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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와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100%의 말걸기
차우진_티엠아이 에프엠 대표, 음악평론가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원소스(글, 영상)에서 빠르게 필요한 것을 취하고 다음 콘텐츠로 넘어간다. 엄기호의 『공부 중독』 제목을 빌려 ‘정보 중독’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정보를 줍고, 뒤처지지 않으려는 습관적 노력은 인지(cognition)의 속도는 높이는 대신 밀도는 낮춘다. 동시에 ‘관계’의 밀도도 낮아진다. SNS 게시물의 '좋아요' 숫자와 관계의 질량은 등가가 아니다.
‘친구 관계’는 정보적으로는 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용한’ 관계 안에서만 머물면 정서적 힘이 빠르게 고갈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그렇게 정서가 말라 버리기 전에 동호회 모임을 나가든,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든,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누리고 지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무척 어려워졌다.
‘비대면’이라는 단어가 ‘관계의 불가능’ 같은 뉘앙스를 주는 탓인지 ‘온라인 대면’이라 바꿔 부르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파편화된 개인이나 소비자만 있는 세상이 되지 않기 위해 ‘사회’를 만들고 ‘관계’를 일구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다. 음악평론가이자 기획자인 차우진이 퍼블리의 공동창업자이자 전 CCO인 김안나와 교환하는 편지, <100%의 마음>도 이런 시도의 어디쯤 있다. 다만 그 방식이 흥미롭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메일에 굳이 ‘숨은 참조자(이하 ’숨참‘)’를 모집해서 사적인(?) 메일을 함께 보는 독자를 만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공론장도 아니고 완전히 사적이지도 않은 독특한 ‘관계망’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차우진은 <100%의 마음> 외에도 올 초부터 <밤에도 일하는 사람들의 뮤직레터(이하 ‘밤레터’)>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초반의 레터를 보면서는 ‘무언가 통찰을 전하는 멘토가 되고 싶은 것인가?’라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계속 보다 보니 ‘전달’보다는 ‘말 걸기’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들 ‘포스트(post) 코로나’를 외치지만 실상은 ‘위드(with) 코로나’인 것 같은 시대, 숱한 전문가의 예언(?)이 무력함을 드러내는 요즈음, ‘연결’이라는 중립적 말을 넘어 ‘친함’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는 차우진을 만났다. 문화예술 분야가 마주한 것이 콘텐츠의 위기라기보다는 관계의 위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시작한 <밤레터>도 그렇고, 안나 님과 하는 <100%의 마음>도 그렇고 모두 레터(편지) 형식의 작업이다. 특별히 편지라는 형식으로 프로젝트를 만드는 이유가 있는가?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여러 가지다. 주업이 있고 부업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다 나에게 의미 있고 중요하다. 추려 본다면 서비스 기획, 콘텐츠 기획, 음악비평, 문화비평, 시나 소설 등의 창작, 이런 정도일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하는 여러 일은 (당연한 얘기지만) 분리되지 않고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다. 나는 이런 미묘한 결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설명하기가 어렵더라. 그래서 이들 전체를 묶는 ‘말(definition)’을 찾기보다는 펼쳐서 보여줄 수 있도록 아카이빙을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 방편으로 홈페이지를 고민하기도 하고, 개인 매거진이나 플랫폼도 고민해봤다. 하지만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더라.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이자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이 무엇인지 원점에서 다시 생각했다. 결론은 사람을 만나는 거더라. 사람들을 어디서 만날까? 어떻게 만날까? 스쳐 지나가는 거 말고 1:1 같은 느낌으로 대화하듯 만나는 방법이 뭘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레터’를 떠올리게 됐다.
음악평론가이시니 음악을 중심으로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어떤 정서를 공유하는 매체로써 <밤레터>를 운영하시는 것은 공감이 간다. 그런데 안나 님과 주고받는 편지인 <100%의 마음>은 어떤 이유로 기획한 프로젝트인가?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편지라고 할 수는 없으니 무언가 기획의 이유나 주제가 있을 것 같은데.
안나 님과는 약 10년 전에 ‘리디북스’에서 기획자(안나 님)와 저자(나)로 처음 만났다. 그 이후 가끔 문자 정도는 주고받긴 했지만 친밀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올해 초에 만나서 대화할 일이 있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5시간 정도를 얘기한 것 같다. 그런데 대화의 결론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모아지더라. 흔히 일에서 구조, 전략, 방향성, 동기부여, 관리 등에 대해 말하지만, 실상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싶더라. 그렇게 아주 오래간만에 진한 공감을 나누었고, 그게 <100%의 마음>의 시작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4~5년간 스타트업에서 관리자의 역할을 하면서 스스로 준비되지 않은 모습에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가면 좀 편해질까 싶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더라. 프리랜서라는 게 누군가가 주는 일을 받아서 하는 용역 아닌가? 열심히 하면 명성도 좀 생기고, 그걸 기반으로 이런저런 파생적 보상을 얻을 수 있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결국, 실력을 쌓고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면 안 되겠다 싶었다. 혼자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할 줄 아는 영역 안에만 머물기 십상이다. 그렇게 ‘일’과 ‘성장’에 대해 재정의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데, 어느새 사회 전체가 ‘일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상황이 되었다. 워라밸을 일과 삶의 깔끔한 분리가 아니라 일과 삶의 자연스러운 연결이라고 본다면-나는 그렇게 본다-결국 일이라는 게 한 사람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고, 사람과 일을 분리할 수 없듯이 일과 마음도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 <100%의 마음>의 핵심 주제랄까?
