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공간이라면 으레 환한 조명 아래 규격화된 책상과 의자, 그리고 회의실이 떠오른다. 그래서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미국 구글 캠퍼스 같은 멋진 일터에서 일해보고 싶은 열망이 있기 마련이다. 세련된 인테리어 소품과 의자가 놓인 카페 같은 공간에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어두운 조명 아래 흡사 힙한 라운지 바를 연상시키는 일터가 국내에 있다. ‘제로원데이’ 행사 외에는 언론에 노출된 적이 거의 없는 조직 ‘제로원(ZER01NE)’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 이곳은 현대자동차그룹 산하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을 전담하는 조직이다. 하지만 명함 어디에도 현대차라는 문구나 로고는 보이지 않는다. 명함 디자인마저 아티스트가 만든 것처럼 독특함 그 자체다.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기가 예술가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창의적인 인재들을 불러 모아 세상에 없는 유일무이한 창작물을 잉태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이들이 속해 있는 곳이 제로원의 세 가지 기능 부문 중 하나인 ‘플레이그라운드’다. 조직명까지 ‘놀이터’가 아닌가. 제로원 탄생의 기획 단계부터 공간 디자인 설계까지, 지금의 제로원을 일군 숨은 주역이 있다. 바로 창작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뇌하는 플레이그라운드 총괄자 권영진 책임매니저다. 그를 만나 베일에 싸인 조직 제로원을 속속들이 파헤쳐 봤다.

조직명이 독특하다. 0과 1의 디지털을 의미하는 것도 같다. 무슨 의미인가.

많이 듣는 질문이다. 혹자는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세운 국가 이름으로 제로원을 떠올리기도 한다. 특정한 뜻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 아니다. ‘제로원은 제로원일 뿐이다. 본인이 느끼는 게 바로 제로원’이다. 그런 식으로 느껴지길 바란다. 뭔가 하나로 규정하기보다는 ‘새롭게 정의하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실험하자.’라는 의미를 담으려고 했다. 이건 현대자동차그룹 최고경영자의 뜻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거나 숫자처럼 어떤 행보의 첫 번째라는 의미를 담고 싶다. 우리가 시도하는 게 처음이었으면 좋겠다. 첫 번째가 있어야 그다음이 있을 테고, 그에 따른 책임과 역할을 수행했으면 좋겠다. 이름의 의미를 처음에는 몰랐지만, 일하면서 차츰 의미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고,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로원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하다.

최고경영층의 지시로 제로원 기획을 시작했다. 급변하는 산업에 따른 위기 대응을 고민할 때였다. 당시 업계에서 커다란 이슈 중 하나가 자율주행, 커넥티드카 등 신기술이었다. 이를 완전히 새로운 기술 기반으로 종래 관점을 탈피해 개발하려는 시도와 관련해 고민이 많았다. 이를 위해 인재를 영입하고, 그들을 품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고, 결과적으로 제로원은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을까?’라는 궁극적인 질문의 답은 결국 사람의 창의성에 있다고 봤다.

실무진들은 인공지능 등 신기술 분야의 창의적 인재를 어떻게 정의하고 모집하며, 어떻게 이들이 현대차와 미래 사회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일종의 선제적인 고민이었다. 인간 중심 이노베이션에 대해 고민하며, 창의적 인재를 주도적으로 선발하고 육성하도록 추진했다. 창의적 역량은 현대차 조직과는 아주 극단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온다고 봤다. 예술과 기술의 융합, 그들의 창의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관찰하고 싶었다. 그런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고 봤다.

