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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감정을 둘러싼 혼돈의 시간
미술품 민간 감정기구 경쟁과 감정자료 문제2019년은 한국 미술시장에서 ‘혼돈의 시간’으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미술품 감정평가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이 청산에 돌입해서다. 바로 어제까지 이 작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정서를 발행해 주던 기관이 아무런 대책 없이 사라지자 가장 혼란에 빠진 건 바로 컬렉터들이다. 작품의 진위를 증명하던 문서가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기 때문. 지금까지 평가원이 발행한 감정서는 지난 17년간 9,000여 건이 훌쩍 넘는다.
청산만으로도 미술계가 술렁였지만 더욱 시끄러워진 데엔 평가원 일부 주주가 새로운 감정평가회사 설립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있다. 주주들 사이 출구 없는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미술품 감정을 놓고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해묵은 감정싸움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평도 나온다.
평가원의 시작은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초반 시작한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의 시스템이 고루하다며 일부 감정위원들(화랑주)이 나와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이하 감정협회)가 출범했고 이듬해인 2003년 감정협회의 활동을 행정적,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주식회사 조직인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평가원 전신)를 열었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는 이후 5년간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와는 별도로 감정을 진행했다. 작품의 진위를 놓고 두 기관이 서로 엇갈리는 결과를 내는 등 마찰을 빚기도 했다. 2003년 도상봉의 라일락 꽃그림의 경우, 화랑협회는 위작으로 평가원은 진작으로 판정했다. 2007년 화랑협회가 평가원 감정운영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협약을 맺고서야 감정 기관이 일원화됐다. 이 체제로 12년이 흘렀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는 이후 2012년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평가원의 주주는 대부분 화랑주들이다. 주요주주는 송향선 가람화랑 대표, 임명석 우림화랑 대표다. 둘의 지분을 합하면 49%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질적인 회사의 소유주인 셈이다. 3대 주주이자 초대 대표를 15년간 역임한 엄중구 샘터화랑 대표는 이들보다 훨씬 적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엄중구 전 대표는 “감정협회와 평가원은 사실상 같은 일을 하는 조직이다. 설립 당시 사단법인 정관이 사단법인에서는 영리 목적의 사업을 수행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부득이 주식회사(평가원)를 차렸고, 이 회사는 협회의 업무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라며 분리 운영의 이유를 밝혔다.
16년 넘게 한 사무실을 나눠 쓰며 잘 운영되던 평가원은 지난 2018년 9월 주주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해산을 의결한다. 엄 전 대표는 “최근 사단법인 관련법이 바뀌어 영리사업도 수행할 수 있게 돼 주식회사를 청산하고 기존에 존재하던 사단법인 감정협회로 일원화하자고 합의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평가원이 작년 11월 12일 화랑협회에 보낸 공문에도 잘 드러났다. 평가원은 해산의 이유를 묻는 회랑협회의 질문에는 “그동안 주식회사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과 사단법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의 조직과 업무가 일치하여 이를 일원화하자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있었으며, 감정이 공공성을 가진 업무 영역에 해당되므로 두 법인의 업무를 사단법인으로 이관하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해산안의 발의와 통과 이유로는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설립될 당시에는 사단법인의 수익사업이 가능하지 않아 행정적인 업무를 지원할 별도의 법인이 필요했으나, 현행법에서는 사단법인의 수익사업이 가능해, 평가원에서 수행하던 업무를 일원화하여 진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해산에 합의한 평가원은 2019년 3월 18일 주주총회를 개최, 청산인(임명석 가람화랑 대표)을 지정하면서 순항하는 듯했으나 3월 23일 평가원의 주주 일부가 신규 미술품감정평가 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난항을 겪게 됐다. 이 신규 단체는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이호숙 전 서울옥션 스페셜리스트, 김상경 누보 스토리즈 대표 등 3인을 대표자로 내세워 ‘주식회사 한국미술품감정평가연구센터(이하 센터)’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평가원 대주주인 송향선과 임명석도 센터의 주주로 참여했고, 이외에도 2명의 평가원 주주도 함께 신규 회사로 이동했다.
신규 회사에 참여하지 않은 엄 전 대표를 비롯한 2명의 평가원 주주는 임명석 청산인을 상대로 청산인해임청구소송을 2019년 5월 17일 제기한다. 이들은 임명석 청산인이 자격이 없음은 물론, 새로 설립한 센터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센터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기존 평가원 주주 측은 상법상 ‘경업금지’ 조항을 들어 센터의 위법성과 청산인에 대한 청산인해임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들은 “상법에 따르면, 회사의 주요주주의 경우 동종 업종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회사의 무한책임사원이나 이사가 되지 못한다”라며 “평가원이 청산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하나 센터의 설립이 청산을 신청한 이유라고 할지라도 그 시간 차가 너무 짧아 사전에 센터 건립을 검토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임명석 청산인에 대해서도 “신규 회사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 청산인 업무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라며 “상법상 경업금지를 지키지 않은 사람이 청산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부당하다”라는 입장이다.
