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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김정은 그리고 뱅크시까지
2019 베니스 비엔날레 읽기‘2년마다(bi+annual)’라는 뜻의 비엔날레는 이제는 격년으로 열리는 현대미술제를 부르는 명사가 됐다. 그중에서도 베니스 비엔날레는 가장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 비엔날레 중 가장 권위 있는 행사로 꼽힌다. 1895년 이탈리아 국왕 부부의 25회 결혼기념일을 맞아 베니스시가 창설한 미술 전시회가 그 시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영국, 벨기에, 폴란드, 러시아 등 8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회가 열렸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1913년과 1946년엔 비엔날레가 열리지 못했으나 그 이후론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올해 열리는 제58회 비엔날레에는 국가관만 90개가 마련됐다. 원래는 미술제만 열리다가 1930년대에는 현대음악제, 32년엔 영화제, 34년엔 연극제, 80년 건축제, 03년 무용제가 추가됐다. 특히 국제 건축제는 짝수 해마다 열리며, 미술제와 번갈아 가며 베니스를 '예술의 도시'로 만든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크게 본전시와 국가관 전시로 나뉜다. 본전시는 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은 큐레이터가 자신이 선정한 주제를 풀어내는 전시로, 큐레이터의 역량과 스타일이 여실히 드러난다. 반면 국가관 전시는 본전시 주제와는 크게 상관없이 자국의 현대미술을 보여 주는 플랫폼으로 작동해 ‘미술계 올림픽’으로도 불린다. 비엔날레 사무국에서 구성한 심사위원단이 국가관 전시 중 1곳을 뽑아 황금사자상을 수여하기에 더욱 그렇다. 본전시는 옛 무기 창고인 아르세날레와 카스텔로 공원 내 이탈리아관에서 열리며, 국가관 전시는 카스텔로 공원을 중심으로 베니스 곳곳에서 열린다. 카스텔로 공원 안에 국가관을 마련한 나라는 상설관과 같은 개념으로, 다른 심사 과정 없이 매번 국가관 전시를 진행한다. 한국이 지난 1995년 고 백남준 작가가 적극적으로 한국관의 필요성을 역설해 카스텔로 공원의 마지막 국가관으로 들어갔다. 카스텔로 공원 내 국가관이 있는 아시아 국가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세계 최고의 미술 축제,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의 시작은 동시대 작가 중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조지 콘도의 대형 회화 ‘더블 엘비스(Double Elvis)’가 장식했다.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기를(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이라는 주제를 내세운 이번 비엔날레의 총감독 랄프 루고프(Ralph Rugoff, 이하 루고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관장이 선택한 이 시대의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다.
더블 엘비스는 1963년 앤디 워홀이 제작한 동명의 작품이 있다.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엘비스를 두 번 찍어 냈다. 조지 콘도는 서로 닮은 두 명의 미치광이가 술병을 들고 건배하는 장면을 담았다. 평화로운 제스처와 달리 핵미사일을 두고 한판 긴장감이 흐른다. 불과 두어 해 전까지 누구의 핵 단추가 더 크냐며 경쟁하다 갑작스레 평화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지도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상된다. 그렇다. 우리는 이토록 불안하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제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다.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기를(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이라는 주제는 발표 직후부터 이슈가 됐다. 중국 큐레이터들이 이 영문 속담이 ‘가짜 뉴스(fake news)’라고 지적하고 나서면서다. 이 격언은 1930년대 영국 정치인 오스틴 체임벌린이 중국 명대 말기 문학자인 펑멍룽의 저서에 나오는 ‘난세에 사람으로 살기보다 태평기에 개가 낫다(寧太平犬,不做亂世人)’에서 차용한 영문 속담으로 알려져 있다. 체임벌린은 이 말을 “지루한 태평기가 아닌 흥미로운 난세에 살아보라”라고 인용하면서 자신들이 이 저주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고 연설했다. 의도적 오역인지 실수인지 알 수는 없으나 ‘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는 일종의 ‘가짜 뉴스(fake news)’가 돼 버렸다.
어찌됐든 ‘흥미롭지만, 결코 평화롭지는 않은 이 시대’이기에 예술가들의 작업으로 지금 우리를 돌아보기엔 (결과적으로) 적절한 주제였다. 난민, 젠더, 환경 오염, 장애인, 소수자, 미국 패권주의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 현시대가 드러났다.