본부에서 차출된 멤버 4명이 TF팀을 구성했다. 기획 단계는 길지 않았다. 1년 만에 끝냈다. 빠른 실행을 통한 레슨런(lesson-learned)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고, 모자란 것은 채워 넣자고 생각했다. 저희만의 색깔을 지닌 공간도 만들고 싶었다. 성수동, 을지로 등등 여러 곳을 찾아 벤치마킹했다. 저희가 원하는 기능들을 구현하려면 공간을 상당 부분 고쳐야 했다. 하지만 저희가 입주한 곳은 한화가 운영하는 공유 오피스 건물이다. 중요한 레슨런을 얻기 위한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편의 시설과 관리가 용이해 공유 오피스 건물을 선택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공유 오피스를 통해 혁신 센터를 구축하는 기업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로원은 단연코 선두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서고자 했다. 공간에 아트·테크·비즈의 개념을 담으려고 했다. 이를 위해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와 합작해 공간을 만들었고, 예비 창작자를 통해 운영에 필요한 부분을 자문하기도 했다.

제로원의 조직 구성은 어떠한가.

제로원은 2018년 3월에 운영을 시작한 창의 인재 플랫폼이다. 대외적으로는 스타트업의 기업 활동과 창의적인 인재들의 다양한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알려져 있다. 사내에서는 현대차와 기아라는 두 회사에 소속된 총괄 조직으로서 양사 미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역량을 갖춘 외부 파트너들과 손잡고 오픈 이노베이션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이다.

일반 기업과 스타트업부터 대학이나 기관, 개인 또는 팀의 규모이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한 아티스트, 엔지니어, 디자이너, 개발자까지 모두 제로원이 추구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즉 경계를 넘어선 협력의 대상이다.

광범위한 주체를 대상으로 오픈 이노베이션을 진행하다 보니, 각각의 전문 기능을 가진 부문으로 나누어 일한다. ▲먼저 사내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스타트업을 발굴, 육성하고 나아가 분사 업무를 맡고 있는 ‘컴퍼니 빌더’ ▲회사의 미래 전략과 방향성에 기반해 외부 스타트업의 육성과 투자를 담당하는 CVC(기업주도형 벤처투자)의 기능과 액셀러레이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제로원 벤처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창의적 인재들의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육성하며, 이들의 역량을 사내와 사회에 이식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플레이그라운드’로 구성돼 있다.

제로원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제로원 플레이그라운드의 운영을 맡고 있다. 2018년 제로원이라는 플랫폼이 현재의 형식과 심지어 이름조차 없었던 초기 시점부터 이를 기획하고 현실화한 초창기 멤버 중 한 명이다.

제로원 플레이그라운드는 외부에서 독창적인 관점과 역량을 갖춘 창의적인 인재들을 다양한 분야에서 공모를 통해 선발하고, 이들을 제로원 크리에이터(이하 창작자)라고 부르며 그들이 제안한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일을 수행한다. 더불어 이러한 프로젝트의 수행을 돕거나 고도화하는 데 필요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그 과정에서 잉태된 훌륭한 관점을 대중은 물론 현대자동차그룹 임직원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저는 그 과정에 이르는 일을 총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선발된 창작자의 독창적인 생각과 계획이 대중에게 그저 영감과 상상력이라는 형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적, 사업적 역량들을 적재적소에 연계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넣어 결과물이 전시장이 아닌 가까운 미래의 일상에 존재하게 만드는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 밖에도 2021년부터 ‘제로원데이’ 행사의 기획과 운영을 도맡고 있다.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개최했지만, 2022년부터는 더 많은 관객이 행사에 참여하도록 성수동 에스팩토리에서 올해를 포함해 2년째 진행했다. 제로원데이에서 선보이는 전시의 특징은 프로젝트 결과물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효과적인 전달, 그리고 이에 귀 기울이며 그 가치를 향유하려는 관람층의 확대, 전시에 참여한 제로원 창작자와 관계자, 이들과 관람객의 적극적인 교류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제로원에서는 인재를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고 어떻게 운영하는지 궁금하다.

매년 12월 중순께 공모를 시작해서 다음 해 2월까지 대면심사를 거쳐 선발을 완료하고, 3월부터 프로젝트 활동에 본격 착수한다. 매년 10월 ‘제로원데이’ 행사에 맞춰서 장장 7개월 동안 창작 활동을 진행한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는 공모 주제나 연령 기준이 없었다. 초기 3년간은 인재들의 다양성과 이들 간의 협력을 중요시했다.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일하는 방식과 그들이 다른 파트너들과 협업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그래서 동료들과 협업 프로젝트를 최소 1개는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했다.

