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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인과 창작자 사이, 비즈니스의 발견
전통예술을 활용한 창업현장‘새로움’이라는 단어와 전통예술은 꽤나 이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실 그간 대부분의 전통예술가들은 보존과 계승 그리고 변화, 혁신이라는 대립되는 가치 속에서 오랜 시간을 번뇌하며 자신만의 성장통을 겪어왔다.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묵묵히 가업을 이어가거나, 스승에게서 사사하며 절제된 예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배워왔다. 때문에 대부분 상당히 늦은 시기(대학 졸업 후)에 아티스트로서 정체성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로 활발히 활동해야 하는 20대 시절 전통 예인과 창작 예술가의 기로에서 홀로 외로운 고민을 하다가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야 하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마는 안타까운 경우를 자주 접한다. 그동안 국악인 출신의 창업가로 활동하며 강연이나 공연을 통해 다양한 청년 예술가들을 만나왔다. 한 해 700-800명 정도 배출되는 전통예술 관련 졸업생들에게 점차 작아지는 전통예술 시장 규모의 확장을 위해서라도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니즈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성토한다. 아직 조금 낯설긴 하지만 연주자 혹은 예술가가 아닌 대중들이 원하는 전통예술 창업 아이템으로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사례도 이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본인의 전공을 바탕으로 전통예술 분야에서 독창적인 창업 아이템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두 명의 전통예술 창업가와 그들의 비즈니스 현장을 취재하였다.
무대미술을 전공한 의상 감독이 한국적 정서가 담긴 의류 브랜드를 론칭한다니 신선하다.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왔나?
고등학교 때는 그림을 그리고 대학교 때는 무대미술을 전공하여 20년째 영화나 연극의 의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1998년 한예종 재학 당시 선배들의 권유로 조금씩 외부 작업을 시작했다. 연극<고도를 기다리며>가 공식적인 첫 작품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시대극이나 사극 작업을 주로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한복을 만든 것은 아니다. 사실 학창 시절에는 중세 서양에 매료되어 있었다. 로코코나 바로크 시대의 장식이 많고 화려한 복식에 푹 빠져 있다 보니 당시에는 한국 옷들이 장식이 없고 밋밋해보였다. 그러다 우연히 평민들의 복식 분량이 많은 사극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 의상의 특징을 찾다 보니 선이 모던하고 심플해서 단아함에서 오는 우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천연 염색 원단의 기품도 특별했다. 서양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힘이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한국 의상에 대해 공부하고 한복 작품 의뢰가 많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시대극 의상 작업을 많이 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나서부터는 동서양 작품들을 넘나들면서 제작하고 있다. 햄릿이나 맥베스를 하더라도 한국적으로, 원형성이나 모티브는 한국적인 원형 형태와 삼베 같은 소재로 풀어내기도 한다. 그동안 거쳐 온 작품들의 톤앤매너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제 ‘이진희만의 스타일’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성균관 스캔들>, <구르미 그린 달빛>, <안시성>, <간신> 등 굵직한 드라마·영화 작업을 진행하면서 상고시대부터 개화기까지 몇 천 벌도 넘는 다양한 한국 전통 의상을 만들었다. 의상 감독으로서의 내공과 경험이 쌓일수록 대중이 흔히 떠올리는 치마저고리 형식의 조선시대 한복이 아닌, 시대별 특징을 모티브로 한국 전통의 옷감과 색을 과감히 사용한 ‘한국의 정서를 담은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감독이나 연출가의 의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 아닌 온전한 내 것을 만들고 싶었다. 한복이 가진 상징성과 힘을 옷의 소재나 색감을 통해 나답게 소개하는 것, 그것이 하무의 시작이었다.
하무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나?
‘물에서 춤추다’라는 뜻의 ‘하무’는 작년 10월에 시작한 브랜드로 4년을 꼬박 준비했다. 영화 <간신> 작업을 끝내고부터였는데, 무대와 영화 의상을 시작한 지 20년째 되는 해이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자유로운 나만의 작업을 해보고 싶었고 그 에너지가 옷에서도 묻어났으면 했다. 멀리 바라보고 즐겁게 작업하는 기반 마련을 위해 하무를 만들었기 때문에 여느 패션 브랜드처럼 시즌에 맞춰서 옷을 만들지는 않는다. 큰 방향을 잡았거나 새로운 영감을 받았을 때 몰아서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다른 패션계의 시즌이나 흐름에 얽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주의 패션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판매하고 있는 하무의 옷도 성별에 따른 치수가 없이 S, M, L로만 구분했다. 넉넉하게 패턴을 뜨고 몸에 맞춰서 흐르는 구조로 마니아적인 의상을 제작하다 보니 구매자들은 주로 예술가들이 많다.
영화·드라마 의상 디자인과 개인 브랜드 디자인·운영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장 큰 차이는 브랜드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주어진 콘셉트와 대본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촬영 감독, 무술 감독, 의상 감독 등 각 분야의 감독이 따로 정해져서 총감독의 지시 아래 본인이 맡은 분야만 맡아서 움직이면 된다. 하지만 창업과 브랜드 운영은 기획안과 시안을 만드는 작업부터 스스로 모두 해야 한다. 처음에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지만 아티스트로서 자기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내 생각에서 출발한 나의 아이디어를 스스로 구현해 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상 제작 일을 오래하다 보니 남이 써놓은 세계 안에서 상상해야만 하는 작업에 한계를 느꼈는데, 하무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온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내 작업을 지속할 수 있어 아주 만족한다.
