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3. 11. 13.(월) 17:00~19:00
  • 장소 :
    아트코리아랩 트윈트리타워 7층 회의실
  • 사회 :
    정종은 (웹진 <예술경영> 편집장 /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참석자 :
    김선혁 (레벨나인 대표)
    김태우 (아모레퍼시픽재단 사무국장)
    양숙현 (미디어 아티스트)
    이수령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아트코리아랩 본부장)

정종은 : 이번 호의 주제는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 즉 ‘개방형 혁신’이다. 디지털 플랫폼의 부상 이후로 기업들의 많은 주목을 받은 개념인데, 이것이 과연 우리 예술 생태계에서도 적용이 가능한 것일지 집중적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새로운 흐름에 대한 기대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개방, 공유, 참여라는 가치가 웹 1.0 때부터 나온 것이기에, 오픈 이노베이션이 그렇게 새로운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양숙현 : 예경에서 생각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즉 예술과 오픈 이노베이션을 붙인 이유를 먼저 듣고 싶다. 예술 자체가 오픈이 아니라 이노베이션을 하는 장르이기에 그렇다. 예술에 오픈 이노베이션을 붙였다는 건 예술에서 이노베이션 쪽으로, 그러니까 다른 쪽으로 흐르게끔 하는 개념이라고 이해했었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술이 원래 예전에 자유로운 지점이 있지만 산업적인, 생산적인 측면에서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안 돼 있었으니까 그것을 열겠다는 건지 명확하지 않아서다.

정종은 : 웹진 편집위원회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오늘의 문제의식은 후자에 가깝다고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김태우 아모레퍼시픽재단 사무국장

김태우 : 기업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폐쇄형 혁신에는 기업의 연구개발(R&D)이 있다. 예컨대 아모레퍼시픽 화장품을 개발할 때, 마시기만 해도 보습 효과가 100배 이상 좋아지는 물질을 연구소에서 자체 개발하면 좋다. 그러나 그런 기술을 개발하지 못할 경우, 저희보다 더 뛰어난 기술력이나 아이디어가 외부에 있다면 기업 내부를 개방해 혁신을 이뤄왔다. 이런 혁신이 기업에서 말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인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예술에 접목해서 보자면 아쉽게도 예술 분야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 기업 내부에는 흔치 않다. 예술 분야로 연구개발을 하는 기업이 많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예술 분야에서 말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의미대로 기업에서 시도해보고 싶지만, 쉽지는 않다.

정종은 : 연구개발(R&D)과 대비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프링글스 제조사에서 C&D(Connect&Development)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기업 내부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으니 외부 인력과 커넥트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사이트나 아이디어, 역량을 바탕으로 하고 싶었던 개발을 같이 해나가는 것이 C&D다. C&D를 한다고 해서 연구개발팀을 해체하는 건 아니다. 연구개발과 C&D가 사실은 대체 개념이라기보다는 보완적 개념이라고 본다.

김태우 : 그렇다. 기업 내부의 역량을 집약한 연구개발을 외부에서 극복하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용어도 최근에는 오픈 얼라이언스(Open Alliance) 등으로 변화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협업을 지금은 해낸다. 절대 어울리지 않아 보이던 것이었는데도 협업해보니까, 한 번도 생각지도 못한 패키지 디자인이 나오거나, 내용물이 화장품인 줄 알았는데 다른 재미 요소가 들어가 있다거나, 이런 것들이 가능해지고 있다. 다만, 이런 협업을 예술에 적용하기에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수령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아트코리아랩 본부장

이수령 : 예술계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이란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예술 스타트업 혹은 예술기업과 선도기업 간의 ‘협업 지원’, ‘동반성장 지원’이란 표현으로 풀어쓰기도 한다. 대기업이 (시장성이 있을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초기 투자 비용(리스크) 없이,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더 쉽게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차용할 수 있어서 초기 모델을 개발할 때 기술 스타트업과 ‘오픈 이노베이션’이라 부르는 협업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예술계는 대기업이 혹할 만한 기술력을 가진 예술 스타트업이 많지 않다. 그래서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표현보다는, 동반성장을 위한 협업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등가 교환해서 함께 성장하자는 개념이다. 보통 예술과의 협업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들은 자사의 공간을 문화예술 콘텐츠로 활성화할 필요가 있거나, 기존의 오래된 브랜드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rights, 이하 IP)이 식상해서 창의적인 예술적 아이디어로 새롭게 바꾸고 싶은 경우가 많다.

가령 자체 플랫폼을 통해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기 시작했지만, 브랜딩 혹은 시장 진입 전략이 나오기 전 단계의 예술기업(또는 단체) 입장에서는 자사의 IP를 대기업의 유통 플랫폼에 태우는 것만으로도 브랜딩, 마케팅의 효과가 일부 있다고 본다. 대기업과의 콜라보로 수익을 남기거나 새로운 IP를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브랜딩 차원에서 또는 기존 활성화된 유통 채널을 경험해보고자 하는 측면이 크다. 예경은 대기업의 채널을 통해 자체 브랜딩과 마케팅적 효과를 기대하는 예술기업과 예술적 아이디어가 필요한 대기업을 매칭해서 협업 기회를 창출, 예술기업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정종은 예경 웹진 편집장 겸 사회자

정종은 : 예경이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어떻게 예술가들의 콜라보 진행 쪽으로 넘어왔느냐를 언급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가?

이수령 : 오픈 이노베이션의 개념을 질문했기에 실제로 예경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의 지원 개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등가 교환의 개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하나의 예시로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 스타트업이 기술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가령 브이캣처럼 대기업이 아직 개발하지 않은 서비스 기술력을 갖춘 예술 스타트업들도 존재한다. 이 경우 예술 스타트업이 대기업과 중장기적인 기술 서비스 공급 계약을 맺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라서 주류라고 말하기에는 힘들다.

그래서 예술 분야의 스타트업과 대기업 혹은 선도기업이 서로의 결핍 요소를 보완하고 성장하는 차원에서 일정 기간 협업할 경우, 공공기관이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을 오픈 이노베이션의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다리 역할이 끝나고 대기업에서 자체 인력이나 자원으로 해결할 수 없거나, 프로젝트 개발에 필요한 전문성을 예술기업에서 보유하고 있다면, 예경이 제공한 오픈 이노베이션 지원이 끝난 후에라도 기업끼리 3~4년 중장기 계약을 이어서 맺더라. 사실상 예술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B2B 유통 활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즉 지원사업을 통해 진행한 협업(테스트) 기간에 서로 간의 시너지가 중장기적으로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하면, 양측 간의 계약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정종은 : 오픈 이노베이션이면 뭔가 오픈해야 하는데, 언급한 사례들은 뭔가 오픈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벽이 있어서 쉽게 연결되기 어렵던 기업들을 연결해 주는 게 예경의 ‘오픈 이노베이션’ 관련 사업의 방향성인가?

