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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는 누구?
기획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기획자는 '번역자' 혹은 '통역자'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기획자는 예술가와 관객 혹은 예술가와 행정조직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한다. 예술가에게는 예술가의 언어로 관객에게는 관객의 언어로 그리고 행정조직에게는 행정조직의 언어로 서로에 대한 설득의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러한 소통은 서로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기획 작업'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기획자는 그리 고상한(?) 직업이 아니다. 프로그래밍이나 프로듀싱과 같은 멋진 작업은 어느 정도의 경력이 되어야 할 수 있으며, 그때까지는 영수증 정리, 온라인 리서치, 인쇄물 제작 및 비치, 홍보물 발송 작업 등등의 갖가지 업무들을 거쳐야 한다. 즉, 기획자가 되려면 허드렛일을 포함한 다양한 경험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성장한 기획자는 설득력 있는 '소통의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며, 사업의 조율자로서 아이디어에 불과한 생각들을 계획과 실행을 통해 현실의 결과물로서 구현하는 능력 있는 전문가로 거듭나게 된다.
드라마터그를 꿈꾸다
나는 대학에서 연극학과를 다니면서 비평과 드라마터지를 공부했고, 졸업 후에 프로덕션 드라마터그로서 작업하기를 꿈꾸었다. 여기에서의 드라마터그란 제작팀의 이론적 조력자로서 제작의 전 과정에 있어서 사전 조사와 연구를 통해 작품의 제작 방향과 제작 방식의 결정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말한다. 하지만 수업과 달리 현장에는 드라마터그란 직업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드라마터그와 가장 비슷한 역할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기획자였다.
문화예술컨설팅(메타기획컨설팅) 분야에서 2년 정도의 작업을 거쳐 민간 극단(공연창작집단 뛰다)에서 본격적으로 기획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10여 년간 민간 극단의 기획자로서 공연 제작, 지방 및 해외 투어, 교육 사업, 지역 문화 사업, 홍보 및 마케팅, 조직 운영 등의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경험은 부족하고, 일은 많고, 그에 따른 보상도 넉넉지 않았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극단을 나와 지역문화재단의 거리예술축제(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서 제작팀장을 하고 현재 서울예술단 공연기획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예술 단체에 있어서는 민간 극단, 지역문화재단 그리고 국립 단체 그리고 예술 장르에 있어서 연극, 거리예술, 가무악(뮤지컬)을 경험하면서 연극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던 관심들이 자연스럽게 공연예술 전반으로 확장되었고 이는 프로듀서로서 매우 유용한 자산이 되었다.
기획자의 성장
나에게 있어 기획자로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외롭다'는 것이었다. 직접적으로는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고 전공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선생님도, 선배도 없이 모든 일들을 하나씩 부딪치고 실패하며 배워야만 했고, 이러한 과정에서의 고민을 함께 나눌 만한 동지들로 별로 없었다.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기획자에게도 교육과 성장과 점검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주로 혼자서 작업을 하게 되는 민간 극단의 기획자는 자신이 작업을 잘하고 있는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중간 과정에서 피드백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기획자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성장을 지켜봐 주고 도움을 주고받는 것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기획자는 언제나 숨 쉴 틈 없이 바쁘다. 발등에 떨어진 업무들을 처리하기에도 버겁다. 그러다 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사업에 휩쓸려 흘러가게 된다. 점점 더 업무가 전문화되고 세분화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구조를 읽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술 정책, 관객의 변화, 현장의 흐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통해 나의 조직과 사업에 대한 이해를 우선해야 하며 그중에서의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감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기획자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지만 최소한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젊은 기획자들에게 희망적인 얘기는 아니지만 민간 예술 단체 기획자가 사라지고 있고, 무수한 인턴에 비해 턱없이 적은 정규직 자리, 단계적 성장에 대한 롤 모델의 부재 등을 바라보면 예술 기획자를 꿈꾸는 청년들의 현실도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공연계에서의 기획자의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고들 이야기하지만, 확장되는 역할에 비해 기획자를 성장시키는 프로세스는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이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나는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이고 싶다. 여기에서의 크리에이티브란 단지 창작 작업에 얼마만큼 참여하고 있는지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획자에게 있어서의 크리에이티브는 '내용'이 아닌 '방법'에 있어서의 창의적인 작업을 뜻한다.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풀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문제는 서울예술단이 장르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중장기 발전 방안을 수립하여, 기획팀의 안정적인 운영을 통해, 좋은 창작 공연을 만들어 많은 관객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이 뜻을 같이하는 동료, 선후배들과의 긴밀한 소통들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사진출처_서울예술단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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