래 수년 동안 약간의 정규직을 확충함으로써 혹은 정규직으로 전환함으로써 방주에 오르길 기대하는 많은 바람들에 화답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지속적인 답이 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심화되는 문화예술계 노동시장의 양극화에 대한 관심과 대책이 필요하다.
서우석은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와 도시과학대학원 문화예술관광학과 교수로 예술인복지, 도시재생, 문화도시, 창조관광 등의 주제를 연구하면서 한국문화경제학회와 한국예술경영학회, 한국여가문화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