이수령 : 그렇다. 기업 간의 협업을 위해 양측 간의 니즈를 결합하는 다리 역할이다.

정종은 :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우산 아래 들어오려고 양쪽이 솔직하게 오픈한 것이 있는가? 기존 조직 구조라는 장벽이 있는데, 그 장벽을 무너뜨리고 개방한 것처럼?

이수령 : 협업 대상이 되는 IP, 플랫폼, 채널 등을 회사끼리 오픈하고 물적, 인적 자원을 투입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는 것 자체가 ‘개방형 혁신’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양쪽의 IP와 기술력을 특정 프로젝트 기간에 오픈해서 새로운 제3의 모델을 만들고, 그 협업 모델이 서로 이익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보통 ‘개방형 혁신’이라고 얘기한다.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예경에서 지원하는 내용도 양사의 인적, 물적 자산으로 새로운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양사가 합의하면 이를 예경에서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김태우 : 그 오픈의 예를 올해 저희가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기준으로 설명하겠다. 재단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술과 기술이 접목된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공모를 냈고, 선정된 예술기업들이 아모레퍼시픽의 모티브가 있는 장소들을 콘텐츠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누구나 다 제주를 떠올리니까 “제주에 대해서 우리가 공개할 수 있는 건 다 공개하겠다.”라고 공지했다. 그래서 회사에서 운영 중인 제주의 몇몇 장소들 가운데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렵거나 촬영이 쉽지 않은 공간에 대해서도 작업을 할 수 있게 협조했다.

또, 회사 연구원들이 미생물 등을 연구하는데 현미경으로 촬영한 영상이나 스틸 컷이 상당히 형이상학적이어서 그 원본 소스도 제공했다. 연구원들은 그 이미지가 작품에 활용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우연히 해당 이미지를 본 적 있어서 “그게 마치 작가들이 표현한 작품 같다”라고 흘려 말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작가가 “지금 보고 싶다.”라고 요청해 해당 이미지를 오픈해서 작품에 녹여낼 수 있게 했다.

아까 공간 얘기가 나왔는데, 아모레퍼시픽도 전시를 위한 전용 공간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많이 방문하는 ‘아모레 성수/부산’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원래는 사내 브랜드들이 팝업 스토어 등을 통해 고객들을 만나는 장소였는데, 흔쾌히 전시하는 공간으로 내어줬다. 그런데 다른 지자체에서 해당 전시를 보고 우리 전시가 끝난 뒤에 이어서 하고 싶다고 예술기업 측에 연락해 왔다. 이것이 이수령 본부장님이 얘기했던 것처럼 예술기업과 선도기업이 의미 있게 협업한 일종의 레퍼런스라고 본다.

정종은 : 지금 얘기한 사례가 예경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는 건가?

김태우 : 그렇다.

김선혁 레벨나인 대표

김선혁 : 두 분 얘기를 듣다 보니 오픈 이노베이션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했다. 기업들이 내부 자원으로 할 수 없었던 여러 혁신의 방향들을 외부의 아이디어나 기술로 실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몇몇 예술기업에는 원천 기술이 있기에 IT산업에서 이야기하는 개방형으로 진행되는 ‘기술 기반 혁신’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예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혁신의 범위를 조금 넓힐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한다. 요즘 기업들은 서비스 모델이나 비즈니스 모델의 경험을 혁신적으로 정의하고 구현하는 부분을 저희에게 많이 의뢰한다. 예술계는 반드시 작업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 감각적이고 예민한 편이다. 꼭 첨단 기술이 아니더라도 ‘경험의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예술가들도 대기업이나 다른 선도기업과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혁신이 필요한 대기업과 예술기업이나 창작자 간 인적 자원의 교류도 중요하다.

오픈 이노베이션과 관련해서 저의 절반은 예술가의 영역이지만, 저희 회사는 분명 기업 형태이다. 이렇게 중간에 있다 보면, ‘오픈 이노베이션의 주체가 결국 기업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두 분 얘기를 들으면서 ‘오픈 이노베이션의 수혜자는 누구를 얘기하는 건가, 누구를 전제로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어떻게 예술기업이나 예술가들에게도 윈윈할 수 있는 베네핏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예술 생태계에서는 없었다가 이제 자리를 잡는 단계라고 본다. 지금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콜라보나 기업의 공간, 마케팅에 예술가가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얘기하는데, 사실 그건 다 일회성이다. 그렇다면 지속 가능한 다음 모델은 뭐지? 이에 대해 아직은 해답은 없는 것 같다.

정종은 : 주체가 누구냐, 수혜자가 누구냐, 이 질문을 하기 전에 오픈 이노베이션이 예술계를 떠나서 현대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시는지 궁금하다. 패널들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좋은 것이라고 보는가?

김선혁 : 오픈 이노베이션은 당연히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예술 생태계에 오픈 이노베이션이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얘기가 달라진다.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젝트가 아니라 오픈 이노베이션 생태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몇 차례 관련 프로젝트를 겪으면서 모두가 윈윈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것은 예술계에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만, 뉴미디어 창작에서는 이제 ‘협업’을 기본 전제로 간다. 대부분의 뉴미디어나 아트테크 영역에서 이제 예술가의 역할은 스케치나 내러티브를 조직하는 사람이고, 그 속에서 만들어내는 많은 것은 다 협업의 결과이다. 이제는 협업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고, 프로젝트를 해보면 기업들도 협업을 원한다. 기업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예전처럼 ‘특정 기업을 인수해야 하거나 팀을 고용하거나 연간 디자인 업무를 의뢰한다.’ 이런 형태가 아니고 조금 더 개방적인 형태로 서로의 역량과 능력을 교환할 수는 있다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이다. 단기적인 프로젝트가 되지 않도록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아트코리아랩의 역할이지 않을까 싶다.

정종은 : 그게 주체와 수혜자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해결할 방안인가?

김선혁 : 그렇다. 지금 얼핏 사례를 들었을 때는 ‘기업들의 콜라보 마케팅하고 무엇이 다른지, 10년 전부터 하던 아트 콜라보 프로젝트하고 뭐가 다르지?’라는 생각이 든다. 오픈 이노베이션 생태계의 조건은 무엇인지 논의하면서 넥스트 모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종은 :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를 오픈 이노베이션에 연결하면서 좌담회의 판이 커지는 느낌이 든다.

김태우 : 기업 입장에서는 좀 전에 얘기한 시설도 한때는 지자체별로 업사이클센터를 만들어왔던 과정과 방식이 유사했다. 거기도 연구개발 능력을 갖춘 입주기업들이 상주하면서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활동했다. 이제는 외부에 플라스틱 분해 기술을 가진 소셜벤처나 사회적기업들이 많이 생겼다. 아모레퍼시픽처럼 화장품을 생산, 유통하고 판매하는 기업만 봐도 화장품 내용물에 대한 전문가(연구원)도 있지만, 용기나 포장재에 대한 전문가도 있다. 둘 간에 기술 혁신이 가능하고 시너지가 발생한다.

