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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하는 예술가들의 도시, 공존의 도시를 꿈꾸는
정현_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 이사장, 김노암_아트스페이스 휴 대표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일원 약 47만 평 부지에 파주출판도시가 조성된 지 근 15년이 훌쩍 넘었다. 국가 산업단지로 조성된 파주출판도시에는 국내 유수의 출판사들이 입점하여 문학과 인문 도시로서의 단계로 진입 중이다. 1단계가 출판, 인쇄, 유통업으로 조성되었다면, 2단계 사업은 영상, 디자인 중심 업종으로 계획되어 확장되고 있다. 국가 산업단지로 조성된 이곳에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작업 스튜디오가 오밀조밀 형성되고 있다. 낮에는 출판도시, 밤에는 어둠을 뚫고 완전한 고요 속의 작업 모드가 가능한 창작 도시의 모습이 다시 피어오른다. 이곳 예술가들의 밥상 모임이 발전하여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으로 정식 인가를 내고 예술가들의 공존 도시를 실험하고 있다고 하여 파주출판도시를 찾았다. 최근 파주출판도시 3단계 계획에 있어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 작가들의 구심점을 이루며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는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의 정현 이사장을 만났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육중한 침목 조각 군상이 파주출판도시 그의 작업 스튜디오 옥외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파주출판도시가 조성된 초기부터 이곳에 대안공간을 운영해오고 있는 터줏대감 격인 아트스페이스 휴의 김노암 대표도 함께 자리했다.
파주출판도시에 작가들의 작업실이 하나둘 자리 잡기 시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축적되었다. 특히 최소한의 물리적 작업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는 매체를 다루는 작가의 경우 조건에 맞는 작업실을 찾는 현실이 녹록지 않을 것이다. 현재 파주출판도시 내 작가들의 작업실 현황이 궁금하다.
정현 출판도시 내에만 약 80여 명, 파주시, 인근 고양시까지 확대한다면 120여 명의 예술가들이 정착해 있다. 인접한 심학산 인근 구산동은 20여 년 전부터 조각가들의 촌이었다. 가난한 조각가들이 많이 정착했던 곳이다. 이후 파주 운정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이곳에 도로가 생기고 길이 뚫렸다.
김노암 인프라가 좋아지자, 심리적 거리감이 줄어들었고, 유력한 작가들이나 기획자, 기관이 터를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코어가 형성되면서 확산되었다.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 이기웅 초대 이사장, 김언호 이사장 등이 미술인과의 친분도 두터웠고, 교류도 많았다. 미술 도서 출판도 활발했다. 2009년에 파주시로부터 지원을 받아, 몇몇 젊은 기획자 그룹이 공실이었던 건물 전체를 임대해서 작가 레지던스 공모를 했는데, 순식간에 신청이 마감되었다.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입주했던 작가들이 실제 파주출판도시 생활을 경험해보니 의외로 만족도가 높았고, 레지던시가 끝난 뒤에는 작가 스스로 임대 방식으로 계속 출판도시 내에 머무르고자 했다. 이듬해 그 작가들 대부분이 정주하게 된 계기였다. 이후 자연스럽게 입소문이 나면서 작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도 이 무렵 출판도시에 새로 자리 잡았다.
파주출판도시가 서울과의 거리가 멀어서 작가들이 활동하기에 불편할 수도 있다. 작가들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되는 다른 요인이 있는가?
정현 합정역에서 버스로 한번에 올 수 있다. 배차 간격도 짧아져서 불편하지 않다. 홍대 앞은 서교동, 동교동, 연희동, 상수동, 합정, 이제는 망원까지 확대되고 있는 큰 권역이다. 홍대 앞 상권이 발달하면서 그 일대 화실과 작업실을 임대해서 쓰던 작가들이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밀려나고, 저렴한 작업실을 찾아 이곳 파주출판도시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김노암 작가 입장에서 파주출판도시가 갖는 장점이 많다. 번잡스럽지 않고, 조용하고, 멋진 디자인 건물과 책과 인문학이 있다. 한마디로 뷰(view)가 좋다. 출판사 직원들이 퇴근한 이후에는 야간에도 작가들이 마음 놓고 작업이 가능한 곳이다.
