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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디자이너로 참여한
연극 <모래여자> 공연 모습 |
1988년 우연히 <호모세파라투스라>라는 연극을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을 하다 올려다본 천정의 조명과 그 조명에서 나오는 빛이 신기하고 궁금해졌다. 조명실을 찾아가 조명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서울예술전문대학(지금은 서울예술대학교)을 가면 배울 수 있는데, 여자는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씀해주셨다. 당시는 조명을 하는 여성이 없었고, 조명은 남자들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던 시기였다.
서울예술전문대학에는 스태프를 전공하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극장식구'라는 시스템이 있었다. 드라마센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공연을 담당하고 역사적으로 오래된 극장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학생들로 교육은 선배들로부터 전수받았다. 그곳 생활을 하다 보니 전기를 잘 알게 되었다. 무거운 조명기도 번쩍 들어 올리는 남자들에 비해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지만, 당장이 아니라 더 먼 미래에 조명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그 정도 힘든 것은 이겨내야 했고, 또 그럴 수 있었다.
그렇게 남자들보다 많이 뒤처진 상태로 졸업을 했는데, 운 좋게 동숭아트센터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연에 참가하는 것조차 꺼리는 연출가나 제작자들이 많았다. 그럴수록 더욱 도전의식이 생겼다.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덕목을 이미 갖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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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디자이너로 참여한
뮤지컬 <컴퍼니> 공연 모습 |
편견을 딛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25살에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뉴욕 연수 기회가 찾아왔다. 동숭아트센터 김옥랑 대표와 미국 록펠러재단(The Rockefeller Foundation)이 맺은 연수 프로그램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된 것이다. 라마마극장(La MaMa Experimental Theatre Club)에서 6개월간 조명디자인을 공부하거나 오프오프브로드웨이(Off-Off-Broadway) 작품에 참여하며 그곳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6편의 공연을 디자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30편 정도의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 한편 새롭고도 놀라운 기술력과 상상할 수 없는 창의적인 생각들에 놀라움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일들이 그곳에서는 당연하게 구현되어 공연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뉴욕에서 지낸 6개월 동안 내가 배운 것은 첫째, '세상에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고자 하는 의지와 창의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발전시켜나가면, 우리도 안 되는 것이 없는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둘째로는, '진실은 통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작품을 하면서 의사소통으로 인해 문제가 생겨 3박4일 혼자 밤을 새우면서 작업한 적이 있다. 작품을 망치면 안 된다는 책임감과 프로로서 끝까지 해보자는 투지로 하루에 한 시간도 못 자면서 작업하는 나를 그들은 정말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격려도 해주고 도움도 주면서 그들이 내게 했던 말은 "네가 어떤 빛을 찾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미 그 빛을 만들어냈다"였다. 정말로 내 빛이 좋아서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작품을 완성해내려는 노력을 높이 샀던 것이다. 그때 정말 중요한 건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태도라는 것, 그리고 틀을 갖지 않고 창의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점이나 나이, 국적의 차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여성들은 예민함과 세심함에서 남성보다 우월할 수 있다. 디자이너가 가져야 하는 덕목 중 참으로 중요한 것을 여성들은 이미 갖추고 있다. 작품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정서를 읽어내는 예민한 감성, 그리고 그것을 빛으로 통제하는 세심한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명디자이너는 여성들이 하기에 아주 좋은 직업이라고 믿는다.
'여성'이라는 꼬리표, 어느덧 장점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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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디자이너로 참여한
뮤지컬 <에비타> 공연 모습 |
연수 이후 맞은 인생의 전환점은 10년 동안 다니던 동숭아트센터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된 것이다. 연수 이후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 함께 작업하는 작업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지면서 나의 빛도 점차 진화되었던 것 같다. 조명 작업을 열심히 하는 여성 조명디자이너가 있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차츰 작품수도 늘어나면서 이제는 직장이 아닌 진정한 프로의 세계에 발을 내딛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3년은 거의 악몽이었다. 극장에 있을 때보다 일도 많이 줄고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 또한 많아지면서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즈음에는 여성 조명디자이너라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희소가치랄까? 연약한 여성일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때로는 그리드에 매달리면서 조명기를 달고 빛을 맞추고 큰소리로 지시를 하고 연출가와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일이 늘어나자 혼자서는 도저히 조명디자인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면서 팀을 꾸려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것이 지금의 '빛놀이 집단 광작소'다. 시작은 디자이너들의 모임이었다. 함께 실험하고 정보도 공유하면서 더 나은 디자인을 하는 게 목적이었다.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일단 크루(crew)부터 시작해서 조명기의 정확한 사용 방법, 빛의 질감, 빛을 맞추는 방법 등 다양한 기술적인 경험을 쌓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팔로우 스팟(Follow Spot)도 잡고, 오퍼레이터로 시각을 넓히고 어시스턴트를 하면서 디자인 과정을 배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디자이너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빠르면 7년, 늦으면 10년 정도다. 힘든 과정이지만 잘 견뎌서 지금 현역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는 네 명이 있다. 아직 시작 단계이지만 차근차근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들 중 두 명은 여성이다. 그 누구보다도 정신적으로 강하고 남성들보다 의리 있으며 때로는 섬세하게 자신의 빛을 창조해나가고 있다. 나는 디자이너여서 행복하다. 그리고 함께하는 제자들과 식구가 16명이나 있어서 더 행복하다.
사진제공_구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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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구윤영은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를 졸업하고, 1991~2000년 동숭아트센터에서 근무했다. 1995년 미국 라마마 극장 연수 중 오프오프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빛놀이 집단 광작소에 몸담고 있으며, 연극과 뮤지컬, 아동극, 무용, 오페라, 창극, 콘서트, 방송, 전시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 중이다. 뮤지컬 <바람의 나라>로 제12회 뮤지컬대상 기술상과 제1회 뮤지컬어워즈 조명음향상을 수상했고, <영웅>으로 제4회 뮤지컬어워즈 조명음향상을 받았다. 이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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