루고프 총감독은 "예술은 민족주의 대두를 막고 권위주의 정부를 끝내고 난민을 도울 수는 없다. 하지만 난세에 어떠한 삶을 영위하고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 지침은 줄 수 있다"라고 주제의 취지를 밝혔다.
흥미로운 건 이번 비엔날레가 기존 비엔날레 문법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것이다. 거칠고, 난해하고, 전복적이고, 거칠고 날것 그대로의 대안적 미술을 제시한 장으로의 ‘비엔날레’가 아니라 작품 의미를 쉽게 이해하고 관람이 재미있도록 전시를 기획했다. “미술에서의 진보는 콘텐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우리는 관객이 현대미술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실험해야 한다”라고 일갈한 아트뉴스와의 인터뷰가 참여 작가들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루고프 총감독은 비엔날레라면 늘 나오는 문명과 자본주의 비판의 목소리를 강변하는 데 힘을 쏟지 않고, 이를 드러내면서도 관객 개개인에게 다가가는 전략을 활용했다. 그는 시장에서 유명한 작가를 서슴지 않고 기용했고, 흑인 미술가들이 주류로 등극한 최근의 흐름도 가감 없이 반영했다. 미술의 흐름을 미리 가늠할 수 있는 발롱 데세의 장(ballon d’essai)으로서 비엔날레가 아니라 ‘지금’을 충실히 담아냈다. 회화, 사진, 설치 등 정통 장르 외 VR이나 인터랙티브 등 최신 IT기술을 활용한 작품도 전면에 배치했다. 인터넷 친화적인 최근의 관객에게 더 다가가기 위한 조치들로 읽힌다.
물론 평론가들 사이에는 ‘여느 대형 미술관 기획전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갖는 미술계에서의 역사적 정통성이나 특성이 사라졌다는 점에서다. 또한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사진 친화적’이라, ‘베니스에 가지 않고도 인스타그램으로 다 볼 수 있는 첫 비엔날레’라는 촌평도 비등하고 있다.
올해 비엔날레의 큰 변화는 작품 설명 태그에 갤러리명이 전부 빠졌다는 점이다.(지난해까지는 작품명과 작가 아래 소속 갤러리를 밝혔다.) 이렇게 상업과 명확하게 선 긋기에 나섰음에도 비엔날레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작업보다는 컬렉터의 구미에 맞는 작품이 많아 ‘아트페어와 차이가 더 줄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국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하루 약 8만 명, 한 해 2000만 명이 찾는 베니스는 전문적 미술 감상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에게도 활짝 열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또 다른 이름은 ‘미술 올림픽’이다. 바로 ‘국가관’ 전시 때문이다. 매번 본전시를 책임지는 총감독이 바뀌고, 그에 따라 새로운 주제가 발표되지만 국가관은 이와 큰 상관없이 자국의 동시대 미술을 보여 주고 프로모션하기 위한 장으로 작동한다. ‘체력이 국력’임을 내보이는 것이 올림픽이라면 ‘문화가 국력’임을 역설하는 곳이 베니스 비엔날레다.
총 90개 국가관은 올해도 총성 없는 전쟁을 이어 갔다. 특이점은 카스텔로 공원(자르디니 디 카스텔로) 내 상설 전시장을 마련한 29개의 유력 국가들보다 아르세날레 안팎에 자리한 비상설 국가관의 약진이 도드라졌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던 국가관은 ‘가나관’이었다. 올해 첫 데뷔였지만, 파이낸셜타임즈ㆍCNN 등 외신으로부터 ‘성공적’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가나 전통 가옥 형태를 차용한 건축물을 구축하고 그 안에 작품을 배치해 건물의 둥근 곡선을 따라 이동하면 가나의 굴곡진 역사와 발전의 궤적을 그대로 담아낸 회화, 설치, 영상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작품 하나하나가 상당한 아우라(aura)를 자랑하며 마지막엔 가나의 대표 작가 엘 아나추이(El Anatsui)가 지역 사람들과 함께 병뚜껑을 두드리고 이어 붙여 제작한 대형 설치작으로 마무리된다. 가나관 큐레이터는 나나 오포리타 아임(Nana Oforiatta Ayim), 참여 작가는 엘 아나추이(El Anatsui)와 이브라힘 마하마(Ibrahim Mahama), 펠리시아 아반(Felicia Abban)등 가나와 그 디아스포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섯 명의 예술가다.