정현 ‘책의 동네’라는 강점이 가장 크다. 이곳에서는 소설가, 시인들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다. 정서적 교감이 가능하다. 파주출판도시는 인문학의 기초가 있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새로운 판이 만들어진 곳이다.
역대 문화예술이 꽃피웠던 환경을 살펴보면, 17~19세기의 파리 살롱문화나 20세기 초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이면서 모더니즘이 발현되는 등 다양한 개성을 가진 예술가들의 운집으로 인해 새로운 창작 에너지와 새로운 예술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파주출판도시에 모여든 작가들이 연대를 경험하고 있는지, 작가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하다.
정현 양평 등지에 오랫동안 작업실을 두었던 작가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는 이유 중 하나가 출판도시에는 예술에 대한 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작가들의 동료 의식이 있다고 얘기한다. 작품에 대한 비평이 허심탄회하게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한다.
김노암 작가들이 서로의 성장을 도모한다. 그동안 예술가들이 주체가 되어서 모임을 만들고 무언가 해보려는 시도가 종종 있어왔지만 이렇게 규모가 크지 않았다. 이곳에서 예술가들의 멋진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 ‘협동조합기본법’이 2012년에 제정되면서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 협동조합에 대한 그간의 논의와 실험도 진행 중이다. 협동조합의 형식을 갖추게 된 파주아트벙커는 예술가들의 연대에 대한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갤러리의 매니지먼트와도 아주 다른 형태의 실험일 텐데 조합에 대해 소개해 달라.
정현 사실 이곳 작가들의 모임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협동조합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2017년 3월에 동네 작가들의 모임에서 처음 이야기되었다. 우리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예술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분기별 세미나나 강연회를 갖는다. 초청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서로 공통분모를 만들어 보자는 일종의 살롱으로 출발했다.
강연회나 세미나 형식은 조합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었고, 매년 출판도시 북소리 페스티벌에 맞춰서 미술이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출판도시 내의 공실을 활용한 전시를 제안하기도 했다. 전시를 위한 전용 건물이 없어도, 단지 내 공실을 활용하면 비엔날레식의 대규모 프로젝트도 가능한 환경이었다. 아트페스티벌에 대한 구상도 이렇게 출발했고, 계속 공간을 실험해보면서 노하우를 쌓아가고 비엔날레도 준비해보자는 얘기가 오갔다. 출판도시의 공실과 예술가들의 조합이다. 현재 조합원은 200여 명에 이른다.
김노암 조합원 세대 구성으로는 40대 작가들이 약 80% 정도로 가장 많다. 10% 내외로 20~30대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다. 40대 작가들은 작업 생애주기에서 가장 큰 공간이 필요할 나이다. 왕성한 에너지와 농익은 작품 세계를 이루며 큰 규모의 작업을 할 나이이다.
예술가들에게는 선택지가 다양할수록, 자유도가 높을수록 좋다. 저는 조직 운영도 해보고, 공간 운영의 경험도 있다. 어느 공동체나 갈등이 있기 마련인데, 건강한 갈등은 성장의 동력이 되지만, 성장을 깨뜨리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저는 이곳에서 갈등 관리, 리스크 관리 역할을 하며, 환기미술관 큐레이터를 역임한 강재영 대표와 함께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의 기획위원을 맡고 있다. 둘 다 시스템과 조직 관리에 대한 노하우가 있으므로 이에 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의 그간의 활동을 보면, 작가 워크숍, 국내외 큐레이터 초청 세미나 등등 작가가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을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참여자가 되고, 촉진자가 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협동조합에서 직접 작품 홍보, 혹은 매개의 역할까지 담당하며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
김노암 일례로 얼마 전에 세계적 미술 매거진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 전 편집장인 리처드 바인(Richard Vine)이 그의 소설 『소호의 죄』 한국판 출판을 계기로 이곳 출판도시를 다녀갔다. 말하자면 국제 아트 신(Scene)의 ‘인싸’들이 파주출판도시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현 지난 5월에는 뉴욕현대미술관 모마(MOMA)의 큐레이터 탈리아 브라호플러스(Thalia Vrachopoulo
s), 현재 뉴욕 존 제이 컬리지(JOHN JAY COLLEGE) 예술 전공 교수, 텐리 아트센터 갤러리(Tenri Cultural Institute)의 디렉터가 이곳에서
2019년 파주아트벙커 아트페스티벌은 출판도시의 도시 환경, 건축과 공간과 어우러지는 도시 곳곳을 전시, 세미나, 네트워크 파티 등 파주출판도시가 예술로 풍부해지는 교류와 소통을 통한 예술 플랫폼으로서 파주의 역할과 의미를 보여준 바 있다. 파주아트벙커 아트페스티벌에 대해 소개해 달라.