문화예술 분야 종사자라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그런데 우진 님과 안나 님이 주고받는 편지에 굳이 ‘숨은 참조자(숨참)’를 모집해서 반공개 형태로 진행한 이유는 있나?
이 부분은 <밤레터>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면, ‘애플이 성공하는 이유’ 같은 콘텐츠는 인기가 많다. ‘방시혁에게 배우는 OOO’, ‘잡스에게 배우는 OOO’ 같은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식의 콘텐츠에 대해 피로감이 있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레전드급 인물들에게서 배우는 게 피곤할 뿐 아니라, ‘그게 맞나?’ 싶은 의문도 든다. 정작 나 스스로는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낸 선배나 동료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 과정에서 존경이나 존중을 느끼는데, 안나 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간의 관계에서 본받고 싶은 점, 존경하는 점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때마침 숨참 참여자 중 내 지인들은 안나 님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안나 님 지인도 나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각자가 속한 영역의 사람들에게 서로를 소개할만한 좋은 조건인 것이다.
그럼 숨참 인원을 백 명 이상, 천 명 이하로 제한한 이유는 있나?
그건 간단하다. 일단 백 명 정도 되면 우리한테도 좀 의미나 책임이 있는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시점을 숨참 열 명이 아닌 백 명 정도로 잡았다. 하지만 숨참 최대 인원을 천 명으로 한 것은 기술적인 이유 때문이다. 구글 메일에서 숨은 참조로 포함할 수 있는 숫자 한계가 천 건이더라. 천 명 이상 모이겠나 싶기도 했지만, 일단 메일 기능의 한계가 거기까지라서 천 명으로 정했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편지를 뉴스레터처럼 어떤 폼(form)을 만들거나 대량 메일링 서비스에 태우는 것은 요즘처럼 레터 범람의 시대에 별로 재미없는 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아예 직접 메일을 주고받는 방식을 택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구글 메일 기능의 범위 안에서 정하게 된 거다.
계획대로 100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 대략 1년 정도가 지난다. 그동안 숨참들은 하나의 긴 대화를 함께 구경한 사람들, 즉 공통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 된다. 우진 님과 안나 님은 이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그룹(?)인 숨참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나? 숨참 커뮤니티로 해보고 싶은 추가적인 기획이 있나?
안 그래도 요즘 안나 님과 같이 얘기해보는 내용이긴 하다. 아직 구체적인 기획은 없다. 물론 우리도 숨참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하다. 참여 신청에서 기본 정보는 받았지만, 시트로 보는 것과 구체적 사람은 또 다르지 않나? 이들 중에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 혹은 숨참끼리 궁금해하고 만나고 싶을 수도 있고. 그럼 네트워킹 파티가 될까? 그런데 뭔가 또 억지스럽고 그런 상황이 되지 않으려면 좀 설계가 필요하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마음’, ‘일의 슬픔과 기쁨’, 이런 내용으로 나눌 수 있는 얘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만 생각하고 있다.
인터뷰 전에는 숨참을 통해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걸 플랫폼으로 키우려는 비즈니스 모델인가 하는 생각도 해봤었다. 현재까지는 그런 계획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투입되는 시간과 정성이 만만치 않을 텐데, 합당한 수준에서 생계와의 연결 고리가 좀 있어야 하지 않나?
플랫폼을 만드는 건 욕심을 낸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속도에 집착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어쨌든 과거와 달리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현저하게 낮아졌다. 중요한 것은 커뮤니티든 플랫폼이든 그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시스템이나 돈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 부분은 노하우, 태도, 정서, 감수성, 이런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규모가 큰 플랫폼이 되면 다 좋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내가 감당을 할 수 없다. 어떤 정서를 함께 나누는 상호적 관계를 만드는 데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밤레터>로 얘기를 해보자면, 현재 구독자가 650명 정도다.(인터뷰는 7월 14일에 진행되었다) 적지는 않지만 많다고도 할 수 없는 이 650명 정도와는 어떤 상호적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걸 위해 트리거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치들을 이래저래 시도해보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없었던 ‘신청곡’ 코너와 구독자가 서로서로 참여하는 ‘고민상담’ 코너를 만든 것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어쨌든 내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대상에 대한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대상에 반영되는 나에 관해 쓰는 것이다. 태도, 정서, 감수성은 결국 대상이 아닌 나에게 속한 것이지 않나? 평론 작업을 하면서도 항상 (작가가 대상 뒤로 사라지는) 그런 측면에서의 갑갑함이 있었다.