그다음 2021년부터 다섯 가지 주제를 선정했다. 저희가 바라는 역량을 가진 이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뽑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창작자의 범주를 예술가뿐 아니라 대폭 확대했다. 남다른 역량을 갖춘 다양한 인재를 후원하는 곳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다섯 가지 주제는 먼 미래에 인류와 일상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고, 이 주제들은 현대차 그룹의 미래 역량과 밀접하게 관계돼 있다.

제로원에는 독특한 인재 운영 방식이 있다고 들었다.

얼럼나이(alumni)라는 제도가 있다. 해마다 20~30명 정도의 창작자를 뽑는데, 그중 절반이 새로 선발한 인원이고, 나머지 절반은 졸업생, 즉 얼럼나이다. 우리의 방향성을 충분히 이해한 얼럼나이에게도 계속 협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통상 한 기수에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20~25개다. 그중 현대차 전략의 방향성이 녹아 있는 핵심 프로젝트도 포함돼 있다. 여기에 얼럼나이가 현대차 연구원, 스타트업과 함께 참여하게 된다.

실제로 그들이 만든 것이 몇 년 후에 양산될 차량에 적용될 예정이다. 현대차 남양 연구소와 2년 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을 시도해온 결과다. 창작자가 참여해 고도화한 기술들이 양산 사례까지 간다면, 이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란 역사에 길이 남을 발자국을 남기는 셈이다. 예술계와 기업의 협업은 많았지만, 결과물이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로 양산된 사례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협업을 기획할 때부터 그런 결과를 의도한다는 점에서도 그간 진행해온 여러 융합 사례와는 결을 달리한다.

예술가로 대변되는 창작자들은 각자 출신도 다르고 개성도 독특하다. 이들을 관리해 프로젝트를 마치는 데 남모를 고충은 없는가.

제로원에서 창작자로 예술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역량을 갖춘 인재들을 고루 선발하고 있다. 예상과 달리 기술에 대한 지식과 역량이 높은 예술가들도 많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우선 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대중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관점의 소중함을 공감하며, 그것의 의미를 학습하고 서로의 생각을 모아 이를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이끌어내는 일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로젝트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필요하며, 이들과 깊은 유대감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과정에 학습과 교류가 수없이 따르고 적잖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하기에 즐거움이 큰 만큼 고뇌도 많았다.

더불어 작가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이지만, 저를 비롯한 운영진이 그 과정에서 한 팀이 되어 움직이는 것,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이 제일 어려웠다. 작가에게는 여전히 독립성을 부여해 그만의 세상을 구축하도록 하지만, 그 세상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일을 함께하는 과정은 창작자와 운영자 모두의 배려와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매해 선발하는 새내기 창작자뿐 아니라 예전에 선발된 얼럼나이(졸업생)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이들에게도 프로젝트 제안 기회를 동일하게 부여한다. 현대차 그룹 임직원과의 협력 등 이색적인 창작 기회를 제공하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은 얼럼나이로서 활동할 때 오히려 더 빛을 발하기도 한다.

제로원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추진해온 프로젝트 성과를 간략히 정리해달라.

2018년 플랫폼 운영 이후로 130명의 창작자 활동과 220개의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그들의 아이디어를 널리 공유하기 위한 행사인 ‘제로원데이’에는 8만 6,000명의 누적 관람객이 방문했다. 그 결과로 아르스일렉트로니카(오스트리아의 문화, 교육, 과학 재단)를 비롯한 해외 창의 기관들이 주최하는 전시와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유형의 결실은 제로원이 거둔 작은 성과에 불과하다. 창작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게 지원하고, 그들이 창의성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방법을 모색하고자 추진해온 일이 제로원에서 이룩한 값진 성과다.