브랜드를 운영하기 위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그걸 다 실행해버리면 진정한 나 이진희의 정수가 흐려지고 없어질 수 있다. 20년 동안 모든 걸 쏟아내며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앞으로는 영화나 드라마 의상 작업은 점차 줄여 나갈 예정이다. 내년 상반기 공연의 면모를 접목한 패션쇼를 구상하고 있다. 무대와 의상을 안팎으로 모두 경험한 디자이너로서 차별화된 패션쇼를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지금까지 제작했던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의 의상들을 전시회로 만들어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브랜드 하무를 더욱 견고히 다져 나갈 생각이다.
2018년 청년 국악인을 위한 음반 제작 및 공연 제작 레이블을 창업했다고 들었다.
레이블 소설은 전통음악을 보존·계승하며 재창조를 통해 전통예술 콘텐츠 시장을 확장하고 다양한 국악 음원이나 음반 제작 및 소셜 미디어 아카이빙 작업을 통해 청년 국악 아티스트들의 국내외 예술 시장 진출 및 판로 개척을 돕는 전통예술 분야 소셜벤처 기업이다. 청년 국악인들의 전통 음원 제작 기획, 녹음, 마스터링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발매 후 프로모션 홍보와 마케팅까지 원스톱 서비스로 제공되며 국악 연주자들이 정성껏 다져온 기량을 레이블 소설을 통해 본인의 첫 음반을 선보인다. 2019년 11월 기준 오프라인 정규 음반 6개와 디지털 음원 76개까지 총 82개의 음원 및 음반을 제작하였고 참여 국악인만 해도 150여 명이 넘는다.
1년 2개월 동안 그 정도 분량의 음원과 음반을 제작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비결이 무엇인가?
레이블 소설은 대표 본인 이외의 두 명의 사외 이사와 두 명의 정규직 직원을 채용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들 중 사외 이사는 10년 이상 함께 타악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동료이자 본인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이기도 하다. 협력업체로서 음반 녹음과 엔지니어링을 맡고 있는 최순호 실장과 네트워킹 및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이우성 대표, 그리고 녹음실 운영 및 디자인 그리고 공연기획을 맡고 있는 나(설현주)까지 각자 현장에서 국악 연주자로 쌓아왔던 노하우와 네트워킹을 활용하여 토털 음반 제작 레이블을 론칭하게 되었다. 각자 맡고 있는 역할과 전문성이 분명하다 보니 국악인들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사실은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내가 꼭 필요했던 부분을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어 운영하다 보니 초기 창업의 어려움보다는 누군가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국악인들의 공감대와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고, 빠른 시간 내에 입소문을 통해 많은 청년 국악인들의 소리를 다양한 음반과 음원을 통해 담아낼 수 있었다.
국내에 국악 전문 레이블이 두 곳 정도 있지만, 우리에겐 청년 국악인 전문 레이블이라는 차별화된 포인트가 있다. 녹음 비용이나 대관 비용 등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책정하여 국악인들의 진입 장벽을 낮춘 것도 강점이다. 또한 대부분의 녹음실은 시간당 책정된 녹음 비용을 산정하여 연주자나 프로듀서에게 청구하지만 레이블 소설에서는 연주자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음악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 곡당 녹음비로 책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국악 타악 연주자 설현주 대표의 창업 스토리가 궁금하다. 연주 활동도 계속하는가?
단국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한 후 경기도 소재의 국악 관현악단에서 11년 동안 단원 생활을 했다. 국악 타악 전공 특성상 기악과 성악 연주자의 반주나 세션을 맡아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나만의 무대, 내가 만드는 공연에 대한 갈증이 컸다. 이러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악단 기획 단원으로 겸직을 하면서 나름대로 공연 시스템과 기획 프로세스를 차근차근 배워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기획자 설현주만의 홀로서기를 하게 되었다.
작년 9월, 11년간의 악단 생활을 마무리하며 그동안 진행하고 싶었던 아이템들을 정리한 기획안이 2018년 12월 사회적기업 진흥원에서 주최한 사회적기업 공모전에 채택되면서 본격적으로 레이블 소설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연주자로서 꼭 필요로 했던 시스템을 갖춰 나갔고, 청년 국악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남다르게 애정이 갔다. 연주 활동도 병행하고자 했지만, 올해 두 개의 지원사업과 의뢰받은 녹음 작업들을 하다 보니 현재 사업가와 연주자로의 비중은 9:1 정도 되는 것 같다.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화될 때까지는 소설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연주자의 커리어도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꾸준히 연주 활동을 이어가려고 한다.
최근 전통예술가들은 기능인과 창작자 사이에서 아티스트의 생존을 건 고민을 하고 있다. 치열한 고민의 결과로 많은 이들이 유소년기부터 오랜 시간 수련하고 전수받은 실력을 바탕에 두고 스스로의 영감과 자신만의 가치를 더해 독자적인 장르와 레퍼런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단순히 비즈니스를 위한 창업이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한 창구로 참신하고 이색적인 전통 분야 창업 아이템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취재하며 전통예술가들에게 창업은 창작의 또 다른 과정이며, 대중들에게 전통예술의 가치를 가장 나다운 방법들로 소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작품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전통예술 디렉터 조인선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아쟁을 전공했다. 한국관광공사와 서울시의 대표 스타트업으로 선정된 국내 최초 전통예술플랫폼 모던.한을 운영하고 있다. ‘전통은 진화 중’이라는 슬로건으로 한국의 다양한 전통예술의 우수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글로벌 시장으로 확산시키고자 한다. 현재 웹진≪예술경영≫의 제10기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