문제는 예술로 넘어오면 안타깝게도 기업 내부에, 예술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구성원이 극소수라서 협업이 굉장히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전시에서 작가들이 터치 센싱(Touch Sensing) 기술을 식물에 꼭 적용하고 싶다고 요청해온 것이다. 식물의 잎을 사람 손으로 터치했을 때 사람의 체온과 습기를 식물이 인지해서 개인화된 사운드와 영상을 경험하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굉장히 재미있고, 개인화를 선호하는 관람객에게 큰 호응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전문성이 재단이든 기업이든 아무도 없다 보니까 협업을 진행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기술 기반의 혁신을 할 때,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서 작가들과 협업하면 ‘우리에게 터치 센싱에 대해 더 좋은 기술이 있다. 이건 예술과 이렇게 접목하면 좋다.’라고 제안했을 때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거다. 하지만 이른바 선도기업 중에는 예술에 접목할 만한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지금 단계에서는 이런 이상적인 협업이 어렵지 않나 싶다.

양숙현 미디어 아티스트

양숙현 : 김 대표님 경우에도 제작 전반에 참여하기에 산업과 예술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는 예술의 생산자 위치에 있기에 입장이 다른 부분이 있다. 예경에서 말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자체가 기본적으로 미디어아트 내지 아트테크 작가 기반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고 좌담회에 왔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좀 섞여 있는 것 같다.

미디어아트에서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소비되는 방식 혹은 기업의 커미션 개념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 있어서 기업과의 협업 프로젝트 개념으로 확장되는 것이 보편적인 편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해외 사례처럼 일부 대기업이 자사의 혁신적 모습을 보여주려고 예술가와의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규모 있는 프로젝트에 유명한 작가와의 콜라보를 상당히 많이 추진했다. 이런 움직임은 현재까지 지속 중이다. 하지만 이런 협업은 연속성이 떨어지는데, 대기업 입장에서는 이미 ‘콘텐츠를 쇼잉’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기 어려웠던 여러 환경적 요인이 있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2015년 이후로 기억되는데, 아트앤테크에서 논의되던 다학제적 확장이라는 지점이 현재의 시대성과 맞물려, 지금의 예술기업 내지는 다양한 필드와 장르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난 것 같다. 2015년 이후에 더욱 늘어난 지원 시스템도 그 역할을 했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

김 대표님이 얘기한 것처럼 다음 단계의 이노베이션이 필요하다. 저희가 생각하는 건 콜라보는 아니다. IP를 서로 판다고 했는데, IP라는 개념이 상당히 텍스트적이고 인문학적이다. IP를 팔아야 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과연 개인 기업이나 미디어아트 작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도 그런 부분들이 너무 안 돼 있다. IP와 관련해 해결할 문제가 예술계 내부에 너무 많고, 법제화되거나 시스템화된 부분도 많고, 기업과 창작가를 연결하고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이게 강도가 다르다. 강도가 다르기에 어차피 등가교환이 안 된다. 기업과 아이디어만 있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인프라가 너무 달라서다.

다양한 지원사업이 늘면서 생기는 문제 중 하나가 예술가를 디렉터로 만든다는 점이다. 아트앤테크 기반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영역에서 그들에게 전문 업체를 붙여주면 마치 뭔가 돌아갈 것처럼 운영하는 시스템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처음 예술과 기술이 얘기되던 시절에 아티스트는 엔지니어이자 혁신가였다. 그게 다학제 시스템에서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런데 미디어아트를 콘텐츠화해 IP로 팔 수 있다고 보는 지점을 집어넣는 순간, 그 개념이 혼란스러워졌다. 자주 언급되는 해외 미디어아트 콘텐츠 기업도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작업을 안정적 시스템으로 만들어 사업화했기에 지금은 많은 기관에서 대표 사례로 얘기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얘기하는 이노베이션이라고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예술을 산업으로 보는 관점인데, 물론 예술이 기업화나 사업화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작과 개념을 분리하는 생각 자체가 동시대 이노베이션과 너무 먼 개념이다.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예술가가 된다는 건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그 모델을 실제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도의 전문성을 갖는 기술일 경우 당연히 손을 빌려야겠지만, 어느 정도의 로직은 알고 있어야 한다. 과거부터 예술가는 자신이 다루는 재료의 물성을 이해해왔다. 이것이 부재한 상태에서 진행하는 콜라보 내지는 오픈 이노베이션은 위태롭지 않나 싶다.

이수령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아트코리아랩 본부장

이수령 : 저희는 지원기관으로서 판을 만드는, 확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프로젝트에는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여러 우려가 있다고 피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공공기관의 역할은 양쪽의 시너지가 잘 나도록 중심을 잘 잡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지속가능성은 있는지, 장기적 모델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해해서 예시를 들겠다. 오픈 이노베이션 생태계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오픈 이노베이션은 말 그대로 프로젝트 기반의 시도(실험)이다. 가령 대기업이 어떤 제품을 양산하기 전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험해보고 싶다고 가정했을 때, A, B, C, D, E, F라는 모든 프로토타입에 회사가 인적, 물적 자산을 투여해서 올인할 순 없다. 어떤 게 대박이 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협업 파트너들을 계속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트업의 입장은 어때야 하는가. 아이디어는 있고 시제품까지는 만들어봤는데 그다음이 없다. 공장에서 양산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고, 더구나 판매망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장성 테스트도 제대로 하기 어렵다. 예술 스타트업은 대기업과 협업하면 비용과 자원이 부족해서 할 수 없었던 양산 테스트를 대기업의 인프라를 이용해 할 수 있게 된다. 즉 상품화(서비스화)를 결정할 때 필요한 리스크 검증이나 B2C와 B2B 각각의 측면에서 어떻게 효용성 높은 접점을 만들어갈지를 협업이란 기회를 통해 다듬어갈 수 있다. 예술기업이 지원사업 등 공적 자원을 활용해 기업의 MVP 제작, 시장성 검증, 브랜드 홍보 효과 등 기업으로서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성장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각자 뭘 원하는지 명확해야 오픈 이노베이션은 성공한다. 가령 스타트업의 경우 ‘이번 프로젝트 동안에는 딱 이것만 테스트할 거야.’ 대기업에서도 ‘딱 이것만 예술기업과 테스트하고 싶어.’ 이런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는 경우, 초반에 서로 맞춰 나가며 불협화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결국 하나의 목적을 향해 순항할 수 있다. 그런데 막연하게 접근하면, 양사 간 조율이 어렵고, 결과물에 대해서도 서로의 막연했던 기대치 때문에 ‘우리는 가져가는 게 없지 않나. 갑과 을의 관계였다.’라는 식으로 종료하는 경우도 생긴다. 예술 스타트업도 작가 그룹이 아니라 하나의 기업이다. 작은 개인사업자라도 이윤을 창출하려면 대기업과 협업하면서 취할 것을 사전에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다른 예시를 들겠다. 대기업과 예술기업이 함께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DIY 가구를 만들어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게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중장기적인 협업이 되려면, 개발된 디자인 IP를 한쪽이 어느 한쪽에게 넘기는 방식이 아니라 양사가 콜라보한 기획 제품을 양사의 이름을 걸고 나가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판매 수수료나 이익에 대해서는 회사 간 계약의 영역이니 차치하자. 이 경우 예술 스타트업은 대기업과 함께 협업한 디자인력(제품력)을 갖춘 기업으로 인증됨으로써 사실상 다른 대기업과의 콜라보 기회가 열리기도 하고, B2C 측면에서도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기회를 얻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정종은 : 사실은 ‘개방형 혁신 플랫폼’들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누군가 문제를 들고 오면 플랫폼에다 상금을 걸어 해결해주는 것이다. 플랫폼 운영자는 인맥과 홍보력이 있으니까 솔루션을 갖춘 외부 전문가들이 팀을 짜서 들어오는 식으로 돌아간다. 본부장님이 얘기한 수많은 실험을 민간 플랫폼에서도 하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공공기관이 플랫폼(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예를 들면 아모레퍼시픽재단도 아모레퍼시픽문화재단으로 바꾸면 훨씬 많은 예산으로 더 과감하게 운영할 수 있지 않을까? 개방형 혁신을 시스템적으로 운영하려는 플랫폼들은 대부분 온라인 플랫폼으로 돌아가는데, 당연히 신뢰할 만한 공정성을 근간으로 운영된다. 문제를 들고 오는 이들과 솔루션을 제공하는 이들한테도 신뢰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기는 구조다. 그런 플랫폼들이 예술 분야와 관련해서는 아직 두드러진 곳이 없으니까 공공기관이 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 건가?