김노암 올해는 ‘예술의 길, 예술의 숲(Art’s Road, Art’s Forest)‘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다. 파주출판도시 전체(건물 및 야외 유휴 시설)를 미술관화하여 전시, 스튜디오 아트스쿨, 세미나, 체험전시 등 다양한 예술 콘텐츠를 구현했다. 특히, 올해 국제세미나 <세대에 걸친 트라우마와 트라우마 전파>에서 아라 오샤간(글렌데일시 큐레이터 및 문화부 커미셔너, 작가)의 강연을 계기로, 차년도 한국-아르메니아 교류전에 대한 협의가 구체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2020년 전시를 추진하기 위해 지금부터 긴밀하게 협의 중이다. 도시재생사업에 대해서도 파주아트벙커 작가들이 파주시와도 협력하고 있다. 파주시 미군 캠프기지로 사용되었던 ‘캠프 그리브스’에 대한 컨설팅도 했다.
꼭 전시나 축제 등과 같은 보여주기 형식만이 아니라, 파주시 담당 공무원들과 네트워킹을 하면서 그들에게 예술에 대해 직접 경험토록 하는 거다. 해외 각지에서 공부한 작가들이 파주시에서 다양한 예술을 통한 솔루션을 접하도록 하고 우리들과 교류한다. 경기도 북부 균형 발전을 추진함에 있어 파주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파주시와 경기도가 신뢰할 만한 파트너로서 파주아트벙커의 역할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파주출판도시의 제3단계 계획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아직 구체화되진 않았겠지만,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을 비롯해, 파주출판도시 내에 있는 예술가들이 중심이 되어 ‘파주아트팜시티 프로젝트’에 대한 상상을 한다고 들었다. 어떤 프로젝트인지 소개 바란다.
정현 파주출판도시 1, 2단지 인근 지역 약 820,000㎡에 문화예술과 농업, 교육과 지식 정보가 함께하는 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출판도시 3단계 계획은 2019년부터 ‘아트팜시티 프로젝트’ 구상으로 준비되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미래를 향한 창의, 생태 친화에 입각한 개발 계획이며, 경기 북부의 문화 거점으로 기획되고 있다. 파주아트벙커가 이 프로젝트의 콘셉트와 콘텐츠를 만드는 핵심 역할, 조력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김노암 “예술가들의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이것이 파주아트벙커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이곳은 심리적 거리감을 제외하면 장점이 많다. DMZ를 비롯해, 남북 냉전의 마지막 남은 화두가 있는 곳이다. 전 세계 건축학도들이 방문하는 계획도시이다. 주거 환경도 나쁘지 않다. 국가 산업단지이기 때문에 민간 영리개발사업으로 쏠리지 않고 관리가 잘 된다.
파주출판도시 1단지는 출판과 인쇄의 도시, 2단지는 영화와 디자인의 도시였다면, 3단지는 예술과 미래농업, 가령 스마트팜(smart farm)이 콘셉트이다. 환경문제가 심각하지 않는가?
정현 팜(farm)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이 땅이 무엇이었고, 앞으로 이 농토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농지를 싹 다 밀어서 개발 단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생명과 땅의 중요함을 고민해야 한다. 농사의 중요함에 대해 기억하고, 연결하기 위해 그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공부하고 있다. 전통적 방법으로서의 농사 방법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한다.
김노암 예술가들과 미래의 먹거리,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만나서, 지구를 살리는 농업의 모델 ,형식, 프로세스 모두를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예술가들과 함께 상상하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존에는 사실 농업과 예술을 접목한다고 했을 때, 디자인 컬래버레이션 이상으로까지 못 나간 것 같다. 아트팜시티라고 내걸었을 때 환경문제에 대해 작가들이 고민하는 바, 이를테면 환경 문제를 배출하지 않는 창작 작업의 형식과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친환경적인 전시, 쓰레기를 가급적 배출하지 않는 작업 방법에 대한 고민까지 병행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가능할까?