제로원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창작에 필요한 재료비 지원을 넘어서 그들이 제안한 아이디어의 가치와 그것을 공유하는 활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제공하는 제도(크리에이터 FEE)를 도입했다. 또한 올해 처음 오픈한 ‘제로원 팝업’은 제로원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의 가치를 창작자들의 경험과 프로젝트를 소개해 제안하는 대중 참여형 프로그램으로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제로원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들에 대해 창작자들이 실험한 결과를 사회에도 공유하겠다는 취지다. 제로원이 기획 당시부터 창작자들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들의 역량을 예술계는 물론, 기업과 사회 전반에 전파하려는 의도로 준비된 플랫폼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이 늘어날 것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그룹에서도 유사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제로원에서 추진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차별되는가.

현대차 그룹에서 추진해온 창작자 대상 프로그램들은 주로 순수한 아티스트와 예술기관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해외에서는 테이트모던, 라크마(LACMA) 같은 해외 기관과 협력해 아티스트의 작업을 지원하고, 국내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현대차 시리즈와 프로젝트 해시태그 같은 활동이 있다.

그룹 차원의 기존 후원 활동이 창작자를 예술가로 국한해 지원한 것이라면, 제로원은 창작자를 말 그대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예술가는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역량을 갖춘 이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역량을 예술을 포함한 여러 영역에서 활용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다시 말해 예술가를 중심으로 정의되는 창작자의 범위를 확대하고, 창작자로서 첫걸음을 떼는 이들에게 성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타 기업이나 기관과 다른 제로원만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제로원만의 강점은 운영진의 역할에 있다. 운영진의 역량이 창작자들과 융합하면서 프로젝트를 구체화하는 데 기여한다. 다른 지원 기업이나 기관 중에는 프로젝트 수행에 필요한 돈과 공간을 주고, 한 번의 전시로 끝나는 곳도 있다. 그런 점에서 저희는 확연히 다르다. 프로젝트의 관점을 넓히려고 서로 고민하고 그런 대화의 기회를 많이 만든다. 이를 생소하게 생각하는 창작자들도 일부 있다. 강요하거나 기획 방향을 틀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생산적인 영향을 주고 싶을 뿐이다. 제로원데이 행사를 끝내고 나면 창작자들의 피드백이 있다. 주제를 포함해 창작을 둘러싼 생각이 바뀌었고, 그간 추구해온 형식과 결과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탐구를 위한 방향성이 이제야 잡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제로원데이 행사가 그들에게 새로운 탐구의 시발점인 이유다.

창작자 지원 프로그램은 일종의 투자다. 기업이 이윤을 바라지 않고 투자할 순 없는데, 어떤 유무형의 효과를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 6년간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제로원이 창작자를 후원하는 구심점임을 기업의 관점에서 이해시키는 것이 매우 힘들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공감해주었던 부문도 서서히 실질적인 결과를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그런 경우, 대개 실제 사례를 만들어 보여주는 게 터닝포인트가 된다. 플랫폼의 장기적인 운영과 확대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판단해서 2021년에는 저도 창작자로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했던 적이 있다.

‘MoDU’라는 프로젝트를 제안해 제로원의 예술가, 스타트업과 함께 ‘개인형 모빌리티’로서 휠체어를 만들었다. 2020년 제로원 창작자가 최신 기술을 장애인의 이동권을 개선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는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제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지원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휠체어를 장애인뿐 아니라 누구나 탈 수 있는 새로운 이동 수단으로 대중에 선보일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장애인의 이동을 돕는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길조차 제대로 조성되지 않은 매우 열악한 현실을 직접 경험해보고, 모두의 이동 수단으로 휠체어를 거듭나게 하는 노력이 결과적으로 장애인의 이동권을 대폭 개선하기 위한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무려 9곳의 파트너들과 협력하며 2년여에 걸쳐 전에 없는 콘셉트의 전동 휠체어와 자율주행 휠체어를 만들었다. 특히 자율주행 기능은 자동차로 대변되는 기술이지만, 휠체어를 통해 확장되는 사례를 접한 사내 안팎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개발된 휠체어를 선보이는 시연회를 열었고, 그 내용이 사내외로 기사화되면서 다양한 포럼의 연사로 나서며 장애인을 포함한 모두의 이동평등권을 위한 기술의 필요성을 소개하는 자리도 잦아졌다. UNDP(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유엔개발계획)와 현대차가 함께 운영하는 사회혁신가를 위한 프로그램에 저희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경영층의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고, 최근에는 글로벌 파트너들로부터 협조 요청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휠체어를 사용해 다양한 신사업을 준비해보고 싶다는 사내 팀들의 요청도 많았다. 심지어 참여했던 스타트업 중 기존 사업 영역을 접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했다. 더불어 예술가의 활동 영역을 넓힌 사례로 소개되기도 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얼럼나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제로원에서 적잖은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창의적 인재를 키우려는 속내가 궁금하다.