김태우 : 그런 면도 있고, 사실은 양쪽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지는 않다. 기업은 작가들이나 예술기업에 대한 네트워크가 없다. 공공기관이나 중간 조직에서 연결해주지 않으면 기업 담당자를 만날 방법이 없다는 하소연을 작가들한테 여러 자리에서 굉장히 많이 들었다. 양쪽 다 연결점이 없는 것도 이런 상황을 부채질하지 않았나 싶다.

정종은 : 지금은 필요하다? 많은 대기업이 예술과 연관된 혁신 작업을 한다고 하면?

정종은 : 네, 니즈가 있으면 그렇다.

김선혁 레벨나인 대표

김선혁 : 우리나라는 문화예술 지원 특성상 공공기관에서 주도하는 게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필요하다. 그런데 본부장님 얘기를 듣다 보니까 예술에서 파생된 오픈 이노베이션이라고 한다면 ‘예술 자체를 오픈 이노베이션 한다.’라는 건 조금 동의하기는 어렵다. ‘예술에서 비롯된 오픈 이노베이션을 이끈다.’라고 했을 때 기업과 예술가 혹은 예술기업과의 매칭 말고도 다양한 아이디어가 더 있을 거라고 본다.

제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서강대학교, 서울시립미술관과 예술가 융합 인력양성 과정 사업에 1년 반 동안 참여했다. 논의 주제가 늘 생태계였다. 프로젝트로 끝내지 않고 학생들과 예술기업, 그리고 현대미술 작가들과 같이 이 생태계를 어떻게 이어 나갈지 고민했다. 그런데 런던 서펜타인(Serpentine) 갤러리에서 낸 FAE(Future Art Ecosystem) 보고서를 보면, 이미 이 자리에서 논의한 것과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개방이냐 폐쇄형이냐, 프로젝트냐 시스템이냐에 따라 예술과 기술의 혁신에 대한 범주를 크게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저희가 얘기하는 것은 전체 생태계의 일부인 ‘기업 후원’에 관한 것이다. 콜라보든 IP 교환이든 이건 다 워딩이고, 사실은 후원이다. 기업에서 출범한 재단은 후원이라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꼭 예술가와 기업을 매칭하는 것만이 오픈 이노베이션의 유일한 방법일까를 고민해보게 된다. 팀랩이나 랜덤 인터내셔널 같은 활동 자체가 생태계의 혁신을 만들어가는 아트 컬렉티브나 예술기업을 육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 보고서에서도 해답을 못 내리고 있는 내용인데, ‘21세기의 문화예술 인프라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의제 중 하나였던 오픈소스의 플랫폼 가능성을 생각했다. 물론 창작물에 대해 소스 코드를 오픈하는 문제를 두고, 창작자들은 ‘굳이 왜?’ 이런 목소리가 많다. IT 분야처럼 깃허브에 올려 오픈소스화하는 개념이 아니라서 그렇다. 예술 창작은 하나의 완결된 세계일 경우가 많다. ‘그 완결된 세계의 소스 코드를 다른 쪽에서 왜 굳이 활용해야 하지? 참고는 할 수 있겠지. 그게 거래 가능성은 있나?’라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오픈소스를 유통할 때 반드시 경제적 거래가 아니라 ‘비경제적 교환’이 가능한 플랫폼을 아트코리아랩에서 구축해주면 어떨까 싶다. 예를 들어 창작 대본이나 과정 자료 등을 유통하거나 사업화가 가능한 아이디어가 충분히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문화예술 인프라를 지금 시대에 맞추어 혁신하는 데서 오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효과가 더 클 것이다.

정종은 : ‘예술인 또는 예술단체들이 오픈 이노베이션을 할 수 있나? 그들한테도 필요한가?’ 등을 얘기해 주었다. 다음으로 ‘오픈’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IT 배경의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오픈은 소스 또는 관련 정보에 관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에서도 정보와 공간을 비롯한 자원을 고민했다. 본부장님도 얘기했지만, 양측의 목표도 명확하게 공개해야 한다. 정보와 자원과 목표를 개방하고 공유하고, 혁신을 위해 같이 노력하는데, 문제는 대부분 프로젝트가 단회로 끝난다는 거다. 그런데 이제는 대기업 대신 예술인이나 예술단체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그동안 쌓아온 정보와 자원과 목표를 공유하면서 누군가를 콜업할 수는 없나? 매번 콜업 당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의 오픈 이노베이션도 상당히 중요하다. 아트코리아랩이 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인들이 기업을 콜업할 가능성을 얘기하면 ‘예술인들은 그런 데 관심 없다.’라거나 ‘예술인들은 본인 것을 숨기고,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양숙현 미디어 아티스트