김노암 우리가 그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농업과 삶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많이 있지만 농업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직 보지 못했다. 예를 들면, 이대 앞 상권이 무너져서 정부에서 임대해서 청년들에게 장사하라고 임대료를 지원했지만, 몇 년 후 지원이 끊기자 다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파주아트벙커도 예술가들 스스로 만든 것이지 누가 시켜서 만든 게 아니다. 행정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예술과 농업이 만나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겠다.’는 식의 간결하고 분명한 콘셉트가 필요하다.
‘아트팜시티’는 인가받고 10년 이상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다. 가능하면 20~30대, 40대 작가들이 주요한 축이 되었으면 한다. 10년 후 이곳을 움직여갈 세대이다. 최소한 계획 단계부터 함께해서 20년 이상은 현역에서 활발하게 뭔가 일을 벌일 사람들이 참여해야 3단지가 젊은 도시로 건강하게 약동할 수 있다고 본다. 도시이다. 길게 봐야 한다.
정현 3단지 계획은 예술가들이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서 쫓겨나지 않는 정주 계획을 담고 있다. 예술과 삶이 공존하는 좋은 판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작가들에게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기능이 협소하다. 소수의 네트워크에 의존해서 국제전시가 이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 미술시장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 국내 좋은 컬렉터들도 해외 직거래를 한다. 외국 작가의 작품을 산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을 사봤자 10년 후에 가격이 오른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외국 작가 작품 구매 쏠림현상이 생긴다. 우리나라 미술시장이 그래서 더욱 어렵다. 그래서 작가들이 중간에 작업을 포기하고, 자기 에너지가 약하거나, 일상생활조차 힘들어지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이럴 때 몇몇 소수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200~300명의 네트워크의 힘이 있다면 일부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김노암 국제 네트워크의 독과점 상태가 조금 더 완화되고, 다양한 네트워크의 접점이 생기고, 노력한 작가에게 공정하게 기회가 올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예술가라는 존재를 유목하는 존재, 이동하는 존재로서 바라봤을 때의 지원 방식과 정주하는 존재로서 바라봤을 때의 지원 방식이 다를 것이다. 사실 공공 분야에서 유행처럼 레지던시 사업을 전국 각지에서 지원하고 있다. 젊은 작가들에게는 레지던시 지원이 하나의 스펙 쌓기처럼 여겨지는 경향도 있는데,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작가들이 정주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작가들이 연대하고, 동력을 쌓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들의 정주 계획이 어떤 지점에서 중요한가?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는 건물을 임대해서 운영 중이고, 홍대 앞에서도 9년 있었다. 10년 넘는 기간 동안 지불해온 임대료를 생각해보니 건물 2채는 샀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고 어차피 비용은 계속 발생할 테고, 보다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도 3단지 개발이 필요하다. 계속 지가가 오르고 부동산 값이 올라가면서 작가들이 도심에서 계속 밀려나고 있다. 예를 들면 홍대 앞이 국제적인 도시가 되는데 예술가들이 일조했지만, 그 과실은 건물주만 따먹고 있다. 자본의 논리다. 예술가들에겐 예술의 논리로 자본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그 대안을 여러 가지 만들어 보는 것이다. 뭐가 정답인지 모른다.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고, 우리 또한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그중 하나의 솔루션으로 조합도 만들고, 3단지 계획도 하고 있는 것이다.
정현 그동안 작가들의 레지던시는 매우 잘 운영되어 왔다. 비평가 등 이론 분야 레지던시도 필요하다. 3단지가 만들어지면 일정 공간은 이론을 하는 사람들이 레지던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계획해서, 해외 기획자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 3단지에 머물며 한국 작가들의 작업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다.
김노암 작가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평론가들과 기획자들의 조력이 필요하다. 성공한 작가들은 본인의 예술적 재능만 갖고 성공하는 게 아니다. 사회적 인프라, 미술계 여러 공적 인프라, 파트너들의 공조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정현 일례로 작년 말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모노크롬 미술사 기획전시를 하는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빠졌다. 관련 비평글이 없다는 것이다. 미학을 찾아야 하는데 연구된 부분이 없어서라는 거다. 담론이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작품이 팔리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작품에 대한 비평글, 담론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게 꼭 필요하다.
