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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이 가르는 경계 위에서
코로나19 이후 예술과 시장의 변화 ①지난 5월 1일 민주노총 유튜브 계정에서는 <2020 메이데이 온라인 국제연대콘서트> 라이브 스트리밍이 있었다. 라이브라고 하지만 공연 영상들은 바로 그 시간 현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중계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온라인 콘서트는 러시아, 브라질, 이탈리아, 영국 등등으로 이어졌는데 지구 반대편 나라 영상의 시간도 한낮이었다. 시차만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일상적 활동도 불가능한 이탈리아 편은 록페스티벌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콘서트 영상이었고 남미 편에서는 역시 지금은 불가능한 대규모 집회에서 시위군중이 함께 노래부르는 장면이 상영되었다. 연출된 장면들이 매끈하게 이어진 영상이 있는가 하면 비좁은 연습실에서 떡진(!) 머리에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고 연주하는 밴드들도 있었다. 대규모 집회부터 밴드 연습실까지, 시위 군중들의 떼창부터 실내악으로 편곡된 <인터내셔널가> 연주까지 콘서트는 각양각색이었다.
각 나라에서 미리 동영상을 받아 편집하고 정해진 시간에 스트리밍 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단순하다면 단순하지만 온라인을 기반으로 국제연대로 만들어진 좋은 기획이었다. 실시간 스트리밍도 좋은 선택이었는데, 콘서트가 진행되는 중에 댓글 창에서는 감상이 올라오고 연주되는 노래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이어서 답이 달리는 등 비록 한 공간에 모여서 보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정해진 시간에 접속해 있는 관객들이 인터넷 환경에서 연결되는 것도 콘서트를 관람하는 즐거움을 더했다. 메이데이, 국제연대와 같은 콘서트의 취지는 비록 댓글 창으로 나누는 대화이지만 관객들을 더 가깝게 했을 것이다. (실시간 스트리밍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관람 문화다.)
하지만 이 콘서트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좋은 기획이었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으로 만들어진 영상에는 각 나라의 거리 풍경, 아티스트들의 활동 공간, 집회 문화 등등이 스며 있다. 그런 차이는 메이데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만들어진 각국의 영상들이 이어지면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연대’를 통해 ‘차이’를 드러내고 ‘차이’가 드러나면서 1시간 남짓 동영상 플레이로 전개되는 콘서트는 다채로운 공연이 되었다.
이 콘서트는 또 다른 흥미로운 ‘차이’를 보여주는데, 코로나19 이후 쏟아지고 있는 온라인 공연 영상들과의 ‘차이’다. 물론 세계적인 극장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 공연들과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국제연대 콘서트는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이 다른 것이다.
전염병으로 뉴욕과 유럽의 극장들이 문을 닫은 이후 온라인에서는 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연 영상들이 내내 상영되고 있다. 메트오페라, 영국 국립극장, 로열오페라 등 많은 극장들은 마치 시즌 프로그램 발표하듯 온라인 상영 스케줄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투어보다는 극장으로 관객을 불러 모으는 이 극장들은 공연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객들이 찾아 올 만큼 막강한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다. 극장들만이 아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등 지금도 세계 공연예술 시장을 누비고 있는 작품들이 온라인으로 상영되었다. 베를린 필은 유료로 운영하던 콘서트 영상 아카이브를 한시적으로 무료 개방하기도 했다.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영국 국립극장의 NT LIVE, 뉴욕 메트오페라 등의 공연 영상은 공연만큼이나 관객을 불러 모아온 성공적인 파생 상품이다. 공연에 대한 신뢰와 기대에 덧붙여 공연 영상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 자국 내에서는 물론 나라 밖 곳곳에서 상영되는 유통망을 가지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공연되고 공연 영상 상영도 무수히 있었던 작품들이지만, 이번 온라인 상영에서도 오픈하자마자 어마어마한 조회 수를 올렸다. 수요가 있는 검증된 작품들이다. 이들이 이렇게 공연 영상 제작과 배급의 노하우를 쌓아왔던 것은 수익 다각화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다. NT LIVE는 브랜드가 말하고 있듯이 공연의 실시간 중계가 중요한 콘셉트이다. 런던의 극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연을 멀리 떨어진 장소의 영화관에서도 같은 시간에 ‘함께’ 보는 것이다. (우리는 녹화된 영상을 보는 것이고.) 이 프로젝트의 출발은 연극이 극장이라는 장소의 한정을 넘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더 많은’은 마케팅의 목표가 아니라 문화민주주의적 목표다. 장소 접근성의 제한을 낮추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극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실시간 중계로 시작되었고, 공연 영상 제작이 기록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무대를 감상하는 것이 되기 위해 고민했던 것이다. 비록 저 먼 곳에 떨어져 있더라도 마치 극장에서 함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아야 하니까. 물론 그 고민의 결과물은 마케팅에서도 성공했다.
