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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 커뮤니티, 예술인 증명과 인정 사이 그 어딘가에
심보선_시인, 사회학자코로나19가 불러온 재난 상황의 파장으로 문화예술계의 피해도 심각하다. 정부 산하의 문화예술 공공지원 기관에서 긴급지원 정책과 지원사업을 내놓고 있으나,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우리나라 문화예술 정책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는 질책도 있다. 여전히 예술가에게 증명을 요구하고, 공모 경쟁 방식을 통한 지원 정책 이상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 이어 지난해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에 이르기까지 현재 삶의 모습을 그만큼 쿨하게 내놓는 시인이 있을까? 사회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함께 장착하고 끊임없이 ‘그쪽’의 안부를 물으며, 직접 발로 뛰며 사회문제와 예술 현장에 관심을 가져온 심보선 시인을 만났다.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라는 구절을 마주하며, 현재 예술 현장에 대한 시인의 현실 발언과 연대에 대해 물었다.
국내 대표적인 예술인 복지사업인 창작준비금 지원사업은 지난해에 비해 2배 이상 증액되어 약 12,000여 명을 지원할 수 있는 규모였지만, 3월 초에 이미 소진되었다. 이는 예술인 수요에 못 미친다. 그 외 다른 지원사업들도 심의를 통해 경쟁하거나 예술가임을 서류로 증명해야만 지원이 가능한 정책이라는 지적이 있다. 현재의 예술인 ‘지원’에 대한 생각을 말해 달라.
예술가들을 인터뷰해보면 지원사업에 대한 몇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창작지원금은 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수입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각각의 지원 프로그램 성격이나 목표에 대해 예술가들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할 여력이 없는 것 같다. 두 번째는 예술가들은 작품 계획이 선정되어 지원금을 받는다는 것은 본인의 작업에 대한 객관적 인정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지원 기관의 정체성과 지원사업의 취지에 작가들이 동의하고, 이 사업에 내 생각과 능력을 투여해서 궁극적으로는 나의 기여로 인해서 이 사업의 결과가 잘 실행되길 바라며 혹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다. 하나는 도구적 차원이고, 두 번째는 예술가 프라이드에 대한 사회적 인정, 세 번째는 작품 활동으로 사회에 기여한다는 차원인데, 이 세 가지가 같이 있는 게 제일 좋다.
한편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입맛에 맞게 공적기금을 이용하고 있다’는 오해도 있고, 이로 인한 현장의 갈등이 있다. 예술가 입장에서는 ‘우리를 도구화한다’는 오해, 지원 기관 입장에서는 ‘예술가들이 사업 취지에 동의하지 않고, 사회적, 공적 이슈에 무관심하다’는 대립 구도가 꽤 오래 반복되는 것 같다.
세 권의 시집을 발표한 시인인데, 국내 문화예술 공공지원금을 받은 경험이 있는가?
받아본 적 없다. 만약 어떤 예술가가 풀타임 직업이 있다고 하면 암묵적으로 지원하면 안 된다는 가정이 있다. 왜냐하면, 공적 지원금은 힘든 예술가를 위한 복지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관련 법들도 정말 많다. 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공공기관들과 지원 프로그램들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이 얘기는 문화예술 정책 안에 다양한 목표들과 다양한 활동들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도록 만들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다 개별 ‘지원’의 허울만 있을 뿐이고, 예술가들에게는 다양한 소스(source)가 되어버렸다. 이때의 문제는 예술가들이 지원 정보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고, 각각에 맞추어서 작업 내용을 계속 바꾸게 된다는 점이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지원사업 공모 일정을 알려주고, 소개하는 게 마치 가장 중요한 멘토들의 역할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현장에 필요한 지원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예술인 복지가 먼저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인 복지가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가?
