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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당연한 것들에 조금씩 균열내기
.‘원래 그렇다’는 이유로 개선이 필요한 상황들을 추가 넘어가는 경우를 종종 마주할 때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원래 그렇기 때문에 당연한 것들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쉽게 바뀌지 않더라도 바꿔 보고자 하는 마음에 시민 단체에서 활동가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문화예술 단체 대표이자 문화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기획은 내가 나누고 싶은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과정이다. 그 누군가는 주로 나와 같은 결핍이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동안 관심 있는 문제들에 대해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는데, 그중 작년에 진행한 두 개의 프로젝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동네형들’에서 단체 직원 1명을 모집하는 채용 공고를 올렸는데, 지원서 제출을 마감하고 나니 총 62명이 지원을 했다. 고작 직원 6명인 작은 단체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채용 공고의 인건비 항목. 다행히 월 급여액에 0을 하나 더 붙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선정하는 과정은 늘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예상보다 지원자가 많다 보니 구성원 모두가 더욱 긴장한 상태로 지원서들을 몇 번씩 정독하고 선정 과정을 다시 검토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단체에서 공개 채용을 하면 서류 심사 없이 모든 지원자를 공간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고 인터뷰를 진행해 왔다. 인터뷰 방식을 고민하다 보니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가 합의해야 가능한 일인데 왜 늘 면접관만 질문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사 후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지원자들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시간으로 진행했다. 모두 문화예술 분야에서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다 보니 그동안 어디에 물어볼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공감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전 같으면 보통 이틀 정도면 충분했는데 62명이다 보니 일주일 내내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5일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심사숙고하여 최종 1명을 선정했다. 탈락한 지원자들에게 보낼 이메일 내용을 고민하다 보니 지금은 이 61명을 공개 채용으로 만났지만 앞으로는 같은 문화예술 영역에서 함께 일하고 협업하게 될 동료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단체보다 더 좋은 단체와 기관에서 일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경험과 열정을 가진 청년들이었고, 정성을 담아 쓴 자기소개서와 인터뷰를 위해 내어 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응원이 어떻게 하면 말로만 끝나지 않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 채용 과정에 대한 고민과 함께 문화예술 분야의 선배 기획자들을 초대하는 글을 올렸다.
“이제 곧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청년들에게 기획자의 삶과 일에 대한 고민과 경험을 나누어주실 선배님들을 찾습니다. 급하게 준비한 터라 일정이 다소 촉박하고, 사례비를 드릴 예산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함께해 주실 선배님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중에 동네형들이나 제가 꼭 필요하실 때, 군말 없이 달려가겠습니다.”
페이스북 친구로 연결되어 있는 20명의 선배들 이름으로 태그를 걸었다. 흔쾌히 함께하겠다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모 선배의 “여우 같은 곰도 아니고 곰 같은 여우도 아니고 그냥 여우네 박도빈 ㅋㅋ”이라는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공개 채용 애프터서비스가 만들어졌다.
한날한시에 다시 모으기 불가능할 것 같은 선배들이 모였다. 탈락한 지원자 61명 중 40명 정도가 참여를 희망했고 나머지 20명의 자리는 오픈하여 신청을 받았다. 선배들이 각자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한 후, 후배들이 관심 있는 선배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준 선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착한 선배> 완장을 채워드렸다.
애프터서비스 이후 종종 어느 단체, 어느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외부에서 우연히 공개 채용에 지원했던 청년들을 만나도 서먹하지 않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어 언젠가 이날 함께했던 청년들과 다시 모여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근황을 나누는 파티를 열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 여담으로 6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청년은 동네형들에서 1년 동안 일하며 본인이 ‘다른 사람들의 판을 깔아 주는 기획자 역할보다 남들이 깔아 주는 판에서 직접 주인공이 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은 단체를 그만두고 연기학원을 다니며 배우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적성을 찾았으니 그 또한 좋은 일이다.
비영리 단체에서 여러 공모사업을 경험하면서 수없이 많은 ‘당연한 것들’을 만나 왔다. 도대체 그 시작점이 언제인지도 모를, 나만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하고 있을 것 같은 이 ‘원래’들은 모든 논리를 뒤로하고 그저 숙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다. 그래야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모사업 시스템은 그동안 포럼과 간담회, 자문회의 등에서 아래와 같이 수없이 이야기해 온 문제이다.
“공모사업 심사에 들어가면 일렬로 앉아 있는 심사위원들이 어떤 자격으로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밤새워 쓴 기획서와 PT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여 줬는데 사업이 선정되지 않아도 그 이유는 알려 주지 않는다. 사업에 선정되면 사업비는 절반 정도로 삭감되었지만, 당초 계획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반영한 실행계획서를 써야 하고, 단체 대표와 기획자는 인건비를 책정할 수 없으며, 단체의 고유 콘텐츠로 사업을 받아도 상근 활동가는 활동비나 강사비를 받을 수 없다. 사업 진행은 당연히 잘해야 하는 것이고, 온・오프라인 홍보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정성적・정량적 평가를 바탕으로 향후 사업의 지속 가능한 방안과 자립 운영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공모사업을 하는 단체는 건강하지 않으므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던 중 서울문화재단에서 <서울을 바꾸는 예술 : 모-임>이라는 타이틀로 기획자들을 초대하여 각자 원하는 주제로 세 번의 모임을 개최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세 번의 모임에 필요한 발제비와 임차비, 다과비 등에 대한 200만 원의 예산이 지원될 예정이었는데, 첫 회의에서 공모사업처럼 영수증을 증빙해야 한다고 하여 긴 토론이 있었다. 재단으로부터 제안을 받는 입장에서 별도의 인건비를 책정할 수 없는 규모의 예산으로 누가 굳이 정산 서류를 만들면서까지 모임을 기획하고 싶겠는가. 결국 보고서만 제출하는 용역 계약의 형태로 진행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지만 (욱하는 마음에) 내가 기획하는 모임의 주제를 ‘공모사업’으로 결정했다.