양숙현 : 그렇지는 않다. 시대가 아주 많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예술이 시스템화된 지 얼마 안 됐다. 대부분 2000년대 이후에 사업화되고 진행됐다. 현재 활동하는 다수 작가는 관 주도의 시스템 내에서 활동한다. 우려스러운 부분은 지원사업이 지금의 방식으로 장기화하면, 점점 예술가의 자생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얘기한 것처럼 예술인 내부에서 자체적 고민이 필요하며, 이를 외부에 제안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국가 지원사업을 얘기했는데, 예를 들어 한국은 미디어아트 분야를 많이 지원하고 있다. 여러 가지 확장성도 있고 이를 개발해 콘텐츠로 갈 수도 있고, 그만큼 생산적 요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 수많은 전시에 미디어아트가 포함돼 있다. 미디어아트에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해 컬렉티브 시스템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한국도 예전에 규모 있는 컬렉티브를 구성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해외의 경우, 컬렉티브 혹은 작가들끼리 프로그램을 짜보고 워크숍도 하고, 이런 사례들이 점점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면서 페스티벌로 발전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해외 예술가들도 펀딩을 받지만, 지원사업의 형태가, 펀딩 받는 시스템이 조금 다르다. 꽤 광범위하다. 펀딩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한국과는 시스템이 다르다. 즉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경우, 기술 기반 예술의 규모나 지원금이 유럽권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오히려 유럽 창작자들이 역으로 지원할 정도다. 이제는 전시 규모나 작품 수와 같은 정량적 측면에서는 수준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런데 내부를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차이가 난다. 예술가가 주도하는 부분, 담론을 다루고 선점하는 부분들이 많이 빠져 있다. 일종의 매칭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손처럼 지원사업 방식을 바꾸면 어떨까 싶다. 예술가들에게 ‘너희끼리 모여서 밍글링해 봐.’ 이런 방식도 이노베이션이라고 표현하긴 그렇지만 그냥 자유롭게 두는 거다. 현대차그룹 제로원에서 처음 했던 게 바로 ‘밍글링(Mingling)’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이후 관 주도로 생겨난 플랫폼들은 이런 작가군을 지원하며 분명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마찬가지로 예경에도 기술 기반 작가들과 예술기업들이 많으니까 여기 안에서라도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컨소시엄도 만들고 해서 역으로 확장할 방법도 있지 않나 싶다.

정종은 예경 웹진 편집장 겸 사회자

정종은 : 작가님 얘기로는 예술가들이 협업을 귀찮아하거나 자신의 것을 숨기는 것은 정말 옛날 분들이며,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양숙현 : 옛날 분이라는 말은 좀 적절하지 않고, 그것은 예술가를 바라보는 일부 대중의 시선이다. 예술가라는 직업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요즘의 작가들은 지원사업 체계 내에서 텍스트를 쓰고 작업을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직접 기술을 습득해 작업을 많이 한다는 얘기다. 외부에서 엔지니어를 찾아 작업하는 방식도 있지만, 지금은 유튜브 같은 여러 채널에서 기술 튜토리얼을 스스로 배워 기술을 사용하는 작가들이 많다. 작가들도 그처럼 개방된 환경에서 배웠기에 본인 것을 숨기지는 않는다.

정종은 : 우리가 생각하는 고립적이고 괴팍한 예술가상 같은 것들은 일종의 흘러간 신화라고 보는 건가?

양숙현 : 신화가 없기보다는 신화를 쓰는 방식이 변했다. 다들 자기 작품을 보여주려 하고 꽤 전략적이다. 심지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SNS에 광고도 한다. 작가 스스로 브랜딩을 하고 프로모션하고 있기에 어필할 기회가 왔을 때 더는 숨기지 않는 작가들도 다수 있다.

정종은 : 그러면 왜 개방형 혁신이 예술계에서는 자주 거론되지 않았나?

양숙현 : 그건 소비처, 소비자의 이슈와 관련된다. 본부장님이 얘기한 리바트와의 협업은 판로가 확실히 있다. 판로가 명확한, 이미 시장이 형성되어 있기에 디자이너가 들어가 협업이 가능한 것이었다. 컨템퍼러리 예술, 즉 조각이든 페인팅이든 디자인 기반이든 시장성이 있는데, 그 외에 비물질성을 강화하는 작업이나 설치작업 같은 예술 분야는 지금도 시장성이 꽤 불안정하다. 결국 소비자가 명확해야 개방형 혁신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정종은 : 지금 예술계에서 개방형 혁신이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가 ‘본인들이 좋아서 작업하는 건데, 어디에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많이 접근하니까 그렇다는 건가.

양숙현 : 그보다는 작가들에 따라 갤러리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흐름이 있고, 미술관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분들도 있다. 현대미술이 특히 더 그렇다. 시스템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적으로 그 경계에 와 있다. 다양한 기반이 생길 수 있다. 갤러리를 근간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은 앞서 말한 혁신적 개방이 필요 없다. 소비처가 있어서 이미 잘 팔리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한국은 현대미술, 소위 국제 무대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겠다. 그것과 조금 다른 지점에 와 있는 디지털 기술 기반 작가, 즉 미디어아트나 아트앤테크를 하는 작가들은 사용하는 매체 자체가 오픈되어 있고, 시장 역시 불확실하기도 하고 열려 있기도 하다. 이런 부분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정종은 : 예술가나 예술단체들이 자체적으로 모여서 아모레퍼시픽을 먼저 불러주는 게 좋은가. 아니면 예전처럼 기업 측에서 먼저 예술가들을 부르는 것을 선호하는가.

김태우 : 기업이 원하는 건 정해져 있다. 주제가 명확하다. 가령 기업이나 재단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주제’를 주었다고 가정하면 작가의 해석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는 바뀌지 않는다. 작가가 갑자기 다른 주제로 대중에게 말하고 싶다면 거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주제나 예술 작품의 목적성에 대해서는 기업이 화두를 던지고, 작가들은 어떤 기술이나 방식으로 풀어내겠다,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사실은 예전에 진행했던 오픈 이노베이션 사례를 보면서 조금 이상했던 게 있다. 예컨대 디자인 패키지를 구상해 굿즈를 만든다든가, 리바트 사례처럼 판로가 정해진 시제품 제작에 대해 작가들이 얼마만큼 용인할 수 있는지 솔직히 궁금하다. ‘그런 건 안 할 거다. 작품 활동, 예술 활동만 하고 싶다. 기업 브랜드와 연계해 팔리게 하는 것은 작품 활동의 범위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다.

개인적으로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이런 것들은 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주제를 던지면 작가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이런 기술로 한번 풀어보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 좋은 모델인 것 같다. 재단에서는 지난 50년간 학술 연구를 지원하다 보니까 논문이나 책 등 결과물에 한계가 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논문을 읽겠나 싶다. 그런데 대중들에게는 ‘우리 이렇게 했다.’라고 말하고 싶은 니즈는 있다. 기업에겐 영원한 숙제다.

정종은 : 잠깐 헷갈리는 게 국장님 얘기는 너무 써먹으려고, 상품화하려고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된다?