현재 예술인 복지 지원의 조건은 첫째, 내가 예술인이라는 자격을 증명해야 하고, 두 번째는 일정 소득 기준 이하라는 소득 입증을 해야 한다. 물론 장르마다 입증 방법의 수월함에 정도의 차이는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술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예술인 경력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각 예술 장르 특성에 맞는 발표 결과물을 긁어모아야 하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어떤 작가들은 발표를 많이 하지 않는다. 출판도 몇 년에 걸쳐 집필하며 준비하곤 한다. 문화예술 활동이 공적으로 가치 있다는 사회적 전제가 있을 때 창작지원금은 소위 구호 활동이나 복지와 구분된다.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지원받는 게 아니라, 내가 이것을 통해서 사회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사회적 인정이 예술가에게 주어져야 하는데, 지금은 지원금만 받는 것에 머물러 있다. 거기에는 행정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예술가들이 그 프로그램에 대해서 내가 돈만 받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이것을 통해서 인정받고, 사회적 기여를 한다는 느낌은 사실 행정과의 인터랙션에서 생기는데, 행정가들과의 대화가 여전히 부족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지역문화재단 등 문화예술 중간지원조직이 공공의 예산을 갖고 지원사업을 하다 보니, 절차상의 적법성과 공정성, 투명성을 강조하게 되고, 이는 예술지원사업에 일률적 기준, 표준화 방법, 조건 등을 붙이게 된다.
중간지원조직의 문제가 크다. 우리나라는 관련법에 의해 생긴 중간지원조직이 워낙 많다. 그 중간지원조직의 목표는 사실 관에 가깝다. 중간지원조직은 중립적인 전문가여야 하는데, 예산 의존성, 인사조직 등 구조적 한계 때문에 피어 커뮤니티(peer community)가 자꾸 관 중심으로 가는 경향이 생긴다. 원래 중간지원조직은 절대적으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아야 하고, 예술가에게 있어서도 특정 장르가 아니라 전체 예술가 커뮤니티를 대변해야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경우 예술 커뮤니티와의 매개가 되어야 하는데, 행정과의 이해관계나 각자 자기 장르를 감싸 안으려는 장르 이기주의가 비판을 받아왔다.
원래 중간지원조직은 민간이어야 한다. 민간을 뽑았는데도 민간 같지 않게 되어버렸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사적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중간지원조직이 한국에 있는가? 미국의 경우 비영리 단체인 AFA(Americans for the Arts)나 각각 장르별 길드 같은 단체들이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들 단체는 네트워킹, 정보, 회원들의 권익 보호, 정부와의 로비 등을 담당한다. 중간지원조직은 사실 예술가들의 협회(association)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전문성과 정책 마인드를 가진 단체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단체가 직접 리서치를 하고, 문화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모인 중간지원조직을 말한다. 이런 단체가 중간지원조직으로서 함께 정책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그간 비대면 예술 활동이란 형태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문화예술은 현장 경험을 특성으로 하는데, 현재 몇몇 공연장에서는 비대면 방법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다. 예술인 복지가 기본적으로 어려운 예술가를 돕는다는 개념이었다면,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예술인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일상에서 예술 향유가 차단되었을 때, 나의 일상에서 예술의 의미, 가치 등을 새롭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의 문화생활은 괜찮은 건지 안부를 묻고 싶다.
사실 온라인상의 문화예술 경험이 없지 않았다. 라이브 공연이 중요한 건 그 현장에 있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그 라이브니스(liveness)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가 문제다. 몇 가지 실험 중 미국에서 ‘CRP(Critical Response Process)’라는 안무 프로젝트가 있다. 리즈 레어만(Liz Lerman)이라는 무용 안무가가 1970년대 실험한 것으로, 원래 오프라인 프로젝트다. 무용 공연을 준비하는 프로세스에서 일반인들이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계속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단순히 “좋아요, 싫어요”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인터랙션을 한다. 이후 CRP를 온라인 버전으로 만든 게 리스판스(Response)라는 온라인 플랫폼이다. 사람들은 업로드된 동영상으로 창작 과정을 보고 온라인상에 계속 댓글을 남기는데, 여기에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좋아요, 싫어요.” 이런 식의 단순한 코멘트는 안 되고, 길게 써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을 내놓고, 예술가들도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과정을 보면서, 일반인들,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창작 과정에 깊게 참여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이다.
