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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한 뼘 더 무대와 멀어지기
.공연을 기획하면서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단 한순간’을 만들어 낼 때이다. 실력 있는 실연자들이 넘쳐나고, 관객들의 수준은 높아져가며, 온갖 미디어로 좋은 공연을 다 만나볼 수 있는 이 시대에, 그 ‘단 한순간’의 경험은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할까. 이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중이고, 요즘은 ‘공간과 분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전형적인 무대 공간을 벗어나 그 공연만의 특별한 색깔을 드러내는 공연 공간 기획, 운영을 시도해보고 있는데, 작년부터 ‘음악그룹 나무’의 프로듀서로서 함께한 작품들을 소개함으로써 이러한 시도를 공유하고자 한다.
음악그룹 나무는 전통음악을 전공한 연주자 2명과 재즈를 전공한 연주자 1명이 모여 있는 그룹으로, 음악적으로 전통음악과 재즈라는 장르에 분명한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그 둘이 뒤섞인 퓨전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분명 즉흥이지만 재즈는 아닌, 전통적인 듯하지만 지루하거나 오래된 음악 같지 않은, 매우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방법으로 그들만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팀이다. 그리고, 이런 ‘실험적’이고 ‘낯선 것을 즐겨 하는’ 음악은, ‘실험적’이고 ‘낯선’ 공간에 담기는 것이 어울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음악그룹 나무는 2018년 서울남산국악당(이하 국악당)의 공연장 상주단체로 선정되어 활동했는데, 국악당과 그곳을 둘러싼 남산골한옥마을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빌딩 숲 사이에 자리 잡은 한옥마을은 전통적인 듯 세련되어 도시와 잘 어울리고, 공연장뿐 아니라 한옥, 국악당 중정 등 다양한 공간들은 음악그룹 나무가 가진 강점들과 매칭되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이 공간들에 맞추어 음악그룹 나무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공연은 6월에 있었던 <신 나무풍류>였다. 연주뿐 아니라 창작에도 능한 연주자들이 모인 단원 전원이 창작자로 나서 무대를 채운 작품이었기에 개개인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관객들이 그것을 더욱 가깝게 느끼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여, 방에 모여 가까이 둘러앉아 음악의 흐름을 선명하게 듣고 즐기며 일상에서 해방감을 찾던 조선시대의 ‘풍류방’을 모티프로 무대를 객석으로 꾸며보았다. 사실 전통 공연이고 ‘풍류방’을 표방하는 공연이기에 한옥에서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국악당 기획 공연 중 한옥 공연이 여럿 진행되기도 했고, 관객들이 객석이 아닌 무대에 함께 앉아 연주자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오히려 국악 공연으로서는 ‘낯설고 실험적’인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이 평소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대기실 쪽 아티스트 동선을 입장동선으로 사용했고, 공연장엔 방석과 의자를 깔고 둘러앉아 공연을 찾은 모두가 공연을 함께 준비하고 즐기는 경험을 나누어가진 유쾌한 시간이었다.
다음 공연인 <어쿠스틱 in 나무>는 한옥에서 열렸다. 2016년 발매된 음악그룹 나무의 1집 양류가 《Song of Willow》는 전통 국악부터 프로그레시브한 사운드까지 음악그룹 나무의 음악적, 음색적 실험이 가득 담긴 음반으로 호평을 받아왔는데, 전자악기나 전기를 사용하지 않은 자연음향만으로 이 레퍼토리를 선보인다면 음악그룹 나무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이었다. 공연은 8월 한 달간 4주에 걸쳐 매주 목요일 밤에 진행됐는데, 무더위와 폭우를 뚫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음향 효과 대신 탬버린을 치고, 신디사이저 대신 멜로디카를 직접 불어가며 연주하는 음악그룹 나무에 늘 환호를 보냈다.