그 갑갑함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달라.
평론에서 크게 다루는 두 영역을 꼽는다면 작품론과 작가론이 있다. 작품론은 결국 작품에 관한 품평이라 할 수 있고, 작가론은 이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썼는가라는 해설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둘 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수전 손택과 오스카 와일드의 관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작품을 본 나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평론뿐 아니라, 기획이든 뭐든 내가 하는 여러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이다.
덧붙이면 뉴미디어 환경은 이런 내 생각과 잘 맞았다. 개인적으로 인터넷 환경의 핵심은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이라 생각한다. 하이퍼링크는 나의 글(의견)에 독자를 묶어두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곳으로 접속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댓글이나 회신 메일 등으로 쌍방향 소통을 하게 된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 그 감각이 나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다. 정보량의 차이로 전문가의 위치를 갖는 것보다 함께 콘텍스트를 만드는 작업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에게 익숙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좋아요’ 숫자를 확인하며 만족하는 것보다 새로운 독자와의 만남을 이어가는 게 좋다. 고정된 관계의 성채를 쌓기보다는 이동하고, 변화하고, 성장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가장 집중하는 미디어는 <디에디트>, <트레바리>, <퍼블리>다. 이런 식의 태도나 시도가 궁극적으로 닿는 지점이 뭘까 생각해보면, 좀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건강한 시민사회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그게 정말로 중요하다. 정서와 감수성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말 걸기를 시도하고 콘텍스트를 만드는 이유다.
최근에는 비평 작업을 안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는데,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보면 우진 님 나름의 방식으로 계속 비평 작업을 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맞나?
그런 셈이다. 레거시 미디어에서 작업하지 않을 뿐, 나는 여전히 많이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나는 여전히 비평가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나는 기획자일 것이다. 때때로 나에게 “이 판 떠나셨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저 사람이 말하는 판의 구성원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찌 보면 그 지적이 맞다. 왜냐하면, 안 불러주니까. 그 안에서 워킹(working)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계속 들여다보고, 그것에 관해 쓰기도 하고, 그곳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즉, 현상이 단일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거다. 빠르게 정의(define)하고 싶은 사람에게 나는 음악평론가가 아닌 거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음악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고, 그 관점으로 무언가를 관찰하고, 동시에 그런 관찰자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이걸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뭘까? 누구나 다 그걸 찾고 싶을 거다. 그 한 단어 찾는 게 사실은 그 개인의 미션이다. 옛날에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를 찾는) 그 미션이 소수의 사람에게 한정되었다면 지금 상황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요청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그 대답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지만, 이왕이면 찾아야만 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것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일 거고, 그 사람들이 나한테는 좀 더 중요한 존재들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이 나의 독자거나, 나하고 함께 만나거나, 무언가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 같다.
그렇게 보면 <100%의 마음>도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했지만, 결국 일과 삶의 맥락에서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고, 숨참도 그런 사람들이지 않을까 싶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그것 때문에 많이들 힘들어한다. 힘들 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 뭔가? 나에게는 “너만 그런 게 아니야.” 그리고 좀 더 솔직히는 “너 같은 사람들도 있어”가 아니라 “너 같은 고민이 동시대에 인류 보편적인 문제야”라는 말을 들으면 위로가 된다. 위로가 되면서, ‘아!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가 가능해진다. 보편적 고민이고, 기본적인 거라는 사실 인식이 지금 당장 필요한 어떤 행동을 하게 해준다. 챕터1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챕터2로 넘어갈 수 있는 거다.
3시간여의 긴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것은 <100%의 마음>과 <밤레터> 모두 아직은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결정의 상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차우진은 바로 그 미결정 상태를 오히려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지’가 남겨진 공간에서 관계가 자라는 것 같았다.
미결정 상태는 어느 정도 불안한 상태다. 하지만 어떤 감수성이나 정서가 미결정의 ‘여지’ 사이로 흐르면서 불안이 친함으로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연결이 끊어진 것에 화들짝 놀랐던 시간도 조금씩 지나고 있다. 차우진의 시도가 폭우가 걷어진 후에 발견한 어떤 것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설동준은 학부 때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후 아무 관련 없는 예술 분야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서른 살에 국악 단체에서 기획 및 단체경영 업무로 예술업에 발을 들였고, 예술, 과학기술, 신학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공학을 전공하면서 사람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생활문화, 인력양성, 문화예술교육 영역에 대한 연구 및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