김태우 :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종은 : 작가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기에 좀 넓은 주제를 주면서 협업해야 한다는 건가.

김태우 : 그래야 아이디어가 나온다. 작가들끼리 자체적으로 여러 형태로 협업하거나 해당 주제 내에서 ‘이걸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한다면 언제든지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 그런데 그런 과정 없이 협의한 주제를 가지고 ‘아모레퍼시픽과 맞을 것 같으니까 합시다.’라고 할 때는 상당히 고민될 것 같다.

양숙현 : 그것은 저도 약간 무례하다고 본다. 제로원이 생기기 전에 2017년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그 당시 몇 가지 불편한 사례를 제시했다. 이를테면 오픈 이노베이션 사례 중에 해외 기업들이 예술가와의 혁신을 시도했는데, 결과적으로 안 됐다. 좋은 의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시간 낭비였다. 기업 입장에서도 결과물은 안 나오고, 작가들도 흥미롭지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후회가 밀려오는 거다. ‘예술가라서’가 아니라, 서로 더 생산성 있게 일을 할 수 있는데 그 방법이 기존의 시스템과 맞지 않았던 거다. 기업은 이노베이션을 하고자 혁신적인 사람을 불렀는데 이노베이션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제로원에게 자유롭게 해달라라고 요청했다. ‘비용을 지불했으니 어떤 명확한 걸 줘.’라는 메시지로 접근하지 말아달라고 조언했다.

정종은 : 그건 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냥 ‘뭐가 안 나와도 돼.’ 이렇게 하면.

양숙현 : 제로원에서 첫해에는 그렇게 해 줬다. ‘뭐가 안 나와도 돼.’라고. 기업 사례라서 공공기관과는 다른 지점이 있다. 하지만 예술가는 뭐든 하는 사람이긴 하다.

정종은 : 흥미로운 얘기다. 예술계에서는 왜 오픈 이노베이션이 별로 화두가 안 됐을까 물으니까, 이미 팔리는 사람은 굳이 할 이유가 없고, 어디에 팔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그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도 힘든데 굳이 이것을 해야 하나 싶은 거다. 그런데 계속 시스템이 중요하고 중장기적 생태계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 부분을 풀어달라.

김선혁 : 예술계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이 안 됐다기보다,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개별 작가들이 개별 세계를 구축하는 데 더 집중할수록 작업의 지속가능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시설이나 장비는 의외로 장벽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픈 이노베이션이란 화두가 과연 작가 개인의 활동으로 가능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든다. 작가 개인의 목소리와 기업을 포함해 그 생태계를 바라보는 여러 목소리를 담아내야 가능할 것 같다. 이런저런 목소리를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답이 나올 것 같다.

오픈 이노베이션에서는 뉴미디어 작품의 기준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결과가 꼭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냐 묻는다면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다른 유사 기관에서도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오픈 이노베이션을 창·제작으로 국한해서는 안 된다. 결국 기술을 활용한 하나의 작품이나 프로젝트를 전시하고 비평하고 끝나는, 창작자-큐레이터-비평이라는 삼각관계는 전통적인 생태계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이 틀에서 벗어나 여러 역할을 지닌 다른 생태계의 참여자들이 들어와야 한다. 그러면 작품이나 작업을 정의하는 기준 자체도 달라진다.

그리고 사무국장님 얘기를 들으면서 굿즈나 최종 제품의 포맷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 대한 각자의 접근 방식과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본다. 유럽연합의 전자도서관 프로젝트로서 유럽의 4,000여 개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들의 정보시스템을 한데 묶어놓은 유로피아나라는 재단이 있다. 이 시스템이 20년 가까이 됐지만, 혁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곳에서 발간한 최근 리포트에서 가장 처음에 언급된 것이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는 ‘리터러시 혹은 마인드세트’를 기르자는 것이다. 그래서 관련 워크숍을 엄청나게 진행한다. 유럽연합에서는 미술관, 박물관에서 쓸 수 있는 오픈소스 코드들을 한데 모으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워크숍을 했던 프로젝트도 있다. 그게 다 개별적인 완성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양한 소스 코드와 매뉴얼들을 수집해서 작업이나 창작의 저변을 넓히는 ‘과정’에 초점을 둔 결과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최종적인 성과나 작품의 개수를 늘리는 데 너무 몰두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지금 대부분 융복합, 다원, 창·제작 지원사업이 다 똑같은 포맷이 되고, 똑같은 페스티벌이 동시에 여러 개 진행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제 출범한 아트코리아랩은 다른 전략적인 지점이 있을 것 같다.

이수령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아트코리아랩 본부장

이수령 : 기업과 작가, 스타트업 입장에서 얘기한 것을 들으면서 오픈 이노베이션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혼재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술인복지재단도 예술가와 기업을 매칭해주는 사업을 많이 한다. 아트코리아랩에서는 오픈 이노베이션 지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할 때, 수익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 비영리 예술단체와 기업은 매칭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들과 다학제적인 협업을 지원하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한다.

예컨대 올해 다학제적인 협업 플랫폼을 잘 구축한 민간 커뮤니티 한 곳을 만났다. 이를테면 랩장(리더)이 흥미로운 특정 주제를 제시하고, 이에 관심이 있는 민간 연구소 직원, 대학원생, 미디어 작가, 기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모집한다. 그러면 정말 다방면의 사람들이 모여서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간 사비를 들여 자발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심지어 결과물의 형태도 무척 다양해서 글(논문)이나 전시, 공연, 음악일 수도 있다. 그런 커뮤니티가 꽤 활성화돼 있는 것을 보고 대한민국의 열정에 놀랐다. 다들 주중에는 개인 일을 하다가 이런 연구 활동들은 주말에 모여서 진행한다.

이런 모델이 아트코리아랩의 네트워킹 모델이 되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간 커뮤니티는 장소 외의 지원은 하고 있지 않지만, 아트코리아랩에서는 프로모션 차원에서라도 소액의 활동비를 지원하면 좀 더 쉽게 모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허브 역할을 하고 싶어서 올해 상기 민간 커뮤니티와 MOU를 맺고 예술과 연관된 다학제적 연구 소모임 4곳을 지원했다. 자유롭게 연구하고 중간 결과물을 나누면서 그것들을 담론화하는 정도를 목표로 올해 시범 운영했다. 이런 연구 소모임들이 아트코리아랩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이고 협업하게 되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내년에는 더 확대해서 운영할 계획이다. 더불어 아트코리아랩의 입주기업들과 예술가들이 좀 더 활발히 교류할 수 있도록 만남의 장을 계획 중이다. 그것은 기업과 기업의 만남을 지원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지원사업과는 달리, 다학제적인 연구 소모임, 커뮤니티, 네트워킹 지원의 측면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그게 좌장님이나 작가님이 얘기하는 예술 분야에서 먼저 시작해서 좀 더 다양한 접근 방식이나 주제들을 생각해보면서 이뤄나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방식이지 않을까 싶다.

