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약 100일 동안, 부산의 대표적 청년문화공간이라 할 수 있는 부산대 앞 일원이 오랜만에 시끌벅적했다. 2000년대 들어 점점 활기를 잃고 있는 부산의 청년문화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마련될 수 있도록 기획된 ‘회춘프로젝트’(부산문화재단 공공예술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100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다양하고 참신한 문화기획들이 부산대 앞 여기저기에서 펼쳐졌는데,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큰 관심을 받게 됐다. 바로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단체가 ‘재미난복수’다.
|
▲▲그래피티 전시와 파티
▲《방생프로젝트》
|
부산 거리를 예술로 점거하다
부산대 앞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민중문화의 열기 속에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왕성하게 청년문화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또 90년대 초중반, 다양한 독립문화와 비주류문화가 활발하게 혼재하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많은 인디밴드, 미술작가 등 청년문화인들이 당시 뜨겁게 달아오른 독립문화 담론의 중심지였던 홍대앞으로 떠나면서 역설적으로 부산의 청년문화와 부산대 앞 공간은 급속히 활기를 잃어갔다. 재미난복수는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단체다.
재미난복수는 독특한 역사를 가진 문화기획집단이다. ‘지루한 세상을 향한 유일한 복수는 재미있게 사는 것’이라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식스티나인)의 한 구절에 착안해 이름 지어진 이 단체는 지난 10년 간 부산 지역은 물론이고 일본, 홍콩, 중국 등 동북아시아까지 포괄하며 그야말로 쉬지 않고 다양한 문화기획들을 해왔고, 이제는 독립문화 영역에서 전국 단위 인지도를 갖는 지역의 대표적 문화기획단체로 성장했다. 부산인디락페스티벌과 도로 한복판에서 제대로 쉬어보자는 취지의 ‘프로젝트 휴(休)’를 기획하기도 했다. 완월동 집창촌 여성들을 위해 ‘언니야 놀자’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는 무서운 아저씨(?)들에게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미술, 무용, 음악 등 기존 장르예술은 물론이고 비보이, 그래피티 아트 등 다양한 거리예술을 지역사회에 적극 소개하기도 했다. 세미나나 포럼 등 담론의 생산자 역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강도 높은 기획을 하기에 이들이 가진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공간문제가 절박했는데 재미난복수가 만들어진 2003년 봄 이후 6년 동안 이들은 부산대 문창회관의 한 사무실을 불법 점거해 사용하고 있었다. 눈치가 보였고, 공간 안에서 마음대로 무언가를 해보기도 어려워서 주로 야외행사들을 기획했다. 그러다 2010년 봄, 평소 재미난복수의 의지와 가치를 소중히 여긴 지역의 여러 동료 및 선배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그들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그곳이 지금 부산 청년문화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독립문화공간 아지트(AGIT)다.
|
|
누구와도 소통, 무엇과도 연대
아지트는 부산대 후문 쪽에 있다. 어린이집이었던 공간을 지역의 여러 예술가들이 함께 개조해 문을 열었다. 2층 건물과 작은 어린이용 야외 수영장, 그리고 파티하기에 딱 좋은 크기인 마당이 있는 아지트는 만들어질 당시부터 지역의 여러 예술가들이 함께 한 탓에 지금도 외부 문화단체 및 아티스트들이 자유롭게 다녀간다. 누구에게라도 열려있으며 아지트와 관계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공간이다.