스타트업이나 다른 기업들과 협업하며 현재 갖추지 못한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일을 흔히 오픈 이노베이션이라 한다. 주로 기업 활동에 필요한 기술 역량을 확보하고자 이뤄지는 투자나 공동 연구개발, 대외 교류 및 협력 활동을 지칭한다. 이런 활동이 기업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자, 미래의 성장 동력을 주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대표적인 방식으로 활용돼 왔다.

제로원에서 추구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은 조금은 더 앞서 나간 형태다. 제로원이 창작자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지만, 이를 더욱 거시적 안목으로 바라보면 다른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기업이 고민하는 미래의 사용자 시나리오와 기술 개발의 방향성을 창작자들과 협업을 통해 남다른 관점으로 탐구하고 실험하는 계기를 갖게 되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분명 기업의 미래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하고 고도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나아가, 창작자들과 독창적인 협력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된 경험이나 시행착오는 임직원에게 새롭게 일하는 방식을 몸소 체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창작자들이 제안한 아이디어는 협업의 과정을 통해 거듭 이해하고 응용하는 과정을 겪게 되고, 임직원에 의해 새로운 아이디어로 거듭나게 된다. 현재 제로원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불러오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프로세스화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창작자의 아이디어가 단순히 전시장에 비치되는 작업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역량과 스킬을 새로운 과정에 활용하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사례도 발생할 것이다. 창작자가 예술가를 지칭하는 말로 더 이상 규정돼서는 안 된다. 창작은 전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예술적 가치는 물론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나아가 실질적으로 기업과 사회의 변화를 불러오는 시발점이자 촉매로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내년도 제로원에서 추진하려는 창작자 대상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과 계획은 무엇인가.

제로원에서 추구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정의와 전략의 핵심은 바로 창작자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일깨워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극대화할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해 추진하고 있는 실행 전략들은 '교육'으로 통용되는 새로운 배움과 실천의 방식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이는 결국 새로운 '기업'을 넘어서 전에 없던 새로운 '산업'이 창발이 되는 계기가 되어줄 거라 확신한다.

창작자의 범위를 현대차 내부까지 포함해 점차 확대할 것이다. 이들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고 싶다. 더불어 저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이들을 많이 만나보고 싶다.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일을 가속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또한 그간 펼쳐온 실험의 결과들을 집대성해 조금 부족하더라도 프로세스화해서 더 많은 이들에게 제로원의 오픈 이노베이션 활동에 더욱 쉽게 참여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 힘쓰고 싶다.

제로원 내에 작은 학교를 만들고 있다. 바로 ‘01 코덱스(CODEX)’라는 이름의 아카데미 프로그램이다. 올해 시범 운영을 했는데, 내년에는 좀 더 구체화할 계획이다. ‘01 코덱스’는 제로원의 일련의 활동을 더욱 증폭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언젠가는 제로원을 넘어서 예비 창작자들과 미래를 준비하는 혁신 활동에 관심이 있는 기관 등 모두를 위한 배움과 교류, 소통의 기반이 되어주길 희망한다.