정종은 : 그런 것들이 필요할 것 같다. 다만 예전에 학습공동체(COP) 방식의 스터디는 아니어야 할 것 같다. 서비스 모델이나 사업 모델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을 해결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김 대표님이 창작자, 수용자, 비평가라는 오래된 예술계의 구성원 모델 말고,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다른 차원의 참여자들이 있을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부분을 조금 더 얘기해 달라.

김선혁 : 양 작가님도 얘기했지만, 제가 아는 창작가들도 생각이 예전하고 완전히 달라졌다. 예술가들이 영리를 추구하거나 돈을 얘기하면 예술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생각도 고정 관념이고 너무 고리타분하다. 그리고 예술계에서 디지털 기술을 통해 이제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작업의 형태를 보게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게 제품이든 출판이든 온라인게임이든 다양한 사업 모델을 만드는 게 예술적 가치관과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다만, 여기에 엉뚱한 경우가 발생한다. 게임을 만들어놨는데 전통적인 미술 평론가가 이를 비평하고 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미술관 관람객들만 게임 사용자가 되고 있다는 거다. 이처럼 상당히 언밸런스한 사례가 많이 생긴다. 예술 활동이라는 게 혁신과 만난다면 완전히 다른 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아트코리아랩에서 이런 방향성만 보여줘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점점 더 젊은 작가들은 생각들이 많이 열리고 있어서 전통적인 이해관계자 모델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특히 아트코리아랩이 문화재단이나 미술관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런 메시지를 강하게 제시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게임으로 작업을 진행한 창작자의 디지털 에셋이 서펜타인 인스타그램에는 올라온다. 3D 환경에서 창작하는 작가들이 워낙 많아서 이를 위한 마켓플레이스는 무조건 나온다고 본다. 요즘 젊은 창작자들은 여러 프로토타이핑 도구, 즉 피그마나 프레이머를 많이 사용한다. 이에 대한 플러그인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 이들이 기존에 종이에다 스케치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창작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창작 환경의 혁신을 얘기하는 생태계 인프라가 1, 2년 내로 글로벌이든 우리나라에서든 나올 거라고 확신한다. 저희도 최근에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의 프로젝트를 통해 가상공간에서 물리적 작업을 하던 작가들의 에셋이 어떻게 하면 확장될 수 있을지와 관련해 올해 말에 마켓을 하나 열 계획이다.

정종은 : 오픈 이노베이션을 주제로 다뤄서 오픈소스, 이노베이션 얘기부터 나왔는데, 사실상 컴퓨터 기반 작가들 외에는 예술계에서는 오픈소스 등에 고민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양숙현 : 1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요즘 미술 하는 친구들이 다루는 머티리얼이 완전히 바뀌었다. 에셋도 다 구매한다. 사실 에셋은 AI가 나오면 다 해결된다. 플러그인은 따로 필요 없고, 그냥 AI 프롬프트에 입력하면 에셋이 뚝딱 나올 거다. 작가가 AI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경우, 예술 생산자도 소비자도 다 바뀌었다. 그 전제조건에서 이노베이션 개념을 달리 생각해보자. 출발점이 다르다. 요즘 대다수 작가는 기술을 얘기하고 있다. 다원미술이든 무용이든 상당수 작가가 본인 작업에서 기술의 위치를 정의하고 있다. 특히 젊은 작가들은 그런 경향이 짙다. 메타버스나 웹 3.0, 그리고 NFT가 나왔을 때도 이게 되겠냐 싶었지만, 결국 소비자층이 생겨났다. 창작자로서, 예술 주체로서 내 위치를 되짚어보게 됐고, 이노베이션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하게 됐다.

정종은 : 이런 시대에 예술은 어떻게 이노베이션에 접근해야 하는가.

김태우 아모레퍼시픽재단 사무국장

김태우 : 그것이 어려운 것 같다. 얼마 전 ‘몰입형 전시가 예술인가’1)라는 내용을 담은 신문 기사를 봤다. 그런 전시들이 많아지니까 대중은 ‘이것도 새로운 형태의 기술이 적용된 예술이다.’라고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일부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그게 무슨 예술이야! 그냥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주는 콘텐츠를 만드는 거지.’라는 반응이다. 일단 예술가들과 대중이 만나도록 해주는 게 기업의 역할로서 크다고 생각한다. 대중과 괴리될 수 있었던 창작물을 기업과 손잡고 시제품이든 전시물이든 일반인에게 선보일 수 있다. 대중과 소통하는 과정과 결과물이 일관되게 잘 나오면 좋겠다는 게 기업 담당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기업은 그 과정에서 이노베이션을 작가들에게 줄 수 있는 베네핏으로 본다.

정종은 : 마무리할 시간이다. 이제는 숨기는 게 미덕이 아닌 시대가 됐다. 디지털 세상에서 디지털 네이티브들, 즉 Z세대부터 그다음은 알파세대로 이어지며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렌즈를 통해 예술계, 예술인, 예술단체에 하고 싶은 말과 아트코리아랩 측에 전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

김선혁 : 예술 조직에서 일하는 형태와 협업 구조는 반드시 의제로 다룰 만한 얘기라고 본다. 예술가와 예술기업 혹은 예술가와 스타트업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나 예술적 성향이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기업에는 일반 스타트업이나 기업하고는 분명 다른 특성이 있다. 제가 속한 조직도 절반 이상이 미대이거나 예술과 디자인 기반의 전공을 한 사람들이다. 이런 조직이 만들어내는 이노베이션의 원동력이라는 게 분명히 있을 거다. 결국에는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 일해야 혁신이 가능할까?’라는 화두가 요새 제 관심사다. 예술 기반의 조직은 다른 조직과 뭐가 다르지? 이런 조직들이 또 있을까? 기존 컬렉티브나 작가 그룹과 뭐가 다른지? 이런 질문이 혁신을 실현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본다.

그다음 질문과 이어지는데, 아트코리아랩에 입주한 예술기업들의 특징을 잘 포착해서 앞서 말한 가능성을 지닌 기업들이 계속 아트코리아랩에 들어오도록 이끄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것이 다른 나라나 기관에서 진행하는 수많은 지원사업과 차별되는 지점일 것 같다. 예술가나 예술기업들이 제일 꺼리는 인사, 노무, 재무 분야를 잘 컨설팅해주면 좋겠다. 그 허들만 넘으면 예술가 팀이나 예술기업도 실행할 수 있는 영역이 너무 많다.

정종은 : 유럽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이 이루어지는 게 예술가가 주도해서 겉은 비슷해 보이지만 훨씬 더 단단하다는 얘기였던가?