1년간 만든 모든 공연 작업의 노하우를 담아낸 마지막 공연은 <실크로드 굿>이었다. 이 작품은 굿이 가진 형식과 정신을 현대적으로 무대화한 작업으로, 원래 굿판이 긴 시간 동안 진행된다는 점과 인류의 오랜 역사와 함께한 굿 음악이 음악그룹 나무의 음악으로 전승되기까지의 그 역사가 깊다는 것을 공간에서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관객이 첫발을 들이는 국악당 입구부터 중정, 계단과 로비 그리고 무대까지 이어지는 동선 전체를 공연의 배경으로 삼고, 실제 굿판에서 쓰이는 지화와 무구들을 활용한 전시로 컬러풀하고 전통적인 굿의 형태를 먼저 만나게 하고자 했다. 관객들은 이동 시간과 공간이 흐를수록 점점 색깔이 단조로워지는 공간에서 현대적인 음악으로 새롭게 풀어낸 음악그룹 나무의 굿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구성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막판 극장 상황으로 인해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초반부 공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국악당 내부 계단을 내려가서야 만나게 되는 계단식 정원에 커다란 굿당 모양의 무대를 세우는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 바뀐 모양대로 또 다른 의미가 생기게 되었지만 그 의미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 오랜 시간 고민했던 첫 의도와는 달라져 아무래도 아쉬운 점이 남는 공연이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리뷰들을 확인하면서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공연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배운 기회였다.
상주단체 활동 외에도 음악그룹 나무와 함께 많은 시도를 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작년 5월 있었던 <경복궁 음악회>였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고궁에서 우리음악듣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선보인 작품으로, 2017년 이미 한번 진행했던 ‘대금이 이끌다’라는 공연을 다듬어 진행한 것이었다. ‘피리부는 사나이’ 콘셉트로 연주자가 선두에 서서 음악으로 관객들을 이끌면, 관객들은 경복궁의 두 번째 문인 흥례문부터 교태전까지 이르는 경복궁 일원을 공연자를 따라 거닐며 전통음악과 무용을 감상하는 공연이었다. 여름밤, 전통음악과 함께 궁을 거니는 관객의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머시브’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공연을 기획했고, 이 내용은 SBS 뉴스에도 소개되는 등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야간 개장 기간 중 경복궁을 찾은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을 위한 열린 공연이었던지라 돌발 변수가 너무 많아 진행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사실상 안전사고 없이 잘 끝난 ‘프롬나드 공연’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에도 음악그룹 나무와는 ‘나무 유랑’, ‘광화문 유랑’ 등 공연장이 아닌 특정 공간의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엮어내어 다시 채우는 이동형 공연 시리즈 등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가보았던 곳, 가고 싶었던 곳, 좋아하는 곳, 궁금한 곳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를 탐색하고, 그 공간을 음악과 이야기로 다시 엮어내어 소개하는 작업은 늘 흥미롭다. 사실 많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는 공연장 작업이 변수도 적고 안전하다. 하지만 내 눈길 닿는 곳에 쌓여 있는 무수한 레이어들 사이에 나의 시선, 이야기를 하나 더 얹어내는데서 오는 감격이 있다. 그래서 늘, 점점 고정된 무대를 벗어나보기 위한 궁리를 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무대와 한 뼘 더 멀어질 상상을 하고 있다.
WHO’S NEXT? |
문화통신사 협동조합의 김지훈 대표를 추천한다. 전주 지역에 따뜻한 바람을 만들어내는 기획자로, 그가 작은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던 시기, 지역을 기반으로 문화예술기획자로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다는 인식을 나눈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빈 공간을 찾아 나서 이야기를 담아 넣고, 거리로 나가 음악을 연주하고, 청년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지역민들과 연대하며 지역에서 문화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실험을 계속해오고 있다. |
정혜리는 ‘좋은 것은 나만 알고 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지역의 작은 극단, 국제음악축제사무국, 재즈와 국악, 그리고 클래식 음악 공연기획사, 공연 에이전시 등을 거치며 공연 기획과 운영, 축제 기획, 국제교류 업무 등을 담당해왔다. 현재 프리랜서 기획자로 음악, 무용, 연극 등 공연예술을 주로 다루지만, 문학, 전시 등 모든 장르에, 나아가 장르의 벽을 허물고 ‘함께’ ‘메시지’를 전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19 ACC프린지인터내셔널의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으며, ‘음악그룹 나무’의 프로듀서, ‘연희하다’ 기획자로서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지만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동시대적 창작 작업을 하고 있는 단체들과 함께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은 예술적 경험에 공간이 주는 영향에 관심이 있어, 여러 유형의 공간 구성, 기획, 해석에 대해 관찰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