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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인투 코리안 아트: 서울
-정말 맛있는 기내식, 친절한 승무원, 앞 좌석 뒷면 모니터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던 영화로 꽉 채운 마법 같은 14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습한9월 어느 날 오후, 나는 서울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탑승구에서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던 남성분이 나를 바로 알아보고 따뜻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호텔로 이동할 차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내가 몸담고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언젠간 꼭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며 열흘간 워싱턴DC 내셔널 몰에 위치한 여러 국립 박물관을 알차게 둘러볼 계획도 이미 세워놓았다고 대화를 이어갔다. 미국의 일개 공무원에 불과한 나는 유명 인사를 대하는 듯한 환대가 어색했지만, 이 색다른 경험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피곤한 모습을 셀카로 남긴 후 검은색 대형 SUV에 몸을 싣고 화려한 석양을 배경 삼아 서울로 향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세계 곳곳에서 활동 중인 큐레이터와 작가 16명을 초대했고 나는 그중 한 명이었다. 프리즈 서울(Frieze Seoul)과 키아프(Kiaf) 아트페어 개막을 앞두고 나흘간 진행되는 스튜디오 방문, 네트워크 쌓기,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다이브 인투 코리안 아트: 서울> 에 초대를 받긴 했지만, 나는 메일 수신함에서 초대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주최측인 예술경영지원센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우리는 하루에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서울 구석구석에 위치한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예술인을 위한 공간에 자리를 잡은 스튜디오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무실이 밀집한 별다른 특색이 없는 건물에 입주해 있는 스튜디오도 여럿 있었다. 서울에는 예술가를 위한 작업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예술가는 예술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원책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와 같은 기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해외 미술계 인사를 스튜디오에 초청하는 일 외에도 출판과 전시를 위한 재정 지원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줄 것을 약속했다.
일요일 아침, 한국 현대 미술에 대한 정연심 홍익대 교수의 명쾌한 설명과 함께 <다이브 인투 코리안 아트: 서울>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뉴욕 대학교에서 저명한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인 린다 노클린 교수에게 사사한 정연심 교수는 한국 현대 미술 발전의 특수성을 설명하며 단색화와 민중미술이 경쟁적으로 이끈 아방가르드, 즉 일본 구타이 미술 협회에 견줄만한 1950년대 시작된 고도의 실험적 성격의 추상화와 1980년대 한국 전통문화에 미학적 뿌리를 두고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정치적 참여 운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민중미술 간의 구분을 명쾌하게 집어내며 스튜디오 방문을 앞둔 우리를 일깨워 주었다. 단색화나 민중미술 모두 통일된 하나의 미학 또는 철학을 담기보다는 소수의 지극히 개인주의적 예술가들이 대화를 통해 구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경향은 예술가들이 198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세대를 거쳐 소비문화, K팝, K드라마 부흥과 함께 우리가 만날 예술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포스트 인터넷 세대로 옮겨가면서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본적인 정보를 습득한 후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이희준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이희준 작가는 아크릴 물감과 포토 콜라주 기법을 통해 캔버스에 다층의 레이어를 형성해 마치 조각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완성했다. 도시 풍경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순간을 추상화한 작품으로 건축적인 요소가 기억에 남는다. 이희준 작가는 장소의 특성을 형성하는 여러 요소에 접근하기 위해 깊게 파고드는 모습, 즉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작업 과정을 채굴에 비유했다.
이어서 방문한 김지영 작가 역시 사물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포착하는 데에 집중했다. 김지영 작가는 타오르는 촛불을 직접 바라보며 그 모습을 담은 유화 연작 <붉은 시간(Glowing Hour)>을 통해 삶과 죽음의 본질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저항, 기억, 애도를 상징하는 촛불 추상화는 <파랑 연작(Blue Series)> 전시와 많이 닮았다. <파랑 연작(Blue Series)>은 2016년부터 2018년 사이에 발생했던 현대 사회의 비극적 사고와 이를 제때 예측하고 예방하여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거버넌스의 부재와 무능력을 꼬집는 작품이다.
이후 며칠 동안 10여 군데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주목할 만한 여러 작가 중 류성실 작가는 도덕적 파산을 선언한 ‘대왕트래블(Big King Travel)’ CEO의 충격적이고 지나치게 상세한 허구적 서사를 동원 가능한 모든 매체, 즉 그림, 퍼포먼스, 영상, 웹 디자인, 심지어 마케팅에 적용해 온라인 매체에서 본인 작품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며 새로운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민성홍 작가는 동네에서 사람들이 떠나고 난 빈자리에 남은 버려진 가구와 전통 오브제를 수집해 제작한 대형 조각 작품으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한국의 전통 안료를 이용해 섬세한 그림을 그리는 이진주 작가는 평소에 억누르고 담아두었던 쓰라린 기억의 이질적인 면을 자기 인식의 어두운 구석에서 내밀하게 표현하는 방법으로 풀어냈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 미술계 인사들에게 선보여 이들의 인지도를 높이고자 했지만, 예외도 있었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이재이 작가는 <완전한 순간(The Perfect Moment)> 작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대상을 포착하려고 했다. <완전한 순간(The Perfect Moment)>은2채널 영상 작품으로 머스 커닝햄의 전직 무용수가 등장해 젊은 시절 무대 위에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완벽함에 도달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동안 바로 옆 다른 채널에서는 어린 무용수가 그 순간을 위해 묵묵히 리허설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칭 다른 예술가들의 ‘큰언니’라는 홍승혜 작가는 컴퓨터 얼리어답터로 예술 작품에 컴퓨터를 접목해 1997년에 이미 픽셀을 작품의 주요 요소로 삼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오가며 작가 본인이 느꼈던 복잡한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성별이 바뀌는 모습을 담은 픽셀을 쌓아 만든 클립 아트 컨벤션의 애니메이션 자화상 작품이 이목을 끌었다.
세계 각국의 저명한 여러 예술가와 협업하면서도 한 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던 큐레이터로서 여러 일정이 가득했던 한 주를 돌아봤을 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정확히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예술경영지원센터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국제 무대에서 한국 예술가들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과 함께 각기 다른 여러 문화권에 속한 해외 미술계의 인사들이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데에 프로그램의 우선순위를 두었다. 스튜디오 방문 외에 전시회 투어, 오프닝 축하 행사, 근사한 만찬 등을 통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었다. 서울에서 나흘간 알찬 일정을 마친 후 에너지를 가득 충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벳시 존슨은 스미스소니언 허쉬혼 조각 미술관(HirshhornMuseum and Sculpture Garden)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사진 소장품을 담당하고 있다.이전에는 메릴랜드 포토맥의 글랜스톤(Glenstone Museum)에서 재직하며 방문자 경험과 교육 프로그램개발을 이끌었다. 최근 기획한 전시로 JessicaDiamond: Wheel Of Life (2023),A Window Suddenly Opens: ContemporaryPhotography in China(2022) 등이 있다.집필한 저서로는 『TonyLewis: Anthology 2014-2016』(Mousse Publishing, 2022), 『AWindow Suddenly Opens: Contemporary Photography in China』(Yale University Press,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