두 번의 모임에 다양한 분야의 기획자, 예술가, 중간조직 실무자 등이 참여하여 기존 공모사업의 문제점과 새로운 공모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6명의 기획자가 이 내용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모사업 시스템을 설계하는 모임을 가졌다. 무료로 쓸 수 있는 공간에서 각자 다과를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는 방식으로 진행했고 6명의 기획자는 발제비나 회의비 없이 참여했다. 그리고 우리가 설계한 공모사업을 직접 개최했고, 서울문화재단에서 모임에 지원한 200만 원은 공모사업의 사업비가 되었다.
이 지원사업 속 공모사업의 주제는, 그동안 공모사업에 공통적으로 누락되어 있던 ‘나’로 정했다. 기획은 기획자의 욕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사업의 대상은 늘 기획자를 제외한 타인들로 설정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개인의 욕망을 공모한다면 어떤 기획들이 제안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공고문에는 6명의 심사위원들의 프로필과 각자의 심사 기준을 넣었다. 200만 원은 기타 소득 6.6%를 제외하고 받게 되는 상황이라 사업비 총액은 1,868,000원이 되었다.
온라인에서 적지 않은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우리의 고민에 공감하여 내용을 공유해 주었고, 총 14개의 사업이 접수되었다. 생일 파티, 빌딩숲 춤판, 개인전, 출판 등 다양한 프로젝트 제안자들과 서류 심사 없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울 아현동의 행화탕 뒷마당에서 진행된 야외 인터뷰는 즐겁고 유쾌했다. 공모사업에 있어 경쟁의 긴장감이 아주 없었겠냐마는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보다는 각 제안자들의 욕망을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프로젝트 선정을 위한 논의를 진행했는데 꽤 오랜 시간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 보면 심사자나 제안자 모두 처음이다 보니 서툴렀다. 우리는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공모사업을 시도해 보자고 야심 차게 ‘개인의 욕망’을 주제로 내걸었지만 심사 과정에서 결국 ‘개인의 욕망’에 대한 가치 판단과 우선순위를 논의하고 있었고, 제안자들의 프로젝트에는 개인의 욕망과 공공의 이익, 사회적 가치가 혼재되어 있었다. 기존의 시스템을 비판하면서도 그동안 해왔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결국 하나의 프로젝트를 선정하긴 했지만 선정 과정에서의 고민을 모든 제안자와 공유하고 싶었고 6명의 기획자들이 각 프로젝트에 대한 심사평을 작성하여 14팀 모두에게 전달했다. 그동안 수많은 공모사업에 참여했지만 탈락한 이유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어 좋다는 피드백이 많았다.
최종 선정된 제안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사찰 요리를 연구하며 팝업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요리사이다. 본인은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하고 있는데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육식 요리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당시에는 동물권 활동을 하는 단체와 공간을 공유하며 채식 요리를 파는 식당을 임시로 운영하고 있었다. 공모사업을 통해 여러 지역의 전통 시장을 다니며 여러 종류의 나물과 향신료를 연구했고, 현재는 용산 해방촌에 ‘소식’이라는 식당을 정식으로 오픈하여 사찰음식을 재해석한 음식을 팔고 있다.
소개한 두 개의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형이다. 새로운 동료를 만나는 공개 채용의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고, <개인의 욕망을 공모합니다>는 올해도 개최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딱히 완성도가 높은 것도, 가시적인 성과를 낸 프로젝트들은 아니지만 나의 기획으로 전달된 고민과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영감과 아이디어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몇몇 공공기관과 중간조직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기획들이 시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이 모여, 세상 당연한 것들에 조금씩 균열을 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WHO’S NEXT? |
독립기획자 정혜리 PD를 추천합니다. 자기 철학이 분명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기획자입니다. 작년 <개인의 욕망을 공모합니다>를 통해 처음 만났고 서로 일하는 분야가 달라 협업할 기회가 많지는 않지만, 가끔 만나면 많은 고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동료이기도 합니다. |
박도빈은 20대에 2년간 미국과 프랑스, 인도에서 자원 활동가로 살았고 우연히 찾아간 안산 원곡동에서 난생 처음 예술가와 기획자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후 국제교류, 환경, 청소년, 도서관 등 여러 분야의 비영리 단체를 거치며 문화예술 활동을 병행하다 2012년 서울 강북구로 이사와 <문화예술커뮤니티 동네형들>의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과 지역문화, 청년활동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해 왔으며 최근에는 청년 정책과 거버넌스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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