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노 아우리티의 <백과사전식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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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쁘게 달려온 2013년의 중간점을 찍을 무렵 이탈리아 베니스에서는 비엔날레가 대단원의 막을 올렸다.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는 세계 미술계가 자국 미술의 우수성을 알리는 각축전이자, 2년에 한 번 작은 섬 베니스를 예술계의 중심에 서게 하는 대형 현대미술 행사이다.
비엔날레는 최근 20여 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 미술 제도로 자리 잡으며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확장되고 있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해체되고 있는 글로벌한 상황 아래, 현재 150여 개의 비엔날레가 산재해 있지만 여전히 최고(最古)로서 베니스 비엔날레의 영향력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향후 2년을 내다보는 현대미술의 주요 담론을 생산하고 지배하는 장소이자 미술시장과 자본, 전문가 그룹들이 교차하는 ‘플랫폼’인 비엔날레는, 어떤 큐레이터가 총감독을 맡았는지가 미술계의 화제가 되며, 행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전시의 성공을 점치기도 한다.
상상의 박물관 ‘백과사전식 궁전’을 보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크게 두 가지 얼개로 이루어져 있다. 총감독이 구성하는 본 전시와 나라별로 운영하는 국가관 전시가 그것, 전시 장소는 19세기 조선소 자리인 아르세날레와 자르디니 공원을 이용한다. 지난 6월 1일 개막한 제55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오랜만에 이탈리아 출신의 큐레이터인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총감독을 맡았다. 현재 뉴욕 뉴뮤지움(New Museum)의 부디렉터이기도 한 그는 2010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하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큐레이터다. 지난해 광주를 방문한 지오니가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다루어질 주제는 많은 부분 2010년 광주비엔날레와 연관되어 있고, 또 그것에서 확장될 것”이라 시사했듯,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2010년 광주비엔날레와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2010년 당시 지오니는 고은 시인의 연작시에서 빌려온 ‘만인보’라는 주제로 각양각색의 삶이 반영된 이미지를 총망라하며 완성도 높은 전시 구현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가 내세운 주제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한자리에 모은 상상 속 박물관인 ‘백과사전식 궁전(The Encyclopedic Palace)’이다. 지오니는 이탈리아계 미국 작가 마리노 아우리티(Marino Auriti)가 디자인한 상상한 박물관인 ‘백과사전식 궁전’을 차용했다. 관람객을 맞는 첫 작품이 그 전시의 성격과 주제를 대표하는 만큼,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아우리티의 건축적 모델이 바로 아르세날레의 첫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136층짜리 원뿔형 모형은 아우리티가 1955년 미국 특허청에 등록했던 작품인데, 지오니는 이번 전시를 위해 미국 민속박물관(American Folk Art Museum)에 소장되어 있던 이 작품을 대여해왔다.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작가들을 포함하여 건축가, 수집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작품과 특정 오브제들이 출품된 ‘만인보’의 경우처럼, ‘백과사전식 궁전’에서도 예술과 비예술, 세계적 대가와 아마추어 작가들을 뒤섞었다. 본전시에 출품된 38개국 작가 150여 명의 절반은 생존해 있지 않으며 전문가들에게도 이름이 생소한 무명의 작가가 많았다. 피슐리 앤 바이스(Fischli and Weiss)의 조각, 칸 수안(Kan Xuan)과 디터 로스(Dieter Roth)가 작업한 수백 대의 비디오로 이루어진 영상작업과 같이 이번 전시에서도 이미지가 모이고 축적된 작품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었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에서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작품 중 하나인 중국의 ‘렌트 컬렉션’의 설치 광경과 닮아있는 파웰 알타머(Pawel Althamer)의 군상들은 다시 한 번 ‘만인보’와 이번 전시의 연결점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스타 작가인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 기획하고 그녀의 이미지 컬렉션으로 구성된 ‘전시 속 전시’도 인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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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구스타브 융의 < 레드북 >
▲▲ 마리아 라스니히의 < Mother Nature >
▲▲▲ 김수자의 <호흡:보따리>
▲ 아이웨이웨이의 < S.A.C.R.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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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르디니 공원 중앙 전시관(Central Pavilion)에서는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1913년부터 16년간 집필한 원고와 손수 그린 삽화를 엮은 <레드북> 가운데 40여 페이지를 최초로 선보이며 주로 회화나 사진작품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마리아 라스니히의 신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기괴한 자화상 시리즈, 중국 작가 구오 펑이의 작품들, 독일 칼 쉥커와 스위스 주술사 엠마 쿤즈의 드로잉 등이 대표적. 전시를 다양한 지식과 다채로운 정보를 모은 거대한 박물관으로 구성하고자 했던 지오니의 의도가 두드러지는 부분이었다.