사실 온라인 스트리밍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첫째로 라이브니스 확보가 안 된다.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지 왜 굳이 예술 동영상을 보겠나? 그러나 경험이란 옆 사람과 나누고 공유하는 게 너무나 중요하다. 특히 의미 있는 작품일수록 사람들은 그 라이브니스를 같이 공유, 공감하고 싶어 한다. 공연을 보고 서로 얘기하고, 온라인에서도 소통하고, 이런 식의 커뮤니케이션이 모든 공연에서 확보되어야 하는데, 온라인 스트리밍은 그게 전혀 안 된다. 조회 수 늘린다고 해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술 경험에서 소통과 공유를 강조했는데, 현재의 비접촉, 비대면 경험은 오래 지속될 것 같다. 코로나 이후의 예술의 장은 어떻게 펼쳐질까?
모든 예술의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이고 경험의 공유인데, 코로나 이후에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이 경험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온라인 플랫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플랫폼은 서로 대화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스트리밍 서비스로는 안 된다. 이때의 커뮤니케이션 또한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디자인되어야 한다. ‘좋아요’ 댓글은 페이스북에 하면 된다. 작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할 말을 하고, 거기에서 대화하고, 예술가들과 소통하고, 아니면 같이 본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런 플랫폼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제는 예술가들이 작품 결과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프로세스 과정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까지 가져야 한다. 만약에 오프라인 활동이 점점 힘들어지면 힘들어질수록 온라인상에서 그런 식의 대화, 참여,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을 사람들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고민이 없지 않았다. 코로나와 무관하게 이미 있었다. 특히 국공립의 경우에 사람들의 참여와 피드백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고민하고, 그것에 대한 지원, 그것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육성 등이 필요하다.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스트리밍을 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된다. 넷플릭스도 그냥 만들어진 플랫폼이 아니지 않나.
사실 대면해서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온라인상으로 소통을 하고, 경험을 나누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지 않나?
온라인상에서도 사람들이 경험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 나누는지가 중요하다. 어떤 플랫폼인지, 어떻게 디자인되어 있는지에 따라 소통 방식이 결정된다. 사람들이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것만 하게 된다. 리트윗을 하는 순간 리트윗만 하게 되는 거다. 예전에 온라인 카페(트위터, 페이스북 이전) 시절에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길게 썼다. 그런데 요새는 그렇게 길게 쓰면 안 읽는다. 스크롤업(scroll up)하기 싫어한다.
생각해보면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것에 대한 실험이 예술가들 중심으로 없지 않았다. 백남준 작가도 했었고, 미디어아트 초기에도 많이 했었다. 다시 말해 트위터와 페이스북, 유튜브 이전에도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었다. 물론 오프라인과 연동되었기 때문에 더 시너지가 있었다. 미디어아트를 하자는 게 아니라 예전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소통 의지가 강했고, 소통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거치면서 특정 방식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스토리 분야에서 온라인 방식은 예전에 디지털 문학이나 하이퍼텍스트 문학 등에서는 누군가 시구절을 쓰고 다른 사람이 연결해서 쓰는 그 정도였다. 문학을 그렇게 접근하지 말고 하나의 스토리라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경험하고 알고 있는 스토리들을 온라인에서 공유하는 것도 일종의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온라인상에서 텍스트를 이어붙이는 것만이 온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어떤 스토리들을 연결시키고 공유하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것도 온라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두 유대와 커뮤니티와 관련된다.
코로나 이후에 온라인상에서 미적 경험이라는 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미적 경험을 활성화하는 어떤 예술적 장치들이나 플랫폼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R&D가 필요할 것 같다.