비단 이들 공연만이 아니라 온라인 공연 상연에 대한 호응이 높다. 하지만 공연 영상 제작 노하우가 축적된 경우가 아니라면 ‘안방 1열’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영상으로 공연을 감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 역시 욕심껏 관람 리스트를 짜 놓았지만 반의반도 볼 수 없었다. 공연이 많았고 공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집중하기도 어렵고 영상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영상의 부족한 부분은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경험으로 채워가며 감상하는 것이다. 그러니 에너지를 더 쏟을 수밖에 없다.
다시 메이데이 콘서트. 그간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공연들, 다시 보고 싶었던 공연들을 영상으로나마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팬데믹에서의 위로였다. 쏟아지는 영상들을 한편으로 즐기면서 다른 한편 서서히 지쳐가던 중에 <2020 메이데이 국제연대 콘서트>를 보게 되었다. 당연히 이 콘서트를 유수의 공연들, 그것을 잘 찍어 올린 영상들과 같은 기대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각양각색의 상황, 장소, 미장센, 콘티로 이어지는 제각각의 사회의 모습들이 스며 있는 그 영상들을 보면서 문득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공연들이 모두 한 묶음의 비슷한 경향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화려한 공연들의 아름다움이란 결국 극장이라는 블랙박스의 분투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극장의 모든 장치를 걷어내고 테이블과 마이크만을 앞에 두고 캐릭터마저 벗어버린 채 렉처 퍼포먼스처럼 전개되는 컴플리시떼의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낯설음은 오지 않은 미래인 것이 아니라 지나간 과거를 붙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상영되고 있는 공연들은 팬데믹 이전 극장에서 관객을 앞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관객들은 비록 모니터 화면으로 공연을 보고 있지만 과거 극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직접적 경험이건 사회문화적으로 축적된 간접적 경험이건- 공연을 감상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쏟아지고 있는 온라인 공연 영상이든 그에 대한 호응이든 그것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과거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극장은 닫혀 있다.
모두가 과거의 공연을 중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런던 로열코트는 지난 5월 8일부터 <caretaker>를 중계하고 있다. 이 영상은 극장 2층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빈 무대와 객석을 보여준다. 무대는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 공연 중이던 작품의 무대에 설치를 추가했다. 영상을 내내 틀어놓고 있으면 느리게 조명의 변화가 있고, 불현듯 빈 극장이 말을 거는 듯 극장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텅 빈 극장은 내내 고요하다. 이것이 지금 현재의 극장이다. 기술은 과거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의 닫힌 현재를 증언하기도 한다.
판데믹 이후의 미래가 무엇일지는 모르겠다. 지난 겨울의 시작에 우리가 보냈던 봄과 맞이한 여름을 알 수 없었듯이 말이다. 전염병은 언제 끝날지, 전염병이 끝나기는 할지, 전염병이 끝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전염병이 끝나고 나면 다시 극장이 문을 열고 예술가들은 블랙박스와 고군분투하며 쌓아온 아름다움을 이어가고 관객들은 이 특별한 감각과 경험을 되찾을 수 있을까. 혹은 다시 전염병이 시작되고 극장 문이 닫히더라도 기술이 지금보다 더 완벽하게 극장에서 쌓아 올린 특별한 창조와 감각과 경험을 고스란히 ‘안방 1열’로 실어다 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염병 이후의 세계는 다시 이전의 세계를 복원하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삶은 변화할 것이고 예술은 그 변화 속에서 길을 찾아 갈 것이다. 예술의 창조는 미래학자의 예언이 아니라 우리의 더듬거리는 삶의 동행이다. 판데믹이 가로지르고 있는 경계에서 지금 여기에 예술이 더 치열해야 하는 이유다.
김소연은 연극평론가이자 [문화정책리뷰]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