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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기획자의 전문성은 어떻게 희석되는가
문화예술 공공기관 채용제도(2)1996년 10월 7일 「경기도 문화예술진흥 조례」가 제정되고 1997년 7월 3일 경기문화재단(이하 재단)이 출범했다. 직원은 초기에 10여 명 남짓이었다가 2002년 수원시 인계동 사옥으로 이사하면서 직제개편이 이뤄졌고 조직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2003년 봄부터 문화예술 전문직인 ‘전문위원(가급~라급)’ 공채가 시작되면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 입사했다. 2003년은 재단이 ‘문화기획’과 ‘행정지원’ 인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조직 구성이 균형을 잡은 첫해였다. 전문위원 체제가 안정화되자 조직은 활기가 돌았다.
전문위원의 장르적 구성은 시각예술, 공연예술, 문학예술, 문화기획이 기본 축이었다. 그것들의 세목은 창작과 비평을 내용으로 회화, 조각, 이론, 연극, 무용, 음악, 축제, 마임 등이었다. 당시 새로 입사한 전문위원을 순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 양원모(시각예술.교육예술.미술이론), 표신중(미디어.음악),김보성(문화기획.문화예술교육), 임재춘(문화기획.문화예술교육), 최지연(음악.문화예술교육), 강원재(문화기획.연극), 신미라(문화기획), 박정호(문화기획.공연), 고영직(문학평론), 황순주(전통예술.축제), 한문희(문화 기획), 백기영(시각예술.예술기획), 김종길(미술평론.연극), 오세형(연극.예술기획) 등이다.
지금처럼 통합채용제가 아니었고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누지 않았다. 전문위원은 정원직, 위촉직 등으로 구분해서 뽑았는데 ‘직’의 구분 없이 매년 실적을 평가해 계약을 갱신하는 방식이었다. 정원직은 공채 시험을 치러야 했으나, 위촉직은 재단의 정책적 판단과 필요에 따라 추천과 초빙의 과정을 거쳤다. 현장 전문가들이 많아지자 내부 기획회의는 물론, 내부 기획위원 제도를 가동해 다양한 신사업들을 제안하고 실행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전국적인 첫 사례로 언급되는 화제를 낳았다.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었다. 당시 전문위원들은 팀별로 배치되어 일을 했으나 퇴근 무렵이면 나혜석거리로 몰려가 각각의 사업들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토론을 벌였다. 장르에 상관없이 사업 목적과 취지, 과정들이 치열하게 평가되었고 필요에 따라서는 공식적인 내부 기획위원으로 참여해서 일의 밀도를 높였다. 또한 재단 밖의 외부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크도 좋았기 때문에 사업에 대한 아이템과 자문이 수시로 연결되었다.
둘째, 조직의 일하는 방식을 바꿨다. 전문위원 개개인과 이어져 있는 예술가들의 수가 많아 자연스레 재단을 찾는 예술가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재단이 예술가들의 문화사랑방, 문화복덕방이 된 것이다. 지원사업은 물론, 문화예술진흥 전반에 관한 생생한 담론이 오갔기 때문이다. 지원을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재단은 예술가들과 동행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행정직들도 문화기관에서 일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사고뭉치’의 혁신 사업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의 아이디어와 기획자들의 아이디어가 스파크를 일으켜 ‘말도 안 되는’ 기발한 사업들이 구상되고 실행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런 사업들은 지속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경기문화재단이니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종종 의도적으로 사고를 치는 사업들을 기획하기도 했다.
넷째, 혼성·혼합의 다원예술적 사업들에 공을 들였다. 장르별 특성을 구분하되, 예술 본연의 사업들을 구상할 때는 이것저것 융합하려는 생각들이 많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다원예술지원사업’을 시작했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재단은 발 빠르게 그걸 도입했고 기획자들의 사업이 그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다섯째, 기획지원 또는 기획발굴지원 사업 등 ‘기획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공모지원 사업의 한계는 명확하다. 골고루,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고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좋은 사업을 평가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사업의 아이템을 제안한 전문위원의 본래 뜻과 성격을 반영하기란 쉽지 않았다. 역설적일지 모르나, 공모사업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업 모델을 제시하는 건 한계가 많았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기획사업이었다. 내부에서 기획하되, 외부 전문가를 총괄기획자로 섭외, 초빙해서 사업 모델의 전범을 창조하는 협업 구조다. 이렇게 정리하니, 마치 십수 년 전의 경기문화재단을 소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굳이, 장황하게 당시를 떠올리는 건 통합채용제를 도입 시행하고부터는 이런 일들이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비단 경기문화재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통합채용제로의 일원화는 ‘획일화’에 다름 아니고 일의 창의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강원랜드 채용 비리 사건 이후 채용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강조되어 대부분의 지방 공공기관들은 ‘지방 공공기관 통합채용제’를 도입, 실행 중이다. 통합채용제란 행정안전부에 의해 지방 공공기관(지방공사·공단, 지방출자·출연기관)들이 채용 프로세스를 통합 운영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채용 비리를 근절하고 통합 운영으로 인해 예산을 절감하고, 채용의 전문성도 담보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제도 자체가 창의적이지 않을뿐더러 공무원 공채 구조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단순 행정업무 외에도 별도의 전문성과 현장성이 수반되어야 할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선 고민이 많다.
