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에는 성악을 전공했다. 이후 음악 선생님이 되려고 했지만, 인생의 항로는 조명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길을 따라가다 보니 여러 가지 제안이 주어졌고, 그중에 가장 적합한 하나를 선택했다. 지금은 조명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시장을 열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인생의 항로가 어디로 갈지 모르나 그곳도 언제나 치열하고 즐겁다.

성악만이 능사일까? 20대에 찾아온 현실적인 고민

“손을 들면 이쪽의 불이 들어오고 저쪽의 불이 꺼지고, 강약을 조절해서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명은 마치 음악을 지휘하는 느낌이 들어요.” 조명감독 중에 성악 전공자는 전국에 다섯 명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청각의 세계에서 시각의 세계로 넘어간 사람,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UP: 성악을 전공하다 조명감독이 된 이유가 있나요 박재민: 대학 시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갔는데 한 남자 선배가 새벽에 일어나 2층 창문을 열고 지리산을 향해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부르는데… 그때 알았죠. 정말 잘하는구나. 세상에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 참 많구나. 성악은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도 학창 시절에는 최고는 아니어도 잘한다고 인정받았고 노래 못해서 조명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더 열심히 불렀어요. 하지만 전공자는 너무 많이 나오고 성악 전공자로 성공하기는 너무 희박하잖아요. 현실적인 방안이 필요했어요.

UP: 조명을 따로 배우게 되었나요 박재민: 교수님들의 공연을 따라다니다 보면 학생들로 팀을 꾸려서 공연을 준비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너는 조명, 너는 음향, 너는 무대 이런 식으로 파트를 나눠 주는데, 저는 조명을 맡을 일이 많았어요. 그런 차에 교수님이 새로 임용되어 오셨는데 그분께서 많이 응원해 주셨어요. 성악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요. 그리고 대구에 오페라하우스가 생기면서 거기에 계신 조명감독님께 배우고 자격증을 따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성악가로 공연하던 모습 대학 시절 성악가로 공연하던 모습

교육대학원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했으니 당연히 교직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학생들 지도하면서 소설도 쓰고, 시도 쓰고 하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학교 음악 선생님이 될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길을 가지 않고 조명이라는 직업에 계속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그때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결정 내린 시기였던 것 같아요.” 안정적인 교사라는 직장을 선택하지 않을 정도로 조명의 세계에 깊이 마음을 준 상태였다.

악보를 이해하는 조명감독, 숨은 음악을 찾아내다

박재민 감독의 대학 동기는 총 40명.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악과 관련 없는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 이는 졸업생들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배워 온 것을 이어 가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조명감독은 넓게 보면 성악과 클래식 공연의 연장선에 있다. 공연을 만드는 조력자이므로, 클래식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업무에 큰 도움이 된다.

UP: 성악 전공자로서 조명감독을 하는 데 유리한 점이 있나요 박재민: 일단은 음악 전공자이니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음악을 듣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악보를 잘 볼 수 있다는 것도 오페라나 뮤지컬에 참여할 때 유리합니다. 설령 무용 공연에서 음악을 처음 듣는다고 해도 빨리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그 안에 숨어 있는 음악적 요소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사실 좋은 음악을 만들고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분석하는 작업들이 필요해요. 음악, 연극, 무용 등의 모든 공연예술은 그러한 분석을 통해 표현해야만 예술성이 높아지죠. 장르마다 접근 방법이 조금 다르긴 해도 성악을 통해 분석하고 기승전결을 찾아 가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악보를 잘 보지 못하는 스태프는 초시계로 공연이 끝나는 시간을 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음악은 시간 예술이고, 같은 클래식 곡이라도 금난새와 정명훈 지휘자가 연주하는 시간이 다르다. 그리고 오페라 스코어의 모든 음악을 다 외우는 것은 전공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악보를 보지 못하고 곡을 이해하지 못하면 곡의 클라이맥스가 언제인지 곡의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서 어떤 장치를 해야 하는지 명석하게 해석해 내기 어렵다.

