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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디에서나 예술, 누구나 예술가’로
예술사 관점에서 본 코로나 시대의 예술①역사적으로 예술의 개념과 창작 및 수용 방식은 주요 사건과 사회현상을 계기로 변화를 겪어왔다. 전염병과 재앙, 전쟁, 혁명 등의 상황에서,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기술 발전에 따라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 맞서 중대한 내적 성찰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후 변화로 인한 전염병과 기술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이중의 외부 충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전염병이 아니고 기후 위기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사람 간의 대면과 이동이 제한되거나 차단되는 비대면 사회가 기술의 가속화를 주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술의 가속화가 가져온 변화는 거의 패러다임 전환의 수준이라는 점에서 적응이 쉽지 않은데, 예술계로서는 더욱 쉽지 않아 다소 방어적 기제로 맞대응하는 와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로 인해 박물관・미술관, 공연장 등 각종 문화예술 시설들이 문을 닫는 상황은 거의 예술의 존재론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온라인 콘텐츠로 대처하였지만, 그것의 효용성과 지속성에 대해 예술계는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을 비쳐왔다. 그나마 예산 운용이 가능한 국공립 기관은 온라인 콘텐츠 제작이 용이했지만, 사립 기관과 예술단체들은 속수무책이었던 점도 한몫 했다. 대부분 예술가와 단체들은 현장성과 대면의 속성을 갖는 예술 활동을 살리지 못한다는 한계에 더 몰두해 있었다.
하지만 온라인이 오프라인의 적도 아니고, 예술의 적은 더더욱 아니다. 온라인은 사실 기술매체로서 소통 수단이자 전달 도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휴관과 재개관을 반복하는 문화예술 시설 역시 소통 수단이자 전달 도구인 셈이다. 역사적으로 예술은 기술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소통과 전달방식을 확장해 온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산업혁명 이전의 인쇄술이나 판화와 같은 매체로부터, 기술복제시대를 연 기계미학과 대중매체시대, 그리고 정보화와 AI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확장된 양상을 일관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는 판화로 제작된 작품을 책자로 발간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로 통칭되는 구성주의 작가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기술을 통한 소통의 효율성과 그로 인한 사회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바우하우스의 라슬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 역시 예술과 기술 결합으로 사회 곳곳에서 예술의 접근성을 실천했다. 백남준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의 예술을 모아내고, 이를 극장이나 미술관이 아닌 거실에서 TV로 감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에릭 휘태커(Eric Whitacre)는 2011년부터 전 지구인이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함께 노래하게 만들었다.
기술매체에 대한 예술의 대응은, 곧 예술에 대한 개념적 성찰을 동반한다. 도미에가 인쇄매체 작업을 우선한 것도, 예술은 모든 이의 삶과 사회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한 것처럼 말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와 바우하우스에게 기술매체는 예술을 통한 사회 변화의 동력을 만들겠다는 실천의지에 답하는 값이었다. 백남준 역시 텔레비전은 모더니즘 예술구조와 엘리트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고, 시공간을 넘어 연결하며 참여하고 연대하는 예술 개념의 반증이었다. 이들은 예술가에 대해서도 ‘예술가-엔지니어’, ‘예술가-생산자’,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의 예술가’라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예술가의 시대적 역할 역시 확장하였다.
그런 점에서 기술매체를 결합하고 활용해 온 예술가에게, 혹은 ‘미디어아트’로 분류되는 흐름 속에서 온라인이란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온라인 콘텐츠 역시 기록의 의미만이 아니라 고유한 창작 방식으로 간주되어 왔다. 미디어아트는 세부적으로 ‘웹아트’, ‘인터랙티브 아트’, ‘사운드 아트’ 등으로 통용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따라 온라인상에서 상호작용을 도모하고, 이에 따라 작품은 완결 구조를 갖지 않는 무한한 증식과 변형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기술과 예술, 산업적 맥락과 사회 문제 해결 등의 구도를 융합하면서 모더니즘의 장르 구분을 뛰어넘고 있다. 영상과 소리, 음향, 움직임과 제스처, 냄새와 통감각적 모든 요소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을 아우르는 속성은 이미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특히 존 케이지(John Cage)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백남준 등의 흐름에서 지속된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 예술계가 맞닥뜨린 온라인 공간은 이러한 개념적 성찰의 계기로 작동하지 못하고, 당장에 해결해야 할 난제로 받아들여졌다. 오프라인을 절대 기준으로 상정하고,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보완재 정도로 인식함에 따라 가장 일반적인 실시간 중계와 같은 스트리밍 형태에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러니 콘텐츠 제작의 부담감까지 가중되면서 난감한 상황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조성진의 라이브 콘서트는 전 지구인에게 다가갔고, 온라인에서 집결한 무용수와 연주자들의 실시간 공연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며, 결국 한 번도 오페라하우스나 미술관에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성큼 다가갔다.