이전에 발표한 글에서 관계, 대화, 삶, 공동체, 사람이 반복되고 강조된다. 기본적으로 예술이 우리 삶에 유의미하고 가치 있다는 사회적 전제가 있어야 공공 지원의 당위로 귀결된다고 본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사실 여가로 생각한다. 사회학에서는 여가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수동적 여가와 능동적 여가. 수동적 여가의 극단적 형태는 잠자는 것이다. 혼자 보내는 것이다. 능동적 여가의 핵심은 노력하는 것, 진지한 것, 공부하는 것, 그리고 같이하는 것이다. 자기네들끼리 좋아서 같이하는데 그게 공적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여가가 왜 중요하냐면 여가 외의 모든 활동은 대부분 생계를 위한 것이고, 생산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것, 커리어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구도에서 위너(winner)를 만들어낸다. 문화예술을 통한 여가가 다른 여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록 승자를 지향하는 그런 경향성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공유나 즐거움, 혹은 공감 이런 것들이 그 예술 경험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여가를 통해 공동체 내지 유대를 형성하며, 이 공동체와 유대는 사람들을 경쟁 관계로 몰고 가는 조직 방식에 거스르는 다른 힘들을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계속해서 제공받는다. 내가 문화예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다. 문화예술계에서도 승자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매우 커서, 지극히 경쟁적이고,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힘들이 작동한다. 시장과 정책이 그런 것을 더욱 강화시킨다. 시장과 정책은 계속해서 위너를 뽑아야 하니까. 하지만 문화예술이라는 특정한 활동에는 그런 경쟁과 승자 중심의 흐름에 거스르는 또 다른 힘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
한국은 예술지원 재원 중 공공재원이 매우 비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민간지원에 해당하는 메세나나 개인 후원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해서, 민간 지원이 공공에 비해 대략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문화예술에서 공공지원의 영향이 매우 크게 작동한다. 그 재원조차 지원이 필요한 예술 현장에 다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 선별적 지원을 띠게 된다. 공공예술지원에 있어서 선별적 지원에 대한 생각은?
올해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 정책에서는 기존의 작품 지원뿐만 아니라 작품 준비 단계에 필요한 기획과 리서치 지원이 포함되어 예술 현장에서 반응이 좋았다. 재원은 제한되어 있고, 선별적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펀딩 소스들이 다변화되어 있다. 공공지원 영역에서는 미국국립예술기금위원회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주립-주정부-주정부예술지원기구(State Arts Agencies), 로컬-시/카운티-지역예술지원기구(Local arts Agencies)가 있다. 이 세 개를 합쳐도 전체 펀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다. 그 외 다른 영역으로는 개인 기부나 민간 재단이 많이 차지한다. 그럼에도 정부 펀딩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NEA, 주정부 펀딩 후원 로고가 찍혔을 때 사람들에게 주는 신뢰와 권위가 크기 때문이다. 민간 중에서도 중요한 재단들이 있다. 예를 들어 워홀 파운데이션(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같은 곳의 펀딩을 받으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재단의 지원금을 받았다고 그 권위가 바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보다 상위 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원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신뢰나 권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국내 민간, 기업 지원금 측에서 새로운 시도가 보이고, 그쪽 지원을 받는 것이 소위 더 핫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럼에도 대기업이나 국공립 중심의 지원 구도는 여전할 것이다.
유네스코 예술인의 정의(1980, ‘예술인의 지위에 대한 권고’ 중)에 따르면 “예술인이란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독창적으로 표현하고 혹은 이를 재창조하는 사람, 자신의 예술적 창작을 자기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러한 방법으로 예술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 고용되어 있거나 어떤 협회에 관계하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거나 인정받기를 요청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라고 정의되었다. 예술인에 대한 자의적 인정과 객관적 인정 사이에서 예술인 복지의 담론을 이어간다면?
보통 예술가는 ‘두 번’ 된다. 첫 번째로는 자기 스스로 예술가라고 여기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사회가 그 사람을 예술가라고 지칭하는 때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예술가가 되는 과정을 들자면 예술대학을 졸업해 학위를 따고 졸업전을 거쳐 개인전 발표와 같은 활동들이 수반된다. 해외 역시 그렇다. 한국과 해외의 차이를 문학계로 예로 들자면, 한국 문단에는 등단 제도가 있는 반면 해외에서는 자가 출판이 아닌 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간하게 되면서 두 번, 세 번 예술가가 되는 과정이 있다.
만약 시집도 내지 않으면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사회적으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시인은 항상 정체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시인이나 예술가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사회적 타이틀 얻기 위한 제도적 과정들에 있다.
그런데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다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지원금은 예술가의 자격 문제가 아니라 세금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에서 말하는 ‘누구나 예술가다’라는 정의는 정책과는 분리되는 이야기일 것 같다.