창작자들이 제로원에 보이는 관심이 높다. 제로원이 함께하고 싶은 창작자들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제로원이 제시하는 주제에 대해 무엇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관점을 가진 이들을 선호한다. 자신이 제안한 프로젝트의 실행을 위해 정교하게 계획하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추진력과 책임감을 가진 이들이면 좋겠다.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역량과 경험을 갖춘 이들도 많지만, 관련 역량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훌륭한 팀을 만들고 효과적으로 이끄는 방식도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본인의 역량만으로는 아이디어를 애초의 계획대로 구체화하는 일은 실상 드물다. 더구나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작업의 경우, 최신 기술이 계속 등장하고 기존 기술이 빠르게 업데이트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실시간으로 배워가며 적용해야 할 것이 훨씬 많다. 결국 타인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타인과의 교류나 협업에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는 필수다. 남다른 꿈을 꾸는 사람, 그것이 말이 아닌 실행 전략을 지닌 예술가, 엔지니어, 디자이너, 개발자, 건축가, 기획자 모두가 제로원에서 만나고 싶은 이상형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완성한 개념이 아니기에 아직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정립돼 있지 않다. 제로원이 바라보는 또는 책임님이 생각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개념은 무엇이고,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기업이 미래의 원동력이라 믿는 역량을 밖에서 찾고 내재화하는 방식, 즉 정해진 퍼즐의 빠진 조각을 찾아 넣는 것이 일반적인 오픈 이노베이션의 개념이다. 반면, 제로원에서 추구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은 빠진 퍼즐을 찾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을 새롭게 구성해서 새로운 판을 만들어 나가는 것, 혹여나 그 과정에서 빠져 있는 조각이 있을 때, 이를 밖에서 찾는 게 아니라 필요할 경우 스스로 만들어내는 역량을 갖추는 방식이다.

문제에 봉착했을 경우 답을 찾으려고 외부나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참조, 즉 실패를 줄이거나 임시적인 문제 해결에 필요한 요건일 경우가 다반사다. 궁극적 답은 결국 스스로 찾고 만들어 나가는 거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다가올 다양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게 된다. 진정한 혁신을 위한 오픈 이노베이션은 꽤 긴 안목을 가지고 추진하되, 그 과정과 결과를 효과적으로 내재화할 수 있는 조직의 문화와 핵심 결과물을 도출하는 프로세스의 변화를 동시에 수반해야 한다.

끝으로, 창작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요즘을 살아가는 창작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얘기가 두 가지 있다. 다소 주제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저 역시 여러분과 같은 생태계에 머무는 한 사람의 동료로서 나누고 싶은 속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기술이 눈부신 속도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기술을 도구가 아닌 대상으로 바라봐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은 도구로 인식했던 것이었지만, 지금을 포함해 앞으로는 이들을 우리가 마주할 또 다른 주체로 인식해야 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주체로 바라보려면 기술의 본래 기능과 구성은 물론이고, 그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주체와 공존하는 나와 우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모순과 편협했던 습관의 문제점을 파헤쳐 볼 수 있다. 산업에 의해 주도된 인식 속에 자리 잡은 도구로서의 기술과 이를 단순히 활용하는 사용자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주체 간의 관계로 인식하고 그들을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새로운 창작의 기회가 많이 생겨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첫 번째 전하고픈 얘기다.

두 번째는 본인의 역량에 입각해 생각하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주고자 하지만 습관처럼 자기 존재와 역량을 이분법처럼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작가니까, 또는 엔지니어이니까, 이래야만 해, 이래서는 안 돼.’라며 지켜야 할 경계를 스스로 만들고, 자신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일을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업의 구분과 그에 입각한 사고방식이 여러분의 창의적인 생각을 무뎌지게 만든다. 단순히 자기 생각을 구체화해 현실로 만드는 창작자로서 그 역할에 충실하길 바란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계획을 믿고 꾸준히 도전하고 시도하며 주변과 나누었으면 좋겠다. 시도한 것의 답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젠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 인과를 소중히 생각하면 분명 의미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