오페라의 경우도 악보를 볼 수 있으니 큐를 줘서 신이 넘어가는 흐름을 이해하고 조명이 공연에 녹아들게 할 수 있다. 부스 안에서 오페라의 곡을 따라 부르면서 조명을 맞추니 훨씬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공연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는 분명 한계가 노출되기도 한다. 한국은 아직까지 공연의 셋업 시간이 턱없이 짧고 조명 디자이너라는 분야에 대한 이해가 낮다.

UP: 조명감독으로서 더 잘하고 싶은 것은 뭔가요 박재민: 사실 조명감독과 조명 디자이너의 개념은 조금 달라요. 그래서 저를 조명감독 겸 디자이너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극장에서 직함은 감독이지만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는 건 디자이너의 영역입니다. 아직은 한국에서 조명 디자이너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가능성이 큰 분야이니 이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어요.

국립극장에서 선보인 NT Live <햄릿> ⓒ국립극장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예술감독의 <어린왕자> ⓒ국립현대무용단
수성아트피아 제작 뮤지컬 <미스코리아> (조명 디자인 박재민)

배워도 배워도 끝나지 않을 공부

조명 디자이너라는 신생 분야에 도전할 수 있으니 즐겁지만 대중의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숙제가 산적해 있다. 지금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하며 조명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월요일과 주말을 이용해 서울과 대구를 통학하며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서울로 오고 가는 것이 녹록한 일은 아니다. 가끔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대구를 지나 부산에 가 있는 일이 종종 있다. “밤 1시에 여기가 어디지 하고 두리번거리면 부산이에요. 한 해 한두 번 있어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사냐고, 그 정도면 먹고살 만하지 않냐고 걱정한다. 정작 본인은 자신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이 분야에 있다 보니 더 잘하고 싶어서 공부가 필요한 것뿐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다.

성악 전공자가 조명감독을 하는 것을 두고 누군가는 현명한 선택이라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타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누구의 의견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박재민 감독은 선택을 열린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이라도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현장으로 가보라고 권한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찾게 될 것이고 꾸준함을 유지해 프로가 되라는 것이다.

무대감독으로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 무대감독으로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

UP: 조명을 배우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박재민: 조명을 배우고 싶은 후배들이 있다면 저는 현장에 먼저 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약 학교로 갔다면 거기서 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만약 현장으로 가서 배우고 이 길이 자신에게 적합하다 싶으면, 그때 학교로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어떨까요. 지금 저처럼 말이죠. 일을 하다 보니 더욱 잘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UP: 지역에서 예술가들이 자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박재민: 처음 모두가 예술을 시작할 때 경제적으로 풍족하기 위해서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단순히 좋아서, 하고 싶어서가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대가가 되기 전까지 자생력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술가로서 말이죠. 예술가들도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보다는 본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자신의 예술 세계가 흔들리지 않으니까요. 혹시 경제적으로 힘든 것이 있다면 그건 약간의 타협이 필요한 것 같아요.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 위해서 갈고닦고는 있지만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서 가요도 불러야 한다는 것이죠. 이건 선택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는 2016년 봄에 대구 매일신문에 칼럼을 쓴 경험이 있다. 대구예총의 계간지 『대구예술』에도 연 4회 글을 연재할 예정이다. 모두 음악과 예술에 대한 주제로, 칼럼을 쓰겠다는 버킷리스트를 이룬 것이다. 아직 희곡을 쓰겠다는 버킷리스트는 남았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하고자 하는 열정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열정만 있다면 그 다음은 꾸준함이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말처럼 ‘바다에 돌 던지는 것 같은’ 열심히 살라는 말만 전한 것 같아 머쓱하다고 했지만, 행동으로 보이고 있으니, 서른 후반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선배로서 충분하다.

인생UP데이트 멘토링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우선순위가 정해지면 다른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나머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죠. 그러면 결과가 보일 것 같습니다. 앞에 답과 연장해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성악을 전공했지만 성악을 좋아한 것인지 음악을 좋아한 것인지 아니면 공연을 좋아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술 전공자들은 자기의 전공 외에는 다른 일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정말 많은 종류의 파생된 영역이 존재합니다. 조명도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박재민 조명감독 프로필 - 영남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음악교육과 석사
- 성균관대학교 예술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재학
- 現 (재)수성문화재단 수성아트피아 조명감독 및 조명 디자이너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