1층에는 사무실과 앨범 녹음이 가능한 스튜디오, 그리고 레지던시 작가들이나 다른 지역 손님들이 자고 갈 수 있는 두 개의 방이 갖춰져 있다. 지하에는 밴드 연습실도 있다. 2층의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전시와 세미나, 워크숍이 가능한 공간과 함께 약 5~6명의 레지던시 작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해외 및 다른 도시에서 온 레지던시 작가들은 작업 틈틈이 아지트의 다른 문화기획에도 참여하며 부산 지역 청년문화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도 갖는다. 특히 앞마당에서 자주 펼쳐지는 아담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파티 때는 처음 보는 작가들과 청년들이 그야말로 편안하게 먹고 마시며 어울린다. 이런 인적 교류 및 네트워크는 아지트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미술작가 출신 류성효 감독을 중심으로 현재 대표로서 단체를 이끌고 있는 김건우, 유명한 그래피티 작가인 구헌주, 팝핀 댄서이자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인 이정민 등이 이 공간을 주로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이들은 소통과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이와 관련된 프로젝트들을 다수 기획하고 있다. 우선 자신들부터 대표 등 일반적인 직함을 갖지 않고 자유롭고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일하고 있다. 외부로는 국제행사, 사회 참여적 행사들을 많이 기획 중이다. 강정마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고리원자력발전소 등 다양한 지역 및 전국의 사회적 현안들에도 적극 개입하고 있다. 비단 문화계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단체와 연대하고 네트워크하며 문화예술의 경계를 확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부터 재미난복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작년 ‘회춘프로젝트’의 총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아지트의 류성효 예술감독은 재미난복수와 아지트의 지난 9년간의 활동과 경험, 그리고 이야기들을 묶어 작년 여름, 『지루한 세상을 향한 재미난 복수』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들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여러 사진들과 함께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찬찬히 읽다보면 흥분되고 몸이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지역’과 ‘청년문화’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차분하게 생각해볼 점도 많아지는 기록들이다. 재미난복수가 만들어지고 좌충우돌하던 시간들, 갖가지 사소한 에피소드들, 실패와 성공의 솔직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9년이 지나 여전히 상황은 열악하지만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의 프로젝트들을 기획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그저 놀랍고 존경스러울 뿐이다.
|
아지트 전경
|
|
|
힙합 워크숍 |
아지트의 일상 |
|
|
우직하지만 날카롭게
아지트를 운영하는 재미난복수는 비영리단체다. 때문에 이들에게 뾰족한 수입원은 없다. 그래서 공간운영도 늘 빠듯하고 특히 내년에는 공간계약이 만료돼 아지트를 계속 운영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아지트는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부산 청년문화의 핵심공간이자 거점이 되었다. 종종 사람들은 아지트에 갈 때마다,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진짜 삶’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고들 한다. 잔뜩 주눅 든 오늘날의 청춘에게, 또 서울이 아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들러리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온통 추상적인 담론만 난무하며 언젠가부터 학계보다 더 아카데믹해지고 있는 문화판에, 아지트는 언제나 싱싱하게 날 선 자극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숫자로 표시되고 서열화 되는 이 숨 막히고 멋대가리 없는, 그리하여 마침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적어도 그 질서에 양순하게 따르며 사는 건 ‘진짜 삶’이 아니라고 외치는 이들. 그리고 이들이 마침내 ‘지루한 세상을 향한 재미난 복수’를 꿈꾸며 만들어낸 공간. 그래서 아지트가 뿜어내는 느낌은 독특하고 남다르다. 모두가 서울이나 외국으로 떠나야만 성공할 거라 생각하는 부산 문화판에서 그들은 참 우직하게, 한편으론 장난스럽게 지역에 남아 ‘진짜 문화’란 게 어떤 건지, 나아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문화예술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을 건지를 고민해왔다. 이름을 얻거나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대신 풋풋하고 거침없이 사고치고 서로 싸우고 웃고 떠드는 그들의 고민과 이야기가 앞으로도 뜨겁게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응원한다.
|
|
|
|
필자소개
장현정은 98년 홍대앞을 중심으로 한국 인디1세대 록밴드 앤(Ann)의 보컬로 활동했다. 부산 지역 인디밴드에 관한 논문으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년의 철학』등 몇 권의 책을 썼고, 현재 사회적기업 부산노리단 공동대표, 지역문화지 [안녕 광안리] 편집장, 호밀밭출판사 대표 등으로 활동 중이다. 이메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