김노암 기성세대는 그래도 행복한 세대다. 달콤한 과실이 있었다. 그러나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가 적어졌다. 힘들어졌다. 정부의 공공 지원에는 한계가 있다.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이 파주출판도시라는 특이한 지역사회와 어떻게 공생하며 성장해가는지 매우 기대된다. 앞으로의 포지션과 역할, 사업 계획에 대해 설명해 주시라.
정현 출판도시 3단계 문화예술단지를 추진함은 물론, 매년 파주아트벙커 아트페스티벌을 진행하고, 분기별 학술, 예술과 담론 세미나를 할 계획이다. 파주출판도시가 예술로 풍부해지고, 교류와 소통을 통한 예술 플랫폼으로서 파주의 위상과 역할을 재천명하는 데 있어 파주아트벙커협동조합이 역할을 할 것이다.
김노암 파주 예술가들 간의 네트워킹, 작가들의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 등 지역 청소년들의 예술교육 등을 통해 지역 사회 공헌에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현 지금은 작가들 간의 연대가 중요하다. 내부가 튼튼해야 한다. 조합원들과 만나고, 분기별 세미나 등을 통해 관계 맺기를 하고 있다.
김노암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 사회적 기업도 기업이고, 협동조합도 일정 부분 기업의 형태이다. 모든 기업은 성장해야 유지된다. 매년 비용이 들어가고, 15%씩 성장하지 못하면 지속되기 힘들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모여서 매년 양적 성장을 이루기란 불가능하다. 조합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결국 예술가들이 평생 예술가로서 활동하는 데 어느 정도 기댈 수 있는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생산성을 목표로 하는 공장 조합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서로 도울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이다. 예술가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모임과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정현 점차 조합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활동이나 당면과제도 계속 바뀔 것이다. 향후 재단으로 발전하여 지원기관의 포지션을 갖추고 싶다. 예술가들에게 안식년을 주는 등, 재충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구상 중이다. 직업이 생계 수단이지만 예술가들이라면 안식월이라도 가져보고, 그동안 생계가 곤란하지 않도록 지원해주고 싶다. 그런 공적 역할도 하고 싶다. 과제가 많다.
11. 지금의 20대 청년 세대에 속하는 신진 작가들은 기성세대보다 출발점에서 매우 열악하다. 파주아트벙커도 30~40대가 대다수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젊은 작가들을 만나고 있을 텐데 젊은 작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 부탁드린다.
정현 조합 이사장을 맡았지만, 내가 만들고 이끄는 역할이 아니다. 젊은 작가들의 노력과 그들의 좋은 생각과 뜻을 같이 움직여주는 역할을 한다. 나는 그저 그들의 가치를 뒤에서 높여주고 싶다. 내가 선두 역할이 아니다. 내가 하는 말은 어쩌면 구닥다리 같을 것이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묻는 게 쉽지 않고 유효한지 모르겠다.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하고 있다. 이 세대에 맞는 상황판단과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는지는 그들의 몫이다. 내가 무엇을 주장하고 제시하는 게 마땅치 않다. 그래도 학교 강당에서 학생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본인 사랑에 대한 부분이다. 작가적 태도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사랑이다. 스스로 겪은 것들의 디테일이 있어야 설득력을 확보하고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 그래야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시작점이 생긴다. 그 사랑은 되돌아보는 성찰이고, 중심잡기이고, 그렇게 개성과 독창성을 가지리라 본다. 현란한 미술계에서 자칫 매몰되기 쉬운 상황은 연속될 것이고, 무엇이 중요한지 잊고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무엇을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찾아야 한다. 어디에서 설레었는지, 궁금해 했는지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 자기 사랑이 결국 꿈과 철학까지 다다르고, 그것이 남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장르나 표현 방법 등은 그 다음의 연결이다.
변순영은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고, 미술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교육에 관심을 두고 문화기획을 실천해 왔으며, 인천문화재단에 입사한 후, 예술창작 레지던시 공간인 인천아트플랫폼 개관준비팀장을 거쳤다. 지역 문화예술 공공지원의 영역에서 자기 역할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면서 성장하는 내일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