기존 주주 간 소송까지 펼치며 법정 다툼으로 비화한 감정 업체들 간 싸움보다 더 뜨거운 감자는 바로 지난 17년간 쌓인 감정자료다. 엄중구 전 대표에 따르면 무려 9,296건에 달한다. 감정자료는 말 그대로 감정을 진행하면서 모은 데이터베이스다. 감정서를 포함한 감정 결과 기록, 감정 작품 촬영 이미지, 기타 감정에 필요한 중요한 자료들로 구성됐다. 평가원에서 직접 찾은 자료도 있지만 작가로부터 기증받은 것, 특정 화랑으로부터 감정을 목적으로 양도받은 것, 혹은 교수나 학계 관계자로부터 받은 연구 자료 등이 포함돼 있다.
이 자료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해관계자들의 평가가 엇갈린다. 정준모 대표는 “6개월 정도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모을 수 있다”라고 했고, 평가원 주주는 “감정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데, 이전에 평가를 했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이 작품을 진작으로 혹은 위작으로 판명했는지 그 근거가 바로 이 데이터베이스”라고 했다. 평가야 어찌됐든, 이 자료가 한국 미술품 감정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청산인을 비롯한 일부 주주들이 이 자료를 폐기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다른 주주들은 평가원의 100% 자산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며 폐기 불가방침을 명확히 했고, 이 과정에서 논란이 거세졌다. 심지어 화랑협회는 지난달 기자 간담회를 열고 “감정자료 폐기는 ‘먹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임명석 청산인은 “감정 데이터 처리를 놓고 의견이 오가다 ‘이럴 바엔 폐기하자’는 말이 나온 것이 과장됐다”며 “자료 폐기는 없을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현재 이 자료는 봉인된 채 평가원 주주 한 명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만의 싸움’으로 치부될 수 있는 ‘미술품 감정의 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시장 참여자는 바로 컬렉터다. 감정서를 보증하는 기관이 없어져 버렸으니 가지고 있던 감정서는 사실상 휴지 조각이나 다를 바가 없다. 화랑협회 측은 “17년간 쌓인 감정자료를 공유한다는 전제 아래, 화랑협회에서 평가원의 감정서를 보증하겠다”라고 나섰다. 그러나 이미 법정 공방까지 간 상태에서 평가원 주주들이 무난한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자료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은 가능할까. 법조계 의견은 부정적이다. 주식회사의 자산으로 돼 있기에 국가에서 함부로 압수하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또 하나의 감정기구가 출범한다. 화랑협회는 “8월 20일부터 협회에서도 감정을 실시하겠다”라고 발표했다. 사무실과 감정을 위해 필요한 집기들이 이미 마련된 상태다. 감정기구 ‘춘추전국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복수의 감정기구가 생기고, 이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문제는 시장에서 발생하는 혼란이 고스란히 컬렉터의 몫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평가원에서 ‘진작’으로 판단했던 작품이 센터에선 ‘위작’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작품의 진위는 다수결이 아니다. 진작 혹은 위작만이 존재할 뿐 99% 진작이라는 건 없다. 한 경매업체 관계자는 “어떤 방식이든 시장에 혼란이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해결되야 한다”라고 하지만 감정 기구 간 다툼이 정리되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은 건 컬렉터들이 스스로 감식안을 키우는 방법이다. 30년 가까이 미술품을 수집해온 한 인사는 “보증서가 필요한 작품이라면 아예 눈길도 주지 말라”며 “’살바토르 문디’같은 행운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라고 했다. 씁쓸하지만 명확한 가이드라인이다.
앞서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운영하고 있는 미술은행과 위탁 운영하고 있는 정부미술은행을 합쳐 별도 법인인 ‘국립미술은행’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미술품 감정과 평가 기능을 수행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지난 4월 23일 서울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개최한 ‘미술분야 정책연구 세미나’에서 발표된 사안이다. 국립미술은행을 독립법인으로 설립하고, 기존 사업은 물론 미술품평가, 공공미술 발주와 관리 기능까지 확대시킨다는 계획이다. 물론 미술품 평가는 행정적 절차를 위한 평가로 유통시장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에서 미술품 평가 공공기관을 지정하기로 한 만큼 이 ‘국립미술은행’이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도 크다. 당시 세미나에서 토론자로 나선 심상용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는 “미술은행이 자체적 미술품 감정 기능까지 갖게 되면 현재 시장의 감정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에서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술관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지나치게 비대해질 우려도 있다”라고 전향적 재고를 요청하기도 했다.
시장도, 국가도, 학계도 누구 하나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미술품 감정’이다. 완벽한 감정 시스템이란 건 환상이지만 그에 준하는 시스템을 갖출 수는 있다. 당위와 의지의 문제다.
이한빛은 헤럴드경제 신문에서 시각예술 분야 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거의 매일 해당 분야 기사를 생산하고 있지만, 엄연히 미술계 머글(비전공자)이다. 일반인의 눈으로 미술계 소식을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학부에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으며 뒤늦게 MBA과정을 밟고 있다. 시장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시장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