‘어디에서나’ 예술을 만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은 예술의 오랜 욕구였다. 물론 지금처럼 전염병으로 오프라인이 차단된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프라인도 앞으로 다각적인 시도를 통해 방역조건을 준수하는 수준에서 재개될 것이라 믿는다. 다만 코로나19 이전과 같은 성황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어서 오프라인은 귀한 기회가 될 것이고, 관람 환경은 고급화되는 등의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예술 수용 방식은 온・오프라인을 병행하는 구조라 하겠다. 하지만 온라인은 온라인이고, 오프라인은 오프라인이다. 이 두 개 공간은 성격이 다르고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다르며, 활용에 따른 효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온라인 콘텐츠 선호도 조사 결과에서도 그런 사실이 확인된다. 지난 9월 모 미술관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단순 전시 소개 영상에 비해 작가 작업실 탐방과 같은 오프라인에서는 접할 수 없는 내용이 우위를 차지했다. 이는 곧 온라인 콘텐츠를 오프라인의 단순 대체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결국 콘텐츠란 예술 창작물과 예술가를 둘러싼 다양한 지식과 이야기를 기획해야 한다는 논리가 될 것이다. 물론 코로나19 이전부터 송출해온 오케스트라 연주나 오페라, 뮤지컬 영상 콘텐츠는 그 자체로 질적 수준을 강화하면서 지속되겠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닌 것이다.
다른 한편 온라인을 예술과 관련하여 활용한 대중의 활동도 논의 테이블에 올려야 하겠다. 코로나19로 인한 격리와 봉쇄로 지친 사람들은 명화를 패러디하거나, 자신만의 연주를 하거나, 실시간 만남으로 멋진 합창을 불러내는 등 놀라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일반인에게 온라인은 예술을 소재로 창의적인 놀이를 펼쳐간 무한 개방 공간이었다. 명화 패러디 작품 만들기는 ‘예술과 격리 사이’(tussen kunst en quarantaine)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네덜란드 청년이 만들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이제는 라익스미술관(Rijksmuseum Amsterdam)과 게티미술관(J. Paul Getty Museum) 등이 참여를 독려하며, 대형 전광판에 작품을 설치하는 전시로도 기획된 바 있다.
이는 전 인류가 어려움을 겪는 코로나19 시대에 그만큼 예술이 필요하다는 반증이자, 동시에 누구나 예술 작업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될 것이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벤자민 젠더(Benjamin Zander)는 2008년 TED 강연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이 전 인구의 3%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오늘 여러분이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실험을 하겠다.”라면서 모두에게 잠재하는 음악의 힘을 일깨워준 바 있다. 모든 이가 자신에게 잠재한 음악의 힘을 일깨우는 한 그들 역시 예술가일 것이고, 그래서 예술가의 역할을 ‘많은 사람의 눈을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역시 20세기 중반 머스 커닝햄이 “누구나 무용수가 될 수 있고, 어디나 극장이 될 수 있다”라고 한 말과 다르지 않다.
코로나19로 인한 예술 논의는 결국 ‘어디에서나 예술, 누구나 예술가’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겠다. 예술을 섬에 가두지 않고 삶과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 가도록 하고, 위기의 시대에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성찰을 주도한다는 맥락에서, 지금의 예술은 온・오프라인을 합쳐 연결과 참여, 연대라는 속성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며, 아방가르드 이래 지속되어 온 역사적 흐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예술교육이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갇혀 극장과 미술관이라는 소통 및 매개 장치에 너무 의존해 온 것은 아닌가. 오히려 예술의 사회적 영향을 위해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온라인으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경우 예술 창작 방식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의 내적 혁신이 절실한 것은 아닌가. 다른 한편 결코 새로울 것 없는 미디어아트 논의를 통해 장르 융합과 예술의 기술 결합,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상황 역시 전면적 논의로 펼쳐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것은 결코 없다. 다만 상황적으로 부각되면서 새롭게 여겨질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변화를 위한 실천인 것이다.
박신의는 2000년부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와 문화예술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관련 연구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서울시, 청주시, 부천시를 비롯한 지자체에서 정책자문 활동과 함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 한국문화예술위원, 인천문화재단 이사, 서울문화재단 정책위원회 위원장, 외교부 자체평가위원,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연구 주제는 문화예술공간 건립 연구, 창작공간 정책, 국제문화교류 정책, 예술의 사회적 영향, 포용적 예술, 미디어아트 비즈니스 모델, 예술기업가정신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