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가능한 장소에서 끊임없이 공연을 기획하는 것은 실험음악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다. 게다가 작은 공연장에서는 큰 공연장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소리에 대한 독특한 경험이 가능한데, 관객들은 음악가와 함께 자신의 귀에만 의존하는 보다 적극적인 청취행위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닻올림 공연 닻올림 공연

닻올림 공연

지난 3월 11일은 지하철 6호선 상수역 근처에 위치한 오피스텔 건물 7층에 있는, 평범하지 않은 공연장 닻올림에서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공연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후 7시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조금 늦게 도착할지도 모르는 관객들을 배려하고, 뒤늦게 들어오는 관객들 때문에 음악가들의 연주와 다른 관객들의 감상이 방해받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공연의 시작은 15분가량 늦춰졌다. 이날 공연은 독일에서 온 올라프 호헤르츠(Olaf Hochherz)와 한국의 즉흥음악가인 류한길의 협연이 1부 순서로, 그리고 일본에서 온 세계적인 실험음악가 오토모 요시히데(Otomo Yoshihide)와 한국의 즉흥음악가인 최준용, 그리고 그 자신이 즉흥음악가인 동시에 이 공간의 운영자이기도 한 진상태의 3인조 협연이 2부 순서로 예정되어 있었다.

즉흥음악이란 특정 음악가나 장르의 음악적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언어와 자유의 한계에 관한 실험이다. 그래서 즉흥음악의 세계에서는 대가와 아마추어가 대등하게 협연할 수 있다. ‘닻올림’은 바로 그러한 실험을 위한 공간이다.

작음의 이유

10평 남짓의 오피스텔 사무실 공간은 이날 연주하기로 되어있는 5명의 음악가와 그들의 악기(혹은 장비), 그리고 20명이 넘는 관객으로 인해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산소부족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포화상태에 가까웠다. 사실 ‘하우스 콘서트’라는 발상 자체는 이제 그렇게 낯설지 않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음악에 어울리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소음을 주로 만들어내는 실험음악 공연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소음문제는 락음악 공연만큼이나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다행히 닻올림이 위치한 건물이 방음이 잘되는지, 아니면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인지는 몰라도, 2008년 2월에 처음 문을 연 이래로 지금까지 30여 회의 공개연주회와 수차례의 비공개 녹음 세션 동안 이웃으로부터 항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닻올림이라는 공연장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20명 남짓의 관객이 입장하면 포화상태에 이르는 작은 규모일 것이다. 닻올림의 작은 규모는 단지 이러한 음악이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연히 이러한 음악의 관객은 많지 않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러한 작은 규모의 공간에서의 공연만이 지닌 독특함이 있다. 2000년대 초반 실험음악과 즉흥음악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던 일본 도쿄의 오프사이트(Off Site)는 가정집 1층에 꾸려진 갤러리이자 공연장이었고, 닻올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또 다른 도쿄의 소규모 사무실이자 공연장인 그리드605(Grid605)는 이날 닻올림에서 연주하기도 했던 오토모 요시히데의 개인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였다. 최근 몇 년간의 유럽 연주여행 경험에 비추어보면 소규모 공연장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수많은 실험음악가들이 거쳐 간 이탈리아 밀라노의 리프트(The Lift)는 10명도 입장하기 힘들어 보이는 작은 스튜디오를 공연장으로 쓰고 있는 경우이며, 1938년에 창립하여 스트라빈스키와 케이지를 비롯하여 다수의 음악가들을 초청했던 노르웨이 오슬로의 뉴 뮤직(Ny Musikk)의 사무실은 점심시간에 실험음악 공연을 해오고 있다. 여러 젊은 실험음악가들과 즉흥음악가들은 자신이 사는 집이나 레코드 가게의 창고, 식당의 지하실, 공동생활을 하는 주택의 현관이나 거실과 같은 수많은 소규모 공간에서 꾸준히 즉흥음악 공연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 닻올림의 경우 이 공간은 운영자 진상태의 실제 사무실이기도 하다.