양숙현 : 그렇게 시도했는데 실패한 사례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말이었다. 전혀 관계성이 없는 사람들을 단지 이노베이션이란 이름으로 묶어놓으면 서로 쓰는 언어가 달라서 소통이 안 된다. 결과적으로는 각각 뭔가를 내놓긴 했는데, 서로 채워졌다는 느낌은 안 드는 거다. 돈 문제가 아니라 서로 시간을 낭비했다는 거다.

정종은 : 커뮤니케이터가 없어서 그런가?

양숙현 : 그런 측면도 있지만, 언어의 문제인 것 같다. 과거의 예술가들은 스튜디오에서 본인 작업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많았다면, 지금은 다양한 매체 때문에도 외부 인풋이 많은 시대다. 예전에 예술가는 예술계에서 큐레이터나 기획자, 콜렉터 등 늘 만나는 사람들만 교류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지점의 사람들을 만나는 거다. 만남의 폭이 넓어졌다. 다양한 이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그들만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같은 용어인데 다르게 쓰는 것도 있다. 그들의 용어를 배우고, 그들과 언어를 쓰는 방식이 유사해지면서 대화가 가능해진다. 비로소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로 접어든 거다. 결국 이노베이션은 함께 작업하는 사람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뭘 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알아야 실현된다.

예술가가 할 수 없는 영역을 지원해 주는 건 수혜자로서 너무 반갑다. 이미 자리를 잡은 페스티벌을 포함해 다양한 미디어아트 지원사업에서 소비만 되고 남겨지는 것들이 없어서 안타깝다. 미디어아트처럼 콘텐츠로 확장될 수 있는 예술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많다. 이들이 제작한 프로토타입 형태의 작품이 어디에 팔리든지 완전한 제품화가 되는 게 제일 중요한데, 바로 이 지점에서 버려지는 게 많아서 걱정이다.

경력이 있어도 이노베이션 작품을 계속 보여줘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지원사업은 작업 하나를 계속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꾸준히 내놔야 한다. 메타버스, NFT, 인공지능 등 새로운 주제에 소비되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가 하나의 작품에 꾸준히 매달려서 완벽한 제품을 내놓으면 무조건 팔린다. ‘팔린다’는 표현에 여러 의미가 있는데, 그런 방식의 지원이 제일 필요한 것 같다.

정종은 : 아트코리아랩에는 기술 자문 인력이 있나.

이수령 : 기술 컨설팅 전문업체와 계약을 맺어서 테크니션들이 상주하고 있다. 내부 인력으로도 테크니션을 채용해 외부 테크니션과 소통을 담당한다. 작가들이 아이디어도 많고 새로운 실험을 통한 창·제작 니즈도 강한데, 정작 이를 구현해줄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좋지 않다. 본인들의 작업에 필요한 기술 언어를 직접 배워보고자 하는 작가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올해 <수퍼 테스트베드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며, 기술 교육부터 현장 전문가들과의 1:1 멘토링, 프로토타입 실험/제작까지 지원했다. 내년에는 단계를 나눠서 기술에 숙련된 작가들에게 필요한 네트워크 확장, 유통 지원도 고려 중이다.

김태우 : 좌담회 전까지만 해도 ‘수혜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노베이션이 아니라 후원 수준이더라도 재원을 댔으니 결과물을 온전히 기업이 원하는 방식으로 잘 나오게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했는데, ‘수혜자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 잠시 고민하게 됐다. 예경을 통해서 공모를 해보면 기업에 대해 너무 모르는 상태에서 제안하는 경우가 있다. 파트너로 A 기업을 선정했으면 그 기업이 어떤 과제를 주고 어떤 결과물을 기대하는지는 정도는 미리 알아보고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최근에 숙명여대 학생 4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마음 건강을 주제로 내년에 전시하고 싶어서 ‘어떤 기술을 접목하면 좋나?’라고 물어봤다. 예상한 대로 대중이 특별히 선호하는 기술이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기술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활용할지에 주목하게 됐다. 예를 들면 뇌파를 측정해서 심리를 진단하는 기술이 많았다. 뇌파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AI가 자화상을 그려준다든가 심리 상태를 예술적 결과물로 보여주면 관람객이 즐거워하겠다고 생각했다. 예술은 어렵지 않고, 기술을 활용했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거다. 기업 입장에서는 대중과 예술가들이 호흡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없지만, 인프라를 지원해줄 방법은 있다. 끝으로 아직은 초기 단계여서 이노베이션에 대한 지속가능성까지 논의하기는 어려운 점도 오늘 느꼈다. 다만 다양한 기업들과 예술가들이 많이 시도해보면 좋은 사례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수령 : 현재 아트코리아랩에는 20개 예술기업과 4개 팀이 입주해 있다. 특히 4개 팀은 프로젝트 기반으로 모인 서너 명의 예술가들이 사업화를 시도하면서 6개월 단기로 입주했다. 아울러 20개 예술기업을 들여다보면, 창·제작 기반 기업이 70% 이상이다. 아티스트 그룹에서 출발했거나 기업 구성원 대부분이 예술 분야 출신이거나 양산 방식이 창·제작이 주를 이룬다. 이런 기업들을 각각 모델링하다 보면 다들 특성이 너무 달라서 매출액, 영업이익률, 투자 등의 관점으로만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각 입주기업에 현재 필요한 것, 부족한 요소들을 예술기업 특성에 맞게 ‘맞춤형 인큐베이팅’을 제공하는 게 아트코리아랩 첫 1기 입주 지원의 목표다. 다들 예술계에서 사업화나 수익화가 힘들고 지속가능한 기업이 나오기 어렵다고 하는데, 3년간 입주기업들을 잘 보육해서 성공 사례를 만들고, 그 BP 사례를 현장과 공유하고 싶다. 아트코리아랩이 사업화에 관심이 많은 예술가에게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인큐베이터이자 허브가 됐으면 한다.

물론 그 기저에는 도전과 실험에 대한 강조가 있다. 예술가들이 모두 사업을 꿈꾸는 건 아닐 것이다. 본인의 작업에 충실한 작가나 단체들이 기술 등 여러 방식을 통해 도전과 실험을 시도하고자 할 때 다양한 주체들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거다. 아트코리아랩이 그런 이들이 모이는 네트워크의 허브가 되는 게 또 하나의 바람이다.

  • 필자 소개

    조대성 객원기자는 문서 작성과 인터넷 검색만 가능했던 인문학 전공자이었지만, IT와 정보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내디뎠다. IT산업 동향 분석 전문지 <월간 시사컴퓨터>를 거쳐 온라인 IT 미디어 지디넷(ZDNet)코리아에서는 정보통신부 출입 기자로서 통신정책과 관련 산업 동향을 분석하는 기사를 썼다. 언론계를 떠나 문화예술 분야 트렌드를 공부하고, 석박사 학위논문을 교정·교열하면서 지적 호기심을 벌충하고 있으며, 인공지능 챗GPT를 벗 삼아 수다 떠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살고 있다.
    (iaskew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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