경기도는 경기도가 직접 나서서 통합채용을 공고하고 1차 시험 과정을 수행한다. 공고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는 사이트에서 개별 공공기관과 링크해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개별 공공기관 누리집도 공고를 띄워놓고 있지만 1차 필기 시험은 경기도 주관으로 동시에 일괄적으로 치러진다. 이후 서류와 면접 전형은 필기시험 합격자에 한해 재단에서 이루어진다.
위의 통합사이트에 링크된 18개 경기도 산하기관에서 문화예술진흥·지역문화진흥 관련 문화예술기관은 경기문화재단뿐이다. 가장 최근의 재단 공개채용 공고는 2019년 10월 17일이다. 직군은 문화행정직, 학예연구직, 운영직이고 직종은 행정, 전산, 학예, 보안원, 미화원, 시설원이다. 문화예술 관련 직무는 ‘문화행정직-행정’이라 할 수 있다. 경기문화재단은 2008년부터 도립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합 운영하고 있는데 ‘학예연구직’은 포괄적으로는 문화예술계이긴 하나 뮤지엄 직무에 해당한다.
‘문화행정직’은 2008년 재단이 도립 뮤지엄들과 통합될 때 ‘문화기획 전문직’과 ‘행정지원 직무’를 하나의 직군으로 결합한 것이다. ‘문화 일을 하는 행정직’이 아니라, 문화기획 전문직과 행정직 직군을 묶어서 하나로 만든 것이란 얘기다. 이러한 통합 취지를 살리기 위해 채용 분야에 “문화사업 및 기획 등”으로 직무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필기 시험 과목이 한국사, 일반 상식, 영어, 전공(예술경영)이어서 실제로는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전문 인력이 입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게다가 신입 직원으로만 입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낮은 직급과 연봉으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장르별 전문성 따위, 현장의 전문성 따위는 이제 필요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무조건 '정규직'이라는 발상은 조직의 경직성만을 가져올 뿐이다. 이미 공공기관은 '공무원보다 더 공무원이다'는 말을 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재단이 전문성 강화를 위해 자체적으로 만들었던 '전문위원' 체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하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현장이 살아야 한다. 평생직장이 아니더라도 문화적 삶과 예술적 기획이 일상으로 펼쳐지는 사건들이 현실이 되어야 한다. 제2의 봉준호, 새로운 BTS의 출현을 위해서는 크고 작은 문화예술 이벤트가 세대를 넘어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펼쳐져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도와주어야 할 것은 더 많은 재학습의 기회, 더 많은 실패의 경험들이 격려가 되는 지원, 일과 놀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새 정책들, 언제나 열려 있어서 수시로 협업 가능한 공공기관, 최저 직급만이 아니라 여러 직급으로 입사가 가능한 채용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전문위원 이야기는 사실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보다 나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도 문제는 많았고 어려운 일 태반이었다. 그래도 지금의 채용 제도보다 나았고 내용도 풍부했다. 그러니 생각해 본다. ‘어떻게 오늘이 어제보다 못하지? 더 나아야 하는 거 아냐?’
2020년, 장르가 붕괴된 것도 사실이고, 4차 산업이 코앞에 와 있는 것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4차 산업 이후의 삶이란, 인간이 인류사에서 가장 인간답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테크놀로지가 노동의 많은 부분을 인간으로부터 빼앗아 가기 때문에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로 만들어 가야 한다.
통합채용의 문제는 단지 채용 제도의 문제를 떠나서 기획자들의 놀라운 상상력이 기관 내부로 흘러 들어가지 못한다는 한계에 더 큰 문제가 있다. 그 한계는 조직 내의 협업을 가로막을 것이고, 다양한 네트워크의 확장을 저해할 것이다.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더 높은 문화의 힘은 시나브로 상실될 확률이 높다. 채용 비리에 대한 강력한 법적 장치를 보완하되, 각 기관의 고유성과 성격을 살려서 21세기 새 한반도의 창조적 문화기획을 터트리기 위한 제도적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문화의 미래는 내내 어둡고 우울할 것이다.
김종길은 미술평론가로,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정책팀장, 문화재생팀장, 문예진흥실장 등 역임하고 현재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국민대 대학원 미술이론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이동석 전시기획상, 자연미술이론연구상, 월간미술 전시기획부분 장려상, 김복진미술이론상, 올해의 큐레이터 등 수상한 바 있다. 『포스트 민중미술/샤먼 리얼리즘』, 기획전으로 <시점․시점-1980년대 소집단미술운동 아카이브>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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