이질적 세계가 만나는 공간

물론 일부러 작은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공간의 규모 자체가 그 공간에서 연주될 음악보다 우선해서 고려되지는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해야겠다. 하지만 작은 공간에는 큰 규모의 공연장이나 갤러리 등과는 다른 그 고유의 필요와 미학이 존재한다. 작은 공간의 규모는 당연히 일차적으로는 다수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예술 활동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 지역에서 지속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게다가 동료 음악가들과 같이 이러한 음악을 위한 공연을 기획해온 경험 상 다른 누군가가 나나 우리를 대신하여 공연을 기획해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지속적인 공연이 가능한 장소에서 끊임없이 공연을 기획하는 것은 실험음악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다. 게다가 작은 공연장에서는 큰 공연장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소리에 대한 독특한 경험이 가능한데, 작은 규모의 제약은 음악가와 관객이 동등한 입장에서 소리를 훨씬 더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청취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공연장이나 거리, 카페 등에 설치된 앰프와 스피커와 같은 소리의 재현장치에 의존하지 않고서 관객들은 음악가와 함께 자신의 귀에만 의존하는 보다 적극적인 청취행위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이와 같은 공연장 규모의 차이가 가져오는 분위기와 감각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닻올림의 손님은 이스라엘 출신의 지휘자이자 즉흥음악가인 일란 볼코프(Ilan Volkov)의 경우였을 것이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젊은 지휘자인 그는 존 케이지를 비롯한 실험음악과 즉흥음악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BBC 스코틀랜드 오케스트라와 즉흥음악 1세대의 선구적 그룹인 영국의 AMM의 협연을 기획했을 정도로 고전음악과 실험음악이라는 두 세계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작년 10월에 그는 작곡가 진은숙의 초청으로 서울시향을 지휘하기 위해 내한했었는데, 마침 그때 연락이 되어 그의 즉흥음악 연주회를 닻올림에서 기획할 수 있었다. 바로 전날 밤 예술의전당에서 서울시향을 지휘했던 그는 다음날에는 상수동의 오피스텔에서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알 수 없는 소음을 내는 즉흥연주를 했다. 아마도 이 두 공연을 모두 본 사람이라면 규모의 차이에서 오는 음악적 경험의 차이가 무엇인지 실감했을 것이다. 사실 현대의 즉흥음악의 묘미란 바로 이러한 서로 다른 세계의 만남의 가능성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닻올림과 같은 즉흥음악 공연장이 아니라면 과연 어디에서 클래식 음악가와 실험음악가가 대등하게 자발적으로 협연과 교류를 할 수 있겠는가?


닻올림 입구 닻올림 현관
닻올림 입구 닻올림 현관

비음악적 도구와 행위가 만드는 음악

사실 즉흥‘음악’이라고 설명하면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혹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반영하듯 노트북이나 태블릿 컴퓨터 등을 사용하여 음악을 연주하는 그럴듯한 전자음악가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닻올림에서 연주되는 음악의 풍경은 그러한 상상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이날 공연을 예로 든다면 가장 음악적인 도구는 잠시 진상태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자신의 어쿠스틱 기타(그런데 그는 이 기타를 그 위에 다른 물건을 올려놓고 진동을 일으키는 용도로만 사용했다)나 오토모 요시히데가 사용한 DJ 턴테이블(또한 ‘그런데’ 연주 내내 그의 턴테이블 위에는 레코드판이 놓여있지 않았다)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류한길은 노트북 컴퓨터를 사용했지만 그의 컴퓨터는 오디오 카드에 연결된 작은 전기모터를 작동시켜서 여러 주기의 진동만을 일으킬 뿐이었다.


닻올림 공연 닻올림 운영자이자 음악가인 진상태
닻올림 공연 닻올림 운영자이자 음악가인 진상태

결국에는 소리가 작든 크든 간에 소음이나 잡음, 혹은 단순히 그 의미를 알기 힘든 미세한 떨림을 분주하게, 혹은 간헐적으로 만들어내는 이 물건들은 그것을 연주하는 음악가 개개인뿐만 아니라 협연을 하는 앙상블에게 있어서는 음악의 언어와 음악가의 자유의 한계를 실험하는 도구들이다. 뚜껑을 열어젖힌 최준용의 VCR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음악적일 수 있을까? LP를 재생하지 않고 몸체의 금속 표면 위를 달리는 오토모 요시히데의 턴테이블 바늘이 연주하는 소리는 어떻게 음악적일 수 있는가? 무척 거창하게 들릴 수 있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은 실은 매우 사소하고 부조리하거나 심지어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하는,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소음과 소리를 만들어내는 연주 행위를 통해 던져지고 있었다. 공연장에서의 소리는 재현이 안 되지만, 이러한 비음악적 도구들과 음악가의 행위가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풍경은 1회 공연부터 꾸준히 녹화하여 업로드하고 있는 닻올림의 유튜브 채널바로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30회 공연을 앞두고 있는 닻올림의 운영자 진상태는 작년부터 공연장을 유료로 전환하여 받은 입장료를 적립한 돈과 기부금 등을 모아서 올해 10월에는 ‘닻올림픽’이라는 제목의 즉흥음악 축제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음악축제의 출연 음악가와 세부 일정, 그리고 앞으로의 공연 일정 등이 꾸준히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홍철기 필자소개
홍철기는 실험음악가이며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개최된 여러 실험음악 및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등에서 연주한 바 있으며, 국내외 다수의 실험·즉흥음악가들과 협연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실험음악과 정치철학에 관한 글쓰기와 번역을 해오고 있다.
hongchilki@gmail.com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