예술지원 정책의 질적 전환을 말하는 것인가?
선정 기준이 질적 전환이 되어야 할 텐데, 심사위원의 선호랄 게 있어 쉽지 않다. 이상적으로 피어 리그(peer league)에서 동료가 동료를 평가할 때 기준은 맥시멈(maximum)이 아니다. 미니멈(minimum)이다. 이 정도만 넘으면 우리는 동료다, 라는 것이 원래 피어 리뷰(peer review)의 핵심이다. 최고 퀄리티가 아니라 최전선에 선 동료의 의미에서 질적 지원을 말하는 것이다.
산문 중에서 “시인은 없어져도 시 쓰는 사람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접했다. 생활예술 정책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전문 예술인과 생활예술인의 경계도 흐려지고 있다. 예술인 복지의 범위와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실 전문 시인과 비전문 시인의 차이는 딱 하나다. 책을 묶어 출판하면 전문 시인이 되는 거다. 왜냐하면 시집은 사회적 활동이니까. ‘계속 책을 내겠다’라고 하면 ‘난 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는 거다. 그런데 등단은 했으나 10년 동안 시집을 낸 적이 없다면, 시를 쓸 수는 있겠지만 이 사람을 더 이상 시인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 등단했다고 해서 영원히 시인으로 남을 수는 없다. 쓰는 사람으로서의 시인과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시인이 있다. 의사 자격증을 땄는데 개업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의사라고 할 수 있나? 만약 시인을 ‘시 쓰는 사람’으로 규정하면 활동을 안 해도 시인이 되는 건가? 시를 쓰는 한 그리고 계속 시를 계속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시인이고, 시 쓰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시인’, ‘등단하고 발표하는 사람으로서의 시인’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며, 이 둘은 구별될 뿐이다.
예술가의 창작 활동 지원, 창작 활동의 육성, 예술가의 생계 지원에는 모두 차이가 있다. 창작 활동 지원에는 공정성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가진다. 등단을 했거나, 아니면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서, 혹은 정보가 많은 경우다. 그런 경우에 똑같이 경쟁해서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방식에는 반대한다. 창작 활동을 지원할 때는 예술가의 자격을 낮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예로 들면, 공모 신청 자격 제한에 등단 여부를 적게끔 한다. 개인적으론 좋은 원고는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복지 측면에서 보면 실은 예술가들 중 전업 예술가가 없다. 어쨌든 직장을 다니거나 이것저것 일을 한다. 나는 기본소득제도를 지지한다. 예술인이든 누구든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예술인 복지를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공정한 시장이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배경에 의해서 배제되는 경우나 창작의 기회가 없을 때 지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술인의 자격 자체가 불공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청춘’이라는 시가 SNS를 통해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낸 바 있다.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을 넘어서 모든 청춘들에게 섣불리 조언할 수는 없다. 어떤 시인들은 ‘시 쓰는 게 너무 좋다’고 하면 말리고 싶다고 한다, 힘드니까. 시인이든 예술가든 사실 혼자 작업하는 거 같지만 절대로 혼자 할 수 없다. 창작하는 순간은 혼자지만, 같이 뭔가를 도모할 수 있는 작은 커뮤니티, 동료를 만들라고 하고 싶다. 동료를 찾고, 만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혼자 갇혀서 소심하게 있으면 안 된다.
청년 관련한 정책이 요새 많은 것 같다. 청년들에게 비즈니스 마인드를 키워주고, 자립 훈련을 하는데, 청년들을 일찍부터 사업가로 육성시키는 기회와 전략 마인드를 갖게 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 좋은 것 같지만, 간혹 청년들의 동료 관계가 전략적으로 바뀌게 된다.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일장일단이 있다. 한편으로는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같이 가는 우정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일단 모여서 같이 애쓰고 노력하는 관계를 만드는 장은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예술 분야 청년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변순영은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고, 미술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교육에 관심을 두고 문화기획을 실천해 왔으며, 인천문화재단에 입사한 후, 예술창작 레지던시 공간인 인천아트플랫폼 개관준비팀장을 거쳤다. 지역 문화예술 공공지원의 영역에서 자기 역할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면서 성장하는 내일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