국가관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투아니아관도 화제에 올랐다. 아르세날레 본 전시장 밖 주택가에 전시장을 마련한 리투아니아관은 ‘태양과 바다(Sun & Sea)’라는 전시로 기후 변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고, 점점 사라져 가는 해변과 환경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시장 내 인공 해변을 조성하고, 20여 명의 오페라 가수들이 하루 종일 ‘휴양객’을 연기하며 환경 재앙을 우려하는 노래를 부른다. 관람객들은 2층에 마련된 객석에서 이들을 바라보며 그 의미를 곱씹게 된다. 영국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루시아 피트로이스티(Lucia Pietroiusti)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한국관은 정은영,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 등 3명의 여성 작가가 참여해 근대화 과정에서 이중 억압에 처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불러냈다. 이미 사라져 흔적만 겨우 남은 그들을 역사의 중앙에 위치시켜 소수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로 썼다. “역사가 우리를 망쳤지만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라는 인상적 주제는 재미 교포 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 소설을 추천하는 멘션을 SNS에 올리면서 덩달아 한국관까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정은영은 여성들만으로 무대를 꾸렸던 ‘국극’과 젠더 다양성을, 제인 진 카이젠은 제주 4.3과 바리데기 신화를, 남화연은 20세기 코즈모폴리턴이었던 최승희를 영상으로 풀어냈다.
베니스비엔날레는 단순히 세계 최고의 미술 축제가 아니다. VIP 오프닝 기간엔 전 세계 미술계의 유명 인사는 물론 각국 문화 최고 수장들, 컬렉터, 작가, 관계자들이 모인다. 거대한 임시 플랫폼이 오프라인에 형성되는 셈이다. 루고프 총감독은 “베니스 비엔날레는 엄청난 플랫폼이다. 하나하나 기관들이 모여 강력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라고도 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을 얼마나 잘 드러내느냐는 플레이어들 각자의 몫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엔날레 기간엔 베니스 전체가 미술로 채워진다. 위성 전시들 또한 화려하다. 그중 압권은 단연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열리는 독일 신표현주의 선구자인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개인전이다. 81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작가는 거꾸로 매달린 인간 초상으로 유명하다. 전시는 초기 작업부터 최근의 청회색조 유령 같은 인물 대작까지 총망라했다. 푸른 계열의 인물상인데도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생존 작가 첫 개인전으로 왜 바젤리츠를 선택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프라다파운데이션에서는 1960~1970년대 가난한 미술 운동을 주창한 주역이었던 야니스 쿠넬리스의 회고전이, 팔라초 그라씨에서는 벨기에 회화의 정수를 보여 주는 뤽 투이만(Luc tuymans)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국 작가들의 개인전도 활발하다. 베니스 시립미술관인 포르투니 미술관에서 윤형근의 회고전이, 베니스 팔라초 카보토에는 이강소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비엔날레 바깥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얼굴 없는 작가 ‘뱅크시(Banksy)’가 차지했다. VIP 오픈 기간 베니스를 찾은 뱅크시는 ‘베니스 인 오일(Venice in Oil)’이라는 제목의 유화를 들고 노상에서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허가 없이는 판매할 수 없다는 경찰의 제지에 곧 작품을 거둬들여 떠났지만 이 과정을 촬영해 그는 자신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가판대를 펼쳤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권위 있는 예술제임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다”라는 멘트와 함께. 뱅크시는 지난 2013년에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게릴라 이벤트를 펼친 바 있다. 당시 작품을 60달러에 산 한 여성은 이를 경매에 부쳐 12만 5000파운드(약 1억 8770만 원)에 판매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이번에는 아직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런던 소더비 경매에 나온 자신의 작품 ‘소녀와 풍선’을 경매 직후 자동 파쇄해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제도권 미술에 대한 조롱과 상업화에 대한 반대 메시지가 베니스 한복판에 던져졌다. 지난 5월 11일 개막한 베니스 비엔날레는 오는 11월 24일까지 이어진다.
이한빛은 헤럴드경제 신문에서 시각예술 분야 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거의 매일 해당 분야 기사를 생산하고 있지만, 엄연히 미술계 머글(비전공자)이다. 일반인의 눈으로 미술계 소식을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학부에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으며 뒤늦게 MBA과정을 밟고 있다. 시장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시장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