새로운 역사를 기록한 2013 베니스 비엔날레
‘물의 도시‘ 베니스라는 닉네임에 부응하듯 산마르코 광장은 연일 범람하여 신발을 벗고 물위를 걸어 다니는 일이 일쑤였고, 프리뷰 내내 이상저온 현상과 비를 뿌리는 궂은 날로 연일 베니스가 물의 도시임을 오감으로 느끼게 했다. 그 와중에도 관객들은 입장이 시작되기도 전 아르세날레와 자르디니 앞에 모여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으며, 문이 열리자마자 마치 100미터 달리기라도 하듯 빗속을 달려가 국가관 앞에 다시 줄을 서는 장관을 연출했다. 관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국가관은 프랑스관으로, 사흘의 프리뷰 기간내내 연일 두 시간이 넘는 가장 긴 줄로 기록을 세웠으며 한국관과 미국관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국가관은 모두 88개국으로 앙골라, 바하마, 바티칸공국 등 10개국은 올해 처음 국가관을 오픈했다. 국가관 전시는 문화패권주의를 조장하며 국가 간 정치 게임의 장(場)이자 시대착오적 형태라는 비판도 있지만, 국가관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내셔널리즘이 베니스 비엔날레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번 국가관 전시의 특징 중 하나는 국가주의를 앞세웠던 몇몇 나라들이 시도한 변화다. 예술로 경쟁하는 ‘미술 올림픽’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려는 듯, 118년 베니스 비엔날레 역사상 처음으로 프랑스관과 독일관이 건물을 서로 바꾸어 전시를 열었다. 프랑스관의 커미셔너인 퐁피두센터의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틴 마셀(Christine Macel)과 독일관 커미셔너인 MMK미술관 디렉터 수잔 겐샤이머(Susanne Gaensheimer)는 양국 우호조약 체결 50주년을 기념해 서로 국가관을 바꾸어 전시를 연 것이었다. 독일관은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Ai Weiwei)를 비롯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작가 등을 포함했고, 프랑스관은 대표 작가로 알바니아 출신의 안리 살라(Anri Sala)를 내세웠다. 미국관도 중국계 여성 작가 사라 제(Sarah Sze)를 선두에 세웠으며, 러시아는 커미셔너로 자국 큐레이터가 아닌 독일의 우도 키틀만(Udo Kittelmann)을 선임했다.
한편, 한국관의 김수자 작가는 실린더 형태의 유리 벽으로 이루어져 작품 설치에 어려움이 있는 한국관 건물을 능동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관 전체를 하나의 보따리로 생각한 작가는 자연과 실내 공간이 나뉘는 경계 지점을 반투명 필름으로 싸고 바닥은 거울로 뒤덮어 공간 자체가 작품인 작업을 선보였다. 또한 전시장 안 관객들의 몸짓이 작품을 완성시키도록 하여 흥미를 자아냈다. 자신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애쓰는 여타 전시관과는 달리 과감히 비어 있는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빛과 사람의 숨소리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 한국관은 차별화에 성공한 듯 여겨진다.
실현 불가능한 욕망에 다가선 시각, 시도, 의지
올해 11월 24일까지 약 5개월 동안 열리는 비엔날레의 공식 오픈 전 사흘의 프리뷰 기간에만 다녀간 세계 미술 전문가, 저널리스트 등은 4만 5천여 명. 6만 5천 명의 베니스 인구를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다. 때문에 비엔날레 프리뷰 기간에 맞춰 수많은 병행 전시가 동시에 오픈하는데, 그중 독일관의 대표 작가이기도 한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가 자신의 감금 생활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설치작 전이 올해 비엔날레의 이슈였다. 성 안토닌 성당에 설치된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은 그가 불법감금당한 2011년, 81일 동안 24시간 공안이 지켜보는 현장을 여섯 개의 컨테이너 작품 안에 재현했고, 관람객이 작은 창을 통해 컨테이너에 연출된 상황들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전시 오픈에는 아직도 중국 밖으로 여행할 수 없는 아이웨이웨이를 대신해 그의 어머니가 참석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
세계 미술인들 사이에서 ‘2013년의 꼭 봐야 할 베니스 전시’로 손꼽히는 기획전은 프라다재단이 주최한《When Attitudes Become Form: Bern 1969/Venice 2013》이었다.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 2005년 작고한 큐레이터 헤럴드 제만(Harald Szeemann)이 1969년 스위스 베른에서 했던 전설적인 전시《태도가 형식이 될 때》를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와 작가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가 재현한 전시로 4시간여 줄을 서야 입장이 가능할 만큼 장사진을 이루었다. “실험적인 현대미술 전시 기획의 분수령”으로 평가받는 이 전시는 오브제 중심의 전시 기획에서 탈피하여 작업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작가들을 대거 참여시키면서 기존의 갤러리와 미술관 전시의 정형화된 틀을 붕괴시켰다. 작품이 완성되기 전 개념과 과정, 그리고 미완성의 오브제와 재료를 전시하여 작가의 사고와 태도까지 예술에 포함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백과사전식 궁전’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비엔날레라는 미술 문화는 오늘날 서구권과 비서구권, 중심과 주변 할 것 없이 지구촌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비엔날레 전시는 예술감독의 주제와 관점에 따라 출품작의 내용이나 수준 등의 다양한 편차를 드러내며, 모든 출품작들은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해체된다. 다양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비엔날레는 그런 만큼 복합성과 모순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로 가득 차 있는 현대미술 제도이기도 하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은 대형 국제비엔날레에서 전시 기획자들과 참여 작가들은 동시대의 새로운 미술 경향을 주도하는 문화 생산자들로서 운명공동체이다. 이번 마시밀리아노 지오니의 비엔날레는 모든 장르를 아우르며 마치 미술사를 새로 쓰려는 듯한 거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전시였다. 기존 비엔날레의 유사성에서 탈피한 비엔날레 전시 형태로서, 시장 중심주의적 태도나 모호한 주제를 내세우기보다 세심한 리서치를 통해 버려지고 잊힌 이미지들을 다시 불러내어 새로운 시각예술의 형태를 제시하고자 했다. 아우리티의 이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지오니의 ‘백과사전식 궁전’은 근 100년 동안의 인간의 꿈과 비전을 교차하며 보여줌으로써 이 실현 불가능한 욕망에 다가가고자 했던 하나의 시도로서 미술사에 기록